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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혼으로 남편부터 바꾸겠습니다-136화 (136/210)

136화

Chapter 15. 수확제

나는 그저 빤히 에반젤린을 바라보았다.

노려보거나 눈치를 준 건 아니다. 그저 어떻게 하나 보려던 것뿐.

압박감을 못 이겼는지 저쪽이 급발진했다.

“내, 제가 한 말 못 들으셨나요? 황후 폐하의 대리인으로 왔다고요!”

아, 이제 알겠다.

그러니까 황후만 한 대접을 해 달라는 소리구나.

얕보이지 않기 위해서인지 차림새도 요란했다.

금사 자수가 빼곡한 초록색 드레스와 가슴에 채워진 커다란 검은 보석 브로치, 머리에는 루비 장식이 화려하게 빛났다.

끈 떨어진 신세가 되고 사교계의 평판이 바닥까지 떨어지고도 여전한 태도는 감탄스러울 정도였다.

내가 굳이 뭐라고 할 것도 없다는 듯 어떤 언질이나 신호도 없었는데 시녀장이 나섰다.

뮤젠 공작 부인이 나와 에반젤린의 사이를 가로막으며 차갑게 말했다.

“그 황후 대리인께서는, 황태자비 전하 앞에서 지켜야 할 예의에 대해 황후 폐하께 듣지 못하신 모양입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

대놓고 ‘네가 가정교육을 못 받아서 이렇게 무례하게 구는구나?’라고 말하다니.

역시 뮤젠 공작 부인, 대단해.

사교계 언어에 익숙한 에반젤린이 저 말을 못 알아들었을 리 없다.

그녀는 발끈하려 했으나, 뮤젠 공작 부인의 위압감에 도리어 기세가 밀렸다.

“그, 그건! 황후께서 저에게 안 알려 주신 게 아니라……!”

“그러면 당신이 알면서 제대로 안 지키고 있다는 소리군요. 이 역시 황후 폐하의 명예에 먹칠하는 일입니다.”

“…….”

에반젤린은 스마트폰 진동 모드라도 켜진 것처럼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에반젤린을 맞이한 곳은 황태자궁의 내 집무실.

곁에는 백금 열쇠를 보관 중인 시녀장만이 아니라, 내정 관리를 돕기 위해 본궁에서 보낸 시종들도 있었다.

여기서까지 뻗대는 건, 결국 자신의 무례를 황제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하겠다는 소리다.

결국 에반젤린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황태자비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황후 폐하의 명으로 곧 있을 수확제(收穫祭) 때 쓸 제의(祭衣)를 가져왔습니다.”

고개를 숙인 에반젤린의 뒤에서 시녀가 황급하게 나와 시녀장의 손에 붉은 상자를 전해 주었다.

곧 시녀장이 직접 들고 와 내게 보여 준다.

‘수확제라… 하긴 얼마 안 남긴 했구나.’

아르타누아 평원의 풍작을 비는 수확제는 제국 황실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행사 중 하나였다.

아르타누아 평원의 수확은 제국 내만이 아니라, 대륙 전체에서 신경 쓸 정도로 중요했다.

이곳의 별칭이 대륙 전체의 곡간일 정도니 말이다.

올해의 수확량이 곧 내년 대륙 밀과 빵 가격에 직결되기 때문이다.

당연히 수확제의 제주(祭主)역시 이스트리드 황실이다.

원래라면 황제와 황후와 함께해야 할 테지만, 지금 황후는 근신 중.

따라서 내정을 대신 맡은 나와 아르파드가 함께 치르게 될 예정이다.

이미 황제의 인가 역시 나와 있었다.

그 때문에 황후궁에서 보관 중이던 수확제를 위한 의상이 미리 보내진 것이다.

내 사이즈에 맞게 수선해 두어야 하므로.

에반젤린은 내가 제의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어떻게든 내 흠을 잡고 싶은지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싫은 얼굴을 계속 봐 줘야 할 필요 있나?’

나는 고개를 흔들어 축객령을 내렸다.

“나가 봐.”

“어, 네?”

“돌아가는 길에 궁의에게 들르는 게 어때? 귀에 문제가 있는지 검사라도 받아 보도록.”

“…!”

에반젤린은 굴욕감에 바들바들 떨면서도 순순히 물러나려 하지 않았다.

“그래도 제가 보는 앞에서 확인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혹여나 제의에 문제라도 발견될 경우를 대비해서…….”

나는 차갑게 물었다.

“황후께서는 수확제의 제의를 제대로 관리 안 하셨나 보군?”

“아닙니다!”

“그러면 아무 문제도 없을 테니 상관없겠지.”

“하, 하지만 나중에 문제가 생겼을 때 이를 황후 폐하께 돌리기라도 하시면……!”

한마디로 문제가 없는데 내가 나중에 만들어서 황후에게 뒤집어씌우면 어떡하냐는 소리다.

‘꼭 자기 같은 발상이긴 하네.’

저건 에반젤린의 특기이긴 했으니까.

나는 평온하게 대꾸했다.

“한두 시간 뒤면 황태자 전하와 함께 황제 폐하를 뵐 거야. 그때 함께 확인할 테고.”

이 말에 에반젤린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그녀가 듣기엔 지금 내가 자랑하는 말로 들리는 모양이다.

“폐하께서 함께 확인하실 테니 문제가 생길 일은 없어. 그러니 그만 물러가도록 해.”

에반젤린은 더 뭐라고 반론하지 못했다.

몇 번 입술을 달싹이다가 결국 굴욕감 가득한 표정으로 인사를 올린 뒤 물러났다.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에반젤린은 자신답게 행동했다.

어떻게 해서든 황후의 지위와 권력을 내세워 우월하다고 주장하고 싶어 하는 것도.

내 꼬투리를 잡아서 어떻게든 흠집을 내 보려다 실패하고 분노를 참는 모습 역시.

하지만.

“…….”

“왜 그러세요, 비 전하?”

애니의 질문에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애니는 에반젤린의 굴욕감에 통쾌하다는 표정이었다.

대부분의 궁인 반응도 비슷했다.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상황.

하지만 나는 약간의 위화감을 느꼈다.

‘분명히 지난 재판 때 에반젤린이 좀 더 조심하고 교활하게 행동하려는 느낌을 받았었는데?’

게다가 수확제를 위한 의상을 대신 전달하는 일은 굳이 직접 할 필요 없는 일이다.

굴욕감 외에 얻을 수 있는 게 없는 일일 뿐이니 에반젤린이 피하는 게 더 맞지 않나?

나는 긴장감을 놓지 않기로 했다.

* * *

분노와 굴욕감으로 달달 떨리는 에반젤린의 몸은 방을 나선 후에도 그대로였다.

치욕감을 곱씹듯 푹 수그린 어깨와 바닥을 뚫어져라 보느라 절대 들어 올리지 않는 고개까지.

그린 듯 선명한 패배자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황궁을 나와 루스 후작저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마침내 고개를 들었을 때.

에반젤린의 입가에는 자신만만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녀는 가슴에 달고 있던 검은 보석을 떼어 내어 뿌듯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됐어. 이걸로 준비는 끝났으니까.”

몇 번 마차를 갈아타고 옷을 바꿔 입은 끝에 에반젤린이 도착한 곳은 루스 후작저가 아니었다.

바로 수도 외곽의 허름한 한 신전이었다.

* * *

나와 아르파드의 결혼 후.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내가 황제를 처음 알현하고 아르타누스 홀을 받아 낸 이후.

황제와 아르파드의 사이는 제법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물론 순식간에 평범한 부자 사이처럼 가까워졌다는 건 아니다.

그러기에 황제는 의무와 죄책감에 묶여 있었고, 아르파드는… 불만과 심술을 감추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처음에 비하면야 많이 말랑말랑해진 건 맞았다.

‘이건 솔직히 전부 내 덕이다!’

황실 행사로 정해져 있는 것보다 더 많이 부자가 만나도록 유도하고.

솔직하지 못한 점이 지나치게 비슷한 두 사람 옆에서 최대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려 노력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황제에게 날 선 말을 하려는 아르파드의 옆구리를 찌른다거나.

“정찬 자리로도 충분한데 굳이 티타임까지 함께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당신……!”

황제가 한 뻣뻣한 말을 부드럽게 번역한다든가.

“귀찮아도 어쩌겠느냐. 그게 황실의 의무인데.”

“폐하께선 더 자주 보고 싶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등등등.

지난 몇 달간 내 눈물 어린 노력의 결과.

이 뻣뻣한 부자가 나 없이 서로 일상 대화를 나누는 상황까지 온 것이다.

“흠. 이 스콘이 제법 맛이 괜찮구나. 네가 어릴 때 좋아하던 맛인데.”

“그게 언제 적 말씀이십니까. 지금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내의 입맛엔 맞는 모양이더군요.”

아르파드는 황제가 밀어 준 접시를 내 앞으로 쓱 옮겨 왔다.

부친의 애정 표시를 미꾸라지처럼 피해 버리는 아르파드다.

‘이 인간아…!’

결국 또 내가 나설 수밖에.

나는 황제가 권했지만, 아르파드의 손에 내 앞으로 온 스콘을 잘 쪼개어 잼과 크림을 발랐다.

그리고 웃으며 내밀었다.

“아, 하세요.”

“당신 먹으라고 준 건데… 당신 무화과 스콘 좋아하잖아.”

“자, 아.”

내가 밀어붙이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아르파드가 입을 벌렸다.

내 주먹만 한 스콘이 두 입 만에 아르파드의 입 안으로 사라졌다.

‘잘 먹으면서 왜 이런담.’

정말이지, 손이 지나치게 많이 가는 남자다.

내가 작게 한숨을 쉬고 있자니, 옆에서 황제의 흐뭇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이가 좋아 보이니 다행이구나.”

아르파드가 어째선지 콧대를 들어 올리며 대꾸했다.

“황제 폐하, 황후 폐하와는 달라서 다행이지요.”

“그렇지.”

놀랍게도 아르파드가 대놓고 한 디스를 황제는 별 반감 없이 받아들였다.

하긴, 황제는 황후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곧 내가 밝혀낼 진실까지 알면, 아마 증오하게 될 테지.’

딱히 그 사실에 황후에게 동정심을 가지게 되거나 하진 않았다.

지금 나는 목숨을 건 전쟁 중이니까.

내가 잠시 무거운 생각에 빠진 사이.

황제는 여전히 흐뭇한 미소를 띠운 채 말을 잇고 있었다.

“지난 진홍월이 꽤 길었는데도 아르파드가 대외 활동을 빠짐없이 한 걸 보고 놀랐다.”

본래 진홍월 기간에 아르파드는 낮에라도 대외 활동을 최대한 자제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밤에는 나와 함께했고, 낮에는 정상적으로 모든 일정을 처리했다.

황제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네가 잘해 준 모양이구나.”

“별말씀을요.”

하지만 아르파드가 옆에서 부정했다.

“아내가 매우 잘해 준 게 맞습니다. 매우.”

그는 의미심장하게 강조하면서 나를 빤히 보았다.

내… 입술을.

나도 모르게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 인간이!’

내 타박 어린 시선을 아르파드는 짐짓 모르는 척했다.

우리의 이런 시선 교환까지 금실 좋은 아들과 며느리로 흐뭇하게 바라본 황제는 내가 상상도 못 한 말을 꺼냈다.

“황실에는 수확제를 두고 이런 속설이 있단다.”

“어떤 속설이요?”

“수확제의 제주로 참여한 부부가, 그 밤에 가장 소중한 결실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이지.”

황제가 시전했다. ‘너희 아이 소식은 아직이냐?’를.

나는 마시던 차를 뿜을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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