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아르파드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예상을 빗겨 가 있었다.
“당신은 이미 말했잖아?”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말, 안 했는데?”
분명히 안 했다. 아르파드와 했던 대화 내용을 최대한 다시 떠올려 봤지만, 확실하다.
내가 의식적으로 말하는 걸 피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르파드는 피식 웃었다.
“우리가 만나자마자 당신이 말했잖아? 내 광증을 해결해 줄 수 있다고.”
“아, 그거야 그렇긴 한데…….”
아르파드의 사실 그대로 잔인하게 후려치는 지적이 이어졌다.
“게다가 부황 앞에서 아르타누스의 축복을 받아, 당신이 있는 한 광증으로 희생되는 황족은 없을 거라 단언했지. 그건 당신이 광증을 가라앉힐 수 있다고 말한 것과 다르지 않잖아?”
“…….”
“무엇보다… 당신이 날 지나치게 안 두려워해서 말이야. 뭔가 있다고 생각했지.”
이건 확실하게 부정할 수 있었다.
“아닌데. 나 엄청 무서워했는데.”
아르파드는 픽 웃었다. 얼토당토않다는 반응.
“내가 살면서 날 두려워하는 인간을 몇이나 봐 왔다고 생각해?”
아마 수도 없이 많겠지. 살면서 봐온 사람의 숫자는 곧 그를 두려워하는 이들의 머릿수일 거다.
“그래서 난 두려움에 꽤 민감해. 그리고…….”
낮은 속삭임이 내 귓가를 간질였다.
“당신은 내 앞에서 너무 자신감 넘쳤거든. 꼭 맹수에게 채워 둔 사슬의 길이를 정확히 알고 움직이는 사람처럼.”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군. 맹수의 이빨이 통하지 않을 보이지 않는 갑옷을 입고 있는 사람처럼 대범하게 행동했으니까.”
“…….”
반론하거나 부정하기 힘들었다.
‘내 존재 자체가 아르파드의 광증을 가라앉힐 수 있다는 건 알고 있긴 했으니까.’
물론 그의 말처럼 진짜 안전하다거나 완전히 믿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말이다.
‘완전히 이성을 잃은 상태라면, 아르파드가 나를 죽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용의 신부라는 건, 잡아먹힐 제물이 될 수도 있는 존재니까.
새삼 아무리 사슬이 있었다곤 하지만, 어떻게 그 상태의 아르파드에게 달려든 건지 모르겠다.
‘아니, 아닌가. 무슨 일이 생겨도, 설령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가능했던 건가.’
그런 각오 없이는, 광증으로 제정신이 아닌 아르파드의 앞에 나설 수 없었다.
죽지 않을 거라 믿은 게 아니었다.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을 뿐.
두려움이나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 그에 대한 안쓰러움과 동정심이 먼저였다.
그게 내 발을 움직이게 했다.
솔직하게 말했다.
“당신이 날 안 죽일 거라고 믿은 건… 아니에요. 광증 때문에 날 죽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아르파드의 눈이 커졌다.
조금 기분 나쁠지도 모르겠다. 그로서는 화가 날 이야기겠지.
하지만 더는 진실을 숨기고 싶지 않아서 사실대로 말했다.
“내가 광증을 가라앉힐 수 있는 건 맞지만, 당신이 광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내 피와 살을 탐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각오하고 있었어요.”
내 고백에 튀어나온 아르파드의 대답은 여러모로 예상과 달랐다. 애초에 이 남자가 내 예상대로 행동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지만.
“그러면 도망쳤었어야지!”
왜 화를 내는 거야?
“…내가 도망갔으면 당신, 아직도 광증 앓고 있었을 텐데.”
“그러든 말든 놔두고 가장 먼저 도망치는 게 맞잖아!”
아르파드는 더없이 진지하게 내 어깨를 잡고 다짐받으려 들었다.
“혹시 또 그런 일 있으면 그땐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쳐. 알았어?”
나는 어이가 없었다.
“도망치면 어떡해요?! 내가 당신 광증을 가라앉혀 줄 수 있는데!”
게다가 광증 때문에 죽을 수도 있는 당사자가 왜 이렇게 말해?
어떻게든 구해 달라고 빌어야 하는 거 아냐?
“내가 당신을 안 해칠 거라고 확신할 게 있는 줄 알았지! 진짜 위험했던 거면 그런 짓 하지 마!!”
진심으로 그는 화를 내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아르파드가 나를 매섭게 몰아세우는 태도가 익숙하다는 걸 깨달았다.
아르타누스 홀의 연회 직후 쓰러졌다가 깨어났을 때.
그는 화를 많이 냈었다.
퍼즐이 맞춰지듯 그의 행동에 깔린 이유가 눈앞에 들이밀어졌다.
‘날, 걱정해서구나.’
그때도, 그리고 지금도.
이미 따스한 무언가가 가득 차서 출렁대고 있던 가슴이 더 울렁거렸다.
이미 한가득인데 또 뭔가 뜨뜻하고 기분 좋은 게 더 차올라서 이리저리 흔들거렸다.
나는 바다 위에 뜬 종이배처럼 속절없이 이 기분 좋은 현기증에 이리저리 휩쓸렸다.
아르파드는 내가 제대로 듣고 있지 않은 것 같자 초조하게 다시 물었다.
“알겠어? 또 그런 짓 안 하겠다고 약속해!”
나는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힐리아!”
“내가 안 도망친 덕분에 당신 지금 정신 차렸잖아요.”
“아닐 수도 있었다며!”
나는 두 손을 뻗어 아르파드의 뺨을 감쌌다.
그의 광대뼈에서 볼, 턱선까지 이어지는 선은 예술적이었다.
그다지 곡선이 보이지 않는 하관이라 딱딱하기만 할 거라 생각했는데, 살갗에 닿는 감촉은 조금 부드러웠다.
마치, 나를 향한 그의 예외적인 행동처럼.
그의 뺨과 턱을 잡아당겨 시선이 내 눈만 향하도록 고정한 채 나는 낮게 속삭였다.
“그건 당신 몫의 의무죠.”
“…뭐가?”
“어떤 상황에 부닥쳐도 내 안전을 지키는 건.”
“…….”
“당신을 광증에서 구하는 게 내 몫의 의무인 것처럼.”
“그건, 당신의 의무가 아니야.”
신부로 태어났으니 그게 의무라고 누군가 강제했다면 절대 싫었을 거다.
하지만 세상에 단 한 명, 그걸 강제하고 명령할 수 있는 존재가 있었다.
“나 스스로 정한 의무인 거예요.”
바로, 나.
“내가 당신을 구할 테니까, 당신도 날 다치지 않게 보호해요.”
나는 지금 제안하거나 부탁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명령하고 있었다.
“그게 내가 주는 당신 의무야.”
아르파드의 붉은 눈동자가 거칠게 떨렸다.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자신 없어요?”
잠시 멍하니 나를 보던 아르파드가 멈칫하다가 대꾸했다.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절대로 ‘못한다’는 말이 나올 수 없게 하는군.”
나는 작게 키득거렸다.
한참 그를 끌어안고 있다가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아, 맞다. 당신 아직 대답 안 했어요.”
“…뭘?”
“나 안 미워하냐고 물었잖아요.”
아르파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내가 왜 당신을 미워하지?”
“그야, 그럴 거 같다고 말했었으니까.”
그제야 아르파드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은 듯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질문을 왜 하나 했더니, 이번에도 내 업보였나.”
“업보?”
무슨 업보?
내가 의아해했지만, 아르파드는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
다만 ‘나 안 미워하냐’는 질문에 대해서 길게 대답을 늘어놓았다.
“나는… 내 운명이라는 걸 싫어해. 용혈을 짙게 타고난 이상 광증으로 죽을 운명이다, 뭐 이런 말을 늘 듣고 자랐으니까.”
곧 깨달았다.
이건 아르파드의 아주 길고 긴 변명이었다.
“그러니까 타인이나 어떤 존재 혹은 힘이, 내 자율 의사와 상관없이 조종하려 드는 게 싫었어. 끔찍하게.”
“…….”
“그리고 아르타누스마저 거부할 수 없었던, 이스트리드 공주처럼 절대적인 운명의 존재가 나에게도 있다면…….”
그때 나와 했던 대화의 내용이었다.
그는 그런 존재가 있길 간절히 바라면서도, 그 상대를 사랑하게 되리라는 것에 증오하고 싶어질 거라 말했다.
그 존재가 본인의 앞에 있다는 걸 모른 채.
하지만 지금의 아르파드는 알고 있었다.
“용의 신부라 부른다고 하더라고요. 나 같은 사람을.”
그러자 아르파드의 미간에 다시 주름이 생겼다.
“별로 마음에 드는 용어는 아니군. 그 말만 들으면 내가 아니라 아르타누스나 다른 용의 신부라는 것처럼 들려. 당신이.”
“뭐, 나도 그다지 마음에 드는 별명은 아니었어요.”
특히 그 별명 지은 놈이.
아르파드는 꿋꿋하게 용의 신부라는 별명을 안 썼다.
“그런 절대적인 존재는, 그래서 본 순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라는 건 믿지 않았고, 필요 없다고 생각했지.”
이어진 말은 조금 예상 밖이었다.
“사실 그 생각은 지금도 같아.”
내가 그런 존재라 미운 건 그대로라는 소린가?
불안감에 심장이 두근거리려 했다.
이어진 아르파드의 말은 조금 전 본인이 한 말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내가 당신을 본 순간 사랑에 빠졌다면, 정신없이 빠져들어 ‘나’를 잃게 되었다면… 증오하게 되었을지도 모르겠군.”
이게 무슨 소리야?
“하지만 아니었어.”
사실 이건 서로 마음을 확인한 연인이나 부부 사이에 안 어울리는 말일 수도 있었다.
“당신을 본 순간 바로 사랑에 빠진 게 아니야. 놀라고, 흥미를 느끼고, 경계하는 게 먼저였지. 아, 솔직히 처음엔 당신이 미친 줄 알았어.”
“지금 시비 거는 거예요?”
“아니야. 절절하고 솔직한 고백이니까 부디 들어 줘.”
그가 아이를 달래듯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함께하면서 당신이라는 여자가 누군지 천천히 알게 됐지. 그러다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걸 깨달은 거고.”
아까 좋아하냐고 묻고, 그렇다고 대답을 듣긴 했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니, 새삼 울렁거렸다.
“내가 어떻게 당신을 미워하겠어. 그냥 감사할 뿐이지. 하필이면 내가 사랑한 여자에게, 날 구할 힘이 있었던 거니까.”
내 힘을 알게 된 것보다, ‘나’ 자체를 먼저 알고 사랑에 빠졌다는… 장황한 고백이었다.
* * *
진홍월은 단 이틀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달빛을 보고 아르파드는 이번은 유난히 길 거라 예측했고, 그건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그렇다고 해도…….
‘일주일은 좀 심하잖아!’
그렇다. 이번 진홍월은 무려 일주일을 떠 있었다.
그동안 아르파드는 밤 동안 황태자궁을 비웠다.
물론 첫날처럼 혼자서는 아니었다.
낮에는 서로 집무실에서 일을 처리하고, 밤에는 함께 지하 묘지로 향했다.
어쩐지 데이트를 하는 것 같아서 설렜다.
물론 카타콤의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는 데이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지만.
다행히 남은 진홍월이 뜬 밤 동안 아르파드의 광기가 다시 치솟는 일은 없었다.
덕분에 우리는 꽤 조용하게 밤을 지새울 수 있었다.
그렇게 진홍월의 밤이 끝났다.
그리고 그건… 이어질 파란의 작은 전조에 불과했다.
나는 오랜만에 에반젤린의 얼굴을 직접 마주하게 되었다.
에반젤린은 굳은 얼굴을 빳빳하게 든 채 나에게 말했다.
“황후 폐하의 대리인으로서 왔…습니다.”
음, 방금 반말하려다가 억지로 말 바꾼 거 맞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