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나는 아르파드가 한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당신이 마구 흔들어 대지만 않으면… 괜찮을 것 같아요.”
실제로 피를 꽤 흘렸더니 어지러웠다.
이 상태에서 아르파드가 흔들어 대는 건 정신이 드는데 효과가 없었다. 반대지.
내 말에 그걸 겨우 깨달았는지 다급하게 내 상처와 상태를 살피던 아르파드의 손길이 우뚝 멈췄다.
조금 전 격렬하고 격정적이던 손길에서 힘이 쭉 빠졌다.
대신 금이 간 유리병을 대하듯 조심스러운 손길과 눈빛이 내 온몸을 훑었다.
잔뜩 잠긴, 쇳소리 섞인 목소리의 중얼거림이 울렸다.
“전혀 괜찮지, 않아 보이는군.”
엥? 그 정도는 아닌데.
물론 조금 어지럽고 온몸이 아프긴 하지만, 이 정도면 꽤 멀쩡하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아르파드의 광증을 잠재운 대가라고 생각하면 말이다.
내가 뭐라고 할 사이도 없이 아르파드가 먼저 움직였다.
그는 셔츠 안감을 찢어 내 손아귀의 베인 상처를 감아 주었다.
그 과정에서 아르파드의 목과 사지에 걸린 사슬이 거치적거리며 방해가 되었다.
놀랍게도 그는 귀찮은 듯 혀를 한 번 차더니 사슬을 박살 내 버렸다.
파삭!
내 손가락 두 개만 한 굵기의 사슬이 박살 나는 꼴을 보며 입을 벌렸다.
‘아니, 광증으로 제정신 아닐 때는 어떻게 버틴 거야, 저 사슬들?’
그 난리를 칠 때는 안 끊어졌는데?
내가 놀라고 어이없어하자 아르파드는 멋쩍은 듯 중얼거렸다.
“걱정 마. 광증으로 제정신이 아닐 땐 이 사슬을 부수지 못하니까. 정해진 순서와 경로로 마력을 정상으로 다룰 수 있을 때만 이 사슬을 부술 수 있어.”
“…….”
아르파드는 광증이 일었을 때의 상태를 꽤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있는 듯했다.
마치 연구라도 한 것처럼.
그게 아니면 이런 특수 사슬을 준비해 둘 순 없을 테니까.
새삼스레 가슴 속에서 울렁거리던 감정이 또 요동치는 게 느껴졌다.
지금 아르파드가 내 세세한 기분 변화를 알 리 없다.
그는 내 상처를 응급 처치하고 온몸의 상태를 한참 살핀 끝에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어째선지 모르겠지만 약간의 원망 섞인 질문을 던졌다.
“대체 왜 여길 온 거야? 위험하다는 걸 몰랐을 리 없는데.”
표정을 보니 원망은 내가 잘못 읽은 게 아니었다.
좀 많이 억울했고.
‘아니, 우선 고마워하는 게 먼저 아냐?’
그 이상으로 서러웠다.
그래서였다. 불퉁한 목소리가 먼저 나온 것은.
“위험한 걸 아니까 왔지.”
“뭐?”
늘 하얗던 그곳에는 작은 생채기와 바닥을 구르다 생긴 검댕이 선명했다. 붉고 검은 흔적이 선명한 선을 그린다.
나는 그게 너무 화가 났다. 그래서 잔뜩 가시 돋친 말을 내뱉었다.
“이 어두운 구석에서 혼자 청승 떨고 있을 게 분명해서 왔지. 역시 그랬잖아요, 당신?”
아르파드가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했다.
내 기분은 당연히 더 안 좋아졌다.
덕분에 다다다 전혀 막힘없이 단어들을 쏘아 낼 수 있었다.
“이런 사슬 따위에 묶여 혼자 처박혀서 자기로부터 주변을 보호해 봤자, 뭐 해.”
부서진 사슬 조각을 집어서 벽에 화풀이 삼아 내던졌다.
“알아주는 사람 하나도 없잖아! 당신 아버지도 당신을 두려워하고 경계했는데!”
“…!”
“이런다고 당신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불쌍하게 봐 줄 줄 알아요?”
오히려 반대일 거다.
묶어야 할 정도로 위험한 존재가 맞다고만 생각하겠지.
그러니 어떻게든 경계하고 죽이려 할 거다.
혹은 가스팔이 그런 것처럼 제 욕망을 위해 이용하려 들거나.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불쌍하게 생각해 주지도 않을 텐데 이 인간은 혼자서만…….
그래. 그는 철저하게 혼자였다.
나 역시 어젯밤 이곳으로 직접 와서 보지 않았다면 몰랐을 테니까.
아르파드가 어떤 꼴을 하고 있었을지.
그가 얼마나 처절하게 자신으로부터 주변을 지키고 있었는지.
새삼 어젯밤 밖에서 잠긴 이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아르파드의 모습이 떠올랐다.
핏발선 붉은 눈과 광기는 지금 내게는 두려움을 전혀 일으키지 못했다.
살아 있는 그는 내 기억 속 실험체가 된 시체와는 달랐으니까.
이성 없이 그저 눈앞에 있는 먹이를, 나를 뜯어먹고 마셔서라도, 해결될 리 없는 갈증을 가라앉히려 발버둥 치던 괴물과는.
어둠 속에서 묶인 채 내가 먹여 주는 피를 거부하던 아르파드가 생각났다.
가슴이 아려 왔다. 무언가 뜨거운 게 눈가에서 울컥거리려 했다.
나는 울지 않기 위해 고개를 빳빳이 들고, 적극적으로 화를 냈다.
“누구 맘대로 이런 데에서 혼자 궁상떨고 있으래!”
“…….”
어째선지 모르겠지만, 아르파드는 멍하니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그런 이유로 혼나 보는 건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는 처음이야.”
“그래서 화나요? 어머니도 아닌데 당신에게 뭐라고 해서?”
“아니.”
아르파드는 무릎걸음으로 나에게 조심스레 다가왔다.
“너무 좋아.”
그리고 어이없는 대답을 내놓았다.
“더 해 줘.”
나는 눈가가 뜨끈해지던 것도, 가슴 속을 와글와글 채우던 슬픔과 분노, 서러움을 깡그리 잊어버렸다.
* * *
‘나를 걱정해서 화내고, 또 혼내다니…….’
평소의 아르파드라면 그걸 깨달은 순간 상대를 그냥 두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지금 그는 반대의 선택을 했다. 분노하거나 죽이려 들지 않았다.
어이없을 정도로 바보 같은 대답을 하기로 했다.
“그래서 화나요? 어머니도 아닌데 당신에게 뭐라고 해서?”
“아니.”
좀 더 멋있게, 의연하게 보이는 대답을 내놓을 수도 있었다.
‘그게 이 여자에게 먹히지 않으면 전혀 의미가 없지.’
그 때문에 생각을 거치지 않고 순수하게 튀어나온 진심을 그대로 말로 표현했다.
그게 오히려 힐리아에게 먹힐 거라고 판단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하 묘지에 자신을 가둘 우리를 만든 건 그저 객관적인 판단에 불과했다.
‘광증으로 주변에 피해를 줄수록 내 입지가 약해질 테니.’
그러니 자신을 제어하는 방법을 마련했을 뿐.
그게 안쓰럽거나 불쌍해 보일 수 있다는 생각은 한 적 없다.
만일 그렇게 생각하고 드러내는 사람이 있다면 절대 가만히 안 놔뒀을 거다.
아르파드 이스트리드는 태어나면서부터 남들 위에 선 자였다.
포식자였고, 지배자였다.
그런 위치와 태도를 극히 자연스럽게 여겼고, 이를 전복시키려 드는 자들에게는 용서가 없었다.
주제도 모르고 제 자리를 노리려 드는 루드비히 놈이라던가.
혹은 자신을 동정하고 구원해 주려는 듯 구는 여자들.
아르파드는 그 모든 이를 끔찍하게 경멸하고 혐오했다.
그런데.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너무나도.
걱정하고, 불쌍해하고, 안쓰러워해 준다. 그것 때문에 화도 냈다.
구해 주겠다며 몸을 던져 왔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 일인지는 두 번째 문제였다.
의심스럽고 말이 안 되는 것들도 뇌리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힐리아가 자신을 위해서 그랬다는 것만이 중요했다.
이 사실이 너무나도 달콤했다. 이게 꿈이라면 깨기 싫을 정도로.
지긋지긋하고 구질구질한 세상을 아름답고 밝아 보이게 만들 수 있다니 놀라웠다.
시궁쥐의 사체가 굴러다니는 지하 묘지의 구석이, 황궁 가장 높고 고귀한 곳보다 가치 있고 아름다웠다.
그녀가 이곳에서 그를 구해 주려 했으니까.
여기서 그가 혼자 희생하고 있다고 착각해서 불쌍해하며 눈가가 붉어졌으니까.
그래서였다.
아르파드는 기꺼이 바보 멍청이가 되기로 했다.
“너무 좋아. 더 해 줘.”
그러자 안쓰러움과 동정, 슬픔 등으로 젖어 있던 힐리아의 표정이 황당하게 굳었다.
“뭐……?”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이해 못 한 표정이었다.
아르파드는 지금 이 여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었다.
그는 평소 자신이 경멸하던, 안쓰럽고 불쌍한 존재가 된 것처럼 굴 용의가 있었다.
기꺼이 그녀에게 동정을 구걸할 수 있었다.
“당신이라면 뭐든 좋아. 얼마든지 동정하고, 화내고, 혼내 줘.”
조금 전 힐리아는 울 것처럼 눈가가 벌게져 있었다.
그런데 아르파드의 절박한 말에 곧 얼굴 전체를 붉게 물들었다.
“잠깐만, 바보 멍청이인 줄 알았더니, 당신… 변태였어요?!”
“…….”
정말이지, 그의 아내는 분위기 깨는 말에 일가견이 있었다.
그 입을 제 입술로 막아 버리기로 결정했다.
“…!”
놀라움으로 커졌던 힐리아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지난밤 수없이 반복된 키스가 다시 한번 이어졌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있었다.
양쪽 모두 제정신으로, 다른 이유 없이 벌인 행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