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탈혼으로 남편부터 바꾸겠습니다-132화 (132/210)

132화

에반젤린은 야음을 틈타 마치 시궁쥐처럼 황궁 안으로 들어섰다.

시녀복이 아닌 황궁의 하녀복을 입은 채였다.

머리끝까지 불만과 굴욕감이 치솟았다.

‘내가 하녀처럼 입고 밤에 숨어들 듯이 황궁에 들어오게 되다니. 말도 안 돼!’

그녀는 늘 화려한 귀족 출신 시녀들에게 둘러싸여 당당하게 출입하곤 했으니까.

황궁의 유일한 꽃으로서.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를 불러들인 황후가 엄하게 명령한 것이었으니까.

샛길을 지나는 에반젤린의 시야에 황태자궁의 둥근 지붕이 보였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게 마치 힐리아와 자신의 처지를 상징하는 것 같았다.

맨 위에서 당당하게 선 힐리아.

낮고 어두운 곳에 숨어든 에반젤린.

황태자비로서 황가의 일원이 된 힐리아.

황후의 딸이지만, 누구에게도 황족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에반젤린.

지금쯤 꽃처럼 단장한 채 아름답고 늠름한 아르파드의 옆에서 눈웃음치며 속살거리고 있겠지.

‘오라버니에게 내 욕을 잔뜩 늘어놓겠지.’

힐리아가 이 생각을 안다면 어이없어 할 것이다.

아르파드와 단둘이 있는 동안에 에반젤린에게 신경 쓸 여유가 있을 리 없으니까.

하지만 에반젤린은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힐리아는 늘 자신을 신경 쓰고, 시기하고, 질투하며, 모함하려 할 거라고.

자신이 그러하므로.

분노와 질투로 얼룩진 그림자를 밟으며 에반젤린은 황후궁 안으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딸을 불러들인 어머니가 한 말은 충격적이었다.

“루드비히와 결혼하렴.”

“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에반젤린은 자신의 귀가 잘못된 줄 알았다. 하지만 황후의 반응은 덤덤했다.

“루드비히와 결혼하라고 말했다.”

“…혹시 몇 달이나 이 방에서 못 나가셔서 머리가 어떻게 되신 거예요? 지금 루드비히가 어떤 꼴인지 알면서 어떻게 저에게……!”

“재산 한 푼 없고, 노역이나 해야 하는 처지로 떨어졌지.”

“잘 아시네요! 이제 그는 황족이라고 할 수도 없어요! 제가 그자랑 결혼하면, 세상에 웃음거리가 될 거라고요!”

게다가 힐리아를 궁지로 몰아넣으려던 재판 때 오히려 불륜하고 있던 사람이 루드비히와 에반젤린이라는 것까지 까발려졌다.

그때 등장한 루드비히의 여자들이 너무 많아서 에반젤린은 조금 묻힐 수 있었지만, 안 좋은 말과 시선들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런데 지금 루드비히와 결혼한다?

결국 재판과 관련된 모든 오명과 치욕을 에반젤린이 뒤집어쓰게 되는 꼴이었다.

그럼에도 황후는 요지부동이었다.

“황족이 아닌 것이나 다름없어졌어도, 여전히 그 몸에 흐르는 피는 황실의 것이야. 그리고 너에게, 우리에겐 그게 필요하지.”

“황실의 혈통… 말인가요?”

“그래. 그러니 서류만으로라도 결혼식을 올리고, 루드비히의 아이를 가지렴.”

“어머니!”

에반젤린은 경악해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황후는 마치 루드비히와 자신을 종마처럼 취급하고 있었다.

“네 말대로 루드비히는 이미 글렀으니 말이다. 그래야 우리가 내세울 수 있는 황족이 생기지 않겠니.”

“…!”

결국 중요한 건 황실의 혈통이라는 소리다.

황후가 에반젤린에게 루드비히의 아이를 가지라 강요하는 이유도 그것 때문.

에반젤린의 눈이 분노로 타올랐다.

“황실의 혈통을 갖는 게 중요하다면, 굳이 멍청한 루드비히일 필요가 있겠어요?”

“또 누가 있어서?”

이스트리드 황가는 손이 귀했다.

그 때문에 불륜으로 태어난 사생아 출신인 루드비히가 나중에라도 인정받아, 부친의 작위를 이을 수 있었을 정도로.

에반젤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한 명 더 있잖아요. 루드비히보다 정통성이 뛰어나고, 황실의 혈통도 짙은 남자가.”

황후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아르파드 말이냐?”

에반젤린은 고개를 들었다.

루드비히 같은 패배자, 쭉정이와 결혼해 아이를 가지라니.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힐리아가 보면 얼마나 비웃겠는가.

“네! 같은 황실의 핏줄이라도 이미 내쳐진 루드비히의 아이보다, 황태자의 아이인 쪽이 더……!”

황후는 들고 있던 찻잔을 딸을 향해 내던졌다.

쨍그랑!

“…!”

사기잔은 에반젤린 바로 옆 벽에 부딪혀 박살 났다.

황후가 이렇게 격정적이고 폭력적으로 구는 모습은 처음이다.

빙의 이후에도, 그리고 신체에 남은 빙의 이전의 기억에서도.

너무 놀라 굳은 딸을 차갑게 노려보며 황후는 말을 이었다.

“아르파드는 그 여자의 아들이야. 나더러 그 여자의 피가 섞인 손자를 보란 말이냐? 그리고 그걸 황위에 올리라고?”

“…!”

에반젤린은 황후의 선황후 록셀린에 대한 질투와 열등감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극렬하게 표현하는 건 처음 봤다.

기세에 압도된 에반젤린이 멈칫한 사이, 황후는 평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단언했다.

“설사 네가 원한다 해도, 아르파드의 아이를 가질 일은 없을 거다.”

“제가 할 수 있어요!”

황후는 고개를 저었다. 아르파드가 에반젤린의 유혹에 넘어오지 않을 거라는 말이 아니었다.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 황후의 안광이 섬뜩하게 빛났다.

“그놈은 곧 미쳐 죽을 테니까.”

꼭 저 말이 ‘죽이겠다’로 들리는 건 아마도 착각이 아닐 터였다.

“어머니, 무슨 일을 하시려는 거예요?”

황후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나 웃는 건 입매뿐. 눈은 여전히 위험한 안광이 번뜩이고 있었다.

“네가 알 필요 없는 일이란다.”

“…혹시, 황족의 광증을 어머니가 조절하실 수 있는, 그 문제인가요?”

“…….”

“그걸로, 아르파드 황태자를 죽이시려는 거예요?”

황후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침묵이 곧 긍정이라는 걸 에반젤린이 못 알아들을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다.

에반젤린은 복잡한 심경으로 황후궁을 나왔다.

‘내세울 황족이 필요하다는 건 맞는 말이야. 내가 아이를 가지는 게 좋겠다는 것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지.’

종마처럼 취급당하는 건 끔찍하지만.

차기 황제의 모친이 되어 권력을 손에 쥐는 건 에반젤린이 바라던 바였다. 황후의 도움이 필요한 일도 맞았고.

하지만 그 아이의 아비가 루드비히가 되는 건… 싫었다.

밤새 고민하던 그녀는 곧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누구 아이든 황족이면 그만이잖아? 내가 황후에게만 루드비히의 아이라고 하면 되는 거 아니야?’

에반젤린의 입가에 교활한 미소가 걸렸다.

* * *

지하 묘지의 동굴 같은 방 안에는 숨소리가 가득했다.

두 사람의 숨소리가 쉼 없이 서로 얽혔다 떨어지길 반복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곳은 빛이 전혀 들지 않아 시간의 흐름을 알기 어려웠다.

그래서 영원이 흐른 것 같기도 했고, 또 아주 찰나의 시간만 함께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가 함께 있는 시간은 영원도, 찰나도 아니었다.

내가 눈을 떴을 때 아르파드는 아주 얌전하고 편안해 보이는 표정으로 내 품에 잠들어 있었다.

그와 반년 가까이 부부로 지냈지만, 이렇게 완전히 무방비한 아르파드의 모습은 처음 봤다.

하얀 뺨이 어쩐지 보드라워 보여서 나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의 뺨은 생각보다 여리고 또 뜨거웠다.

‘혹시 열이라도 나는 건가?’

이마를 짚어 보는데 반짝, 하고 눈꺼풀이 올라갔다.

달빛으로 짠 섬세한 거미줄 같은 속눈썹이 깜빡이는 눈꺼풀을 따라 팔랑거렸다.

내가 잠시 멍하니 그 광경을 홀린 듯 보고 있노라니, 아르파드는 멍한 표정으로 나와 주변을 천천히 살폈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물었다.

“정신이 들어요, 아르파드? 당신 지금 제정신 맞아요?”

그의 어깨를 잡고 마구 흔들었다. 그러자 매끈한 도자기 같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대가 흔들어 대지만 않으면 곧 제정신으로 돌아올 것 같군.”

“말하는 거 보니 멀쩡하네.”

방 안도, 또 우리 상태도 난장판이었다.

아르파드가 내뱉은 핏자국, 부분부분 찢어지고 검댕으로 더러워진 옷.

부스스해진 머리까지.

아직 멍한 상태로 흐트러져 있어도 여전히 멋지고 아름다운 아르파드만은 난장판에서 예외였다.

흐트러진 머리카락마저 일부러 그렇게 세팅한 것처럼 잘 아울렸기 때문이다.

역시 얄미울 정도로 잘났다.

나는 먼저 일어나서 대충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딱히 대단하게 정리할 것도 없었다.

둘이 같이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긴 했지만… 그렇게 격렬한 일은 없었으니까.

‘음, 끝까지 각오했었는데… 생각보다 빨리 제정신으로 돌아왔네.’

솔직히 좀 민망하긴 했지만, 그게 다였다.

평소보다 좀 격하게, 오래, 그리고 이리저리 굴러다니면서 키스한 정도니까 말이다.

혼인 성사 이후 여러 이유로 키스는 꽤 많이 했으니까.

딱히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그때였다. 다 갈라진 목소리로 아르파드가 날 부르다가 말이 뚝 멈췄다. 그리고 거친 손길이 내 손목을 잡아챘다.

“힐리…….”

“윽!”

손바닥에는 아까 아르파드에게 피를 먹이려고 그은 상처가 남아 있었다.

아직 지혈이 안 되어 피가 흐르는 상처가.

손바닥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손가락부터 팔까지 바닥과 사슬에 쓸려 만들어진 멍과 상처가 가득했다.

“괜찮은 건가?! 무사해?”

아르파드의 목소리에는 전에 들어 본 적 없는 다급함이 가득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