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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혼으로 남편부터 바꾸겠습니다-130화 (130/210)

130화

불길한 붉은 달이 뜬 밤.

아르파드는 황도 지하, 달빛이 새어들지 않는 지하 묘지의 아지트에서 밤을 새우고 있었다.

그는 달빛을 마주하지 않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다.

다만 한쪽 천장 구석에 구멍을 내어 달빛이 가늘게 한 줄기 스며들어, 몇 개의 거울에 반사된 다음 바닥에 비치도록 해 두었다.

이는 달빛의 상태를 살피기 위한 장치였다.

직접 쐬지 않고 거울 등으로 반사된 것을 보면 광증을 자극하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아르파드는 매번 달빛의 상태를 예민하게 확인했다.

‘이틀째인데 여전히 붉군.’

며칠은 더 진홍월이 뜬다는 소리다.

새삼 가슴이 답답해졌다.

아르파드는 진홍월의 밤에는 잠들지 않았다.

아무리 길게 붉은 달이 떠도.

진홍월의 시기, 광증으로 의식을 잃었다가 겪은 몇 번의 참상 때문이다.

제정신으로 돌아온 후에 보게 되는 피바다가 싫었다.

자신이 살육했다는 사실 자체보다, 자아 없는 짐승처럼 벌인 일이라는 게 최악이다.

거기에 최근 들어 한 가지 걱정과 불안이 추가되었다.

‘그러고 보면, 꿈에서도 진홍월이 떴었나…….’

자신이 힐리아를 다치게 하고 울게 하던 꿈.

그 불길한 꿈속에서도 달빛은 붉었던 것 같다.

그리고 가장 선명하고, 불안한 건 다른 것이었다.

매번 꿈속에서 아르파드는 간절히 힐리아를 원했다.

그때의 그는 그녀의 몸에서 흐르던 피를, 흘리던 눈물을 목마른 짐승처럼 탐했다.

그 액체에 혀를 댔을 때…….

“…!”

아르파드는 불현듯 놀랐다.

대체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가.

순간적이지만 의식이 흐려지려 하며, 자신의 것 같지 않은 생각이 뇌리를 침범하려 했다.

예리한 감각이 속삭였다.

‘위험하다.’

오늘 밤은, 정말로 위험했다.

아르파드는 몇 겹의 거울 위에 검은 천을 씌워 확인을 위한 달빛마저 완전히 차단했다.

그리고 증세가 심해질 때를 대비한 ‘안전장치’도 확실하게 준비했다. 사슬이 잘그락거리며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아르파드는 불이 없어도 시야에 불편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등잔 하나 켜 두지 않았다.

곧 지하 묘지는 어둠으로 덮였다.

그 어둠 속에서 아르파드는 한 가지 이상을 느꼈다.

품속에서 뭔가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건…….”

흐릿하게 빛나고 있는 건 반지였다.

세 개의 보석이 꽃잎처럼 박힌 반지.

힐리아와 루드비히의 결혼반지.

그녀의 손에서 빼앗아 온 뒤 은근슬쩍 계속 돌려주지 않았다.

다른 남자와의 결혼반지를 자신이 계속 가지고 있는 것도 그렇고.

그렇다고 해서 다시 힐리아에게 돌려주고 싶진 않았다.

만에 하나라도 이 반지가 힐리아의 손가락에 끼워진 걸 보면 눈이 돌아가지 않을 자신이 없어서였다.

노역하게 될 루드비히에 돌려주는 것도 말이 안 된다.

그래서 아르파드는 이 반지를 원래 있던 곳에 돌려놓으려고 했다.

황제가 루드비히에게 내렸던 것이니, 황실 보물고로 돌려보내면 그만이다.

그런 생각으로 보물고에 들어가 반지를 놓으려던 찰나, 의외의 인물을 만났다.

“아르파드.”

“…부황…….”

어색한 공기가 부자 사이에 내려앉았다.

힐리아 덕분에 조금은 가까워질 계기가 마련되긴 했으나, 13년간 쌓인 거리감이 몇 달 만에 줄어들 리는 없었다.

아르파드가 목적을 이루고 어색한 자리를 피하려던 찰나, 황제가 반지를 보고 말을 걸었다.

그는 힐리아의 반지를 알아보았다. 애초에 루드비히에게 결혼반지로 쓰라고 준 것이 그였으니 당연했다.

“힐리아가 그 반지를 네게 준 모양이구나.”

“아, 그렇습니다.”

아르파드는 그런 셈 치기로 했다.

어차피 이제 힐리아는 황제도 인정한 그의 아내였다.

그런 힐리아가 이 반지를 계속 가지고 있는 것도 적절하지 못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설핏 미소 지었다.

“네가 골랐던 그 반지가 다시 네게로 간 걸 보면, 결국 이리될 운명이었던 모양이지.”

“무슨, 말씀입니까?”

아르파드는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이 골랐다니?

이어진 부황의 말은 경악스러웠다.

“3년 전, 루드비히와 힐리아를 약혼시킬 때 둘에게 예물을 내리려 했지. 그때 네가 골랐던 예물이 그 반지가 아니냐.”

“제가, 이 반지를 골랐다고요?”

황제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파드는 아연했다. 아무리 기억을 뒤져 봐도 그런 짓을 한 적이 없었다.

‘아니, 그 전에 그럴 이유가 없잖아?’

루드비히와 힐리아의 결혼은 아르파드에게는 경계해야 할 일이었다.

정통성과 권위가 부족한 루드비히의 약점을 보완하는 정치적 수단이었으니까.

그런데 그걸 방해하거나 훼방 놓지는 못할망정, 황실 보물을 예물로 쓰라고 골라 줬다고?

아르파드는 솔직하게 물었다.

“그때 제가 미치기라도 했습니까? 아니면 부황께서 뒤늦게 광증이라도 오신 게 아닙니까?”

“나도 너와 비슷하게 놀랐지. 하지만 네가 직접 골라서 내게 주며 말했다. ‘이게 어울리겠다’라고.”

반지에는 꽃잎처럼 세공된 보라색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었다.

루드비히와의 결혼반지라는 사실을 제쳐 놓고, 아르파드에게 이 반지를 보고 누가 떠오르냐 묻는다면 한 명 외에 없다.

그리고 ‘어울리겠다’라는 표현을 누군가에게 사용한다면 그 역시도…….

힐리아뿐.

아르파드는 지독한 혼란 속에서 결국 이 반지를 품속에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지금.

아르파드는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이 반지를 노려보고 있었다.

“대체 뭐지?”

자신의 기억에 없는 3년 전 일.

그리고 힐리아와 관련된 꿈, 꿈보다 더 비현실적으로 떠오르는 환상들.

반지의 빛이 다시 한번 강해지며 아르파드는 지독한 현기증을 느꼈다.

하늘과 땅이 빙글빙글 돌아 온통 진탕되어 섞였다.

“아르파드, 나는…….”

“나를 약탈하세요.”

“살려 줘!!”

시간대가 혼란스럽게 뒤엉켰다.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약탈혼을 강요하던 여자와 고통 속에 울면서 살려 달라 외치던 여자.

누구보다 처연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던 여자.

모두 같은 사람이었다.

아르파드는 저도 모르게 그 이름을 불렀다.

“…힐리아.”

“…!”

“…힐리아.”

“…드!”

순간, 시커멓게 뒤엉켜 있던 머릿속에 한 줄기 빛이 내리꽂혔다.

그제야 귀를 울리고 있는 여자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렸다.

“아르파드!”

입 안이 온통 피비린내로 가득했다. 타인의 피를 입에 머금고 있는 거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농밀하고 달콤했다.

메마른 목을 적셔 오는 샘물보다 시원하고 달다.

이대로 삼켜 버리고 싶었다. 입 안에 고인 것만이 아니라, 눈앞에 있는 이 여자를 통째로…….

통째로, 뭐?

아르파드는 스스로의 생각에 경악했다.

그는 겨우 지금 상황을 인식했다.

이곳은 여전히 카타콤이었다. 다만 난장판이 된 아지트 안에 있는 건 그 혼자가 아니었다.

여기 가장 있어선 안 되는 여자가 눈앞에 있었다.

아니, 차가운 바닥에 눕혀진 채 그의 아래 깔려 있었다.

커다란 보라색 눈이 놀라움과 아픔에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두려워하고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두려워하고 있는 건… 자신이다.

힐리아의 입술에 남은 상처와 거기서 흐른 피를 보고 아르파드는 깨달았다.

지금 자신이 머금은 피가 누구의 것인지.

누구의 피를 맛보고 이다지도 달콤하다고 느끼고 있는지.

한발 더 나아가, 자신은 그녀를……!

“…!”

아르파드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입 안에 가득한 피를 뱉어 냈다.

너무 달고 향기로워 제발 이대로 삼키라고 본능이 외치고 있었으나, 필사적으로 무시했다.

한 모금이라도 마셨다간 절대 그것만으로 참지 못하게 될 것 같았다.

그걸 보고 힐리아가 외쳤다.

“그걸 왜 뱉어요? 아깝게!”

아르파드는 손등으로 입술을 훔쳐 남은 피의 맛을 닦아 내려 애쓰며 외쳤다.

“당신이 여기 왜 와 있는 거야? 분명히 내가 위험하다고……!”

힐리아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보다가 아르파드에게 화를 발칵 냈다.

“위험하든 말든 내가 어디 갈지는 내 맘이라고요!”

경악과 두려움, 혼란스러움으로 그가 잠시 멈춘 사이.

힐리아가 더욱 적극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두 손을 뻗어 아르파드의 뺨을 감싸 안아 자신에게 당겼다.

그걸로도 모자라 힐리아는 까치발을 해야 했다.

다시 한번 두 사람의 입술이 어둠 속에서 겹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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