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얼마 전 마탑주 가스팔이 찾아왔을 때 그녀가 내민 거래가 이것이었다.
“록셀린의 무덤에서 유골 일부를 꺼내 와.”
“그쪽은 경계가 삼엄할 텐데. 차라리 이전에 가져온 쪽이 편하지 않아?”
“아니. 꼭 그 여자의 뼈여야 해. 반드시!”
록셀린 황후의 석관은 황실의 영묘 가장 외곽에 있었다.
황제가 종종 들르기 때문에 다른 곳에 비해 무덤 지기나 기사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게다가 황실의 영묘다 보니 몇백 년간 겹겹이 쌓인 마법적인 방어 장치가 꽤 많았다.
그걸 흔적 없이 뚫고 들어가는 건 마탑주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시기적인 문제도 있었으니.’
이건 반드시 진홍월이 떴을 때 해야 하는 작업이었다.
반년이 지나고, 어제 다시 진홍월이 떴다.
덕분에 거래한 지 꽤 시간이 흐른 지금에 와서야, 가스팔이 황후에게 성과물을 가져올 수 있게 되었다.
이자벨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선황후의 유골을 매만졌다. 손톱 끝이 뼈를 파고들어 끼긱거리는 소리를 냈다.
이자벨은 뼈만 남은 손가락에서 억지로 반지를 빼냈다.
악에 받치고 집착적인 모습을 경멸하듯 내려다보며 가스팔은 정당한 대가를 요구했다.
“원하던 걸 가져왔으니 이제 줄 건 줘야지.”
광기 어린 눈으로 루비 반지를 노려보고 있던 황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올려진 상자를 턱 끝으로 가리켰다.
“가져가.”
마치 가시가 잔뜩 선 밤송이를 억지로 토해 내는 듯한 말이었다.
가스팔은 상자 속 황후의 보관에 박힌 드래곤 하트를 빼냈다.
“역시 아르타누스가 직접 후손에게 내줬다는 드래곤 하트는 순도가 다르군. 큰 도움이 되겠어. 고마워.”
가스팔은 활짝 웃으며 소매 속에 드래곤 하트를 감췄다. 황후로서의 마지막 상징까지 잃은 이자벨은 이를 악물었다.
“꺼져.”
“분부대로 하지요.”
가스팔은 조롱하듯 과장된 예를 표한 뒤 그대로 그림자 속으로 녹아들 듯 사라졌다.
다시 혼자 남은 그녀는 눈을 치뜨고 하늘을 노려보았다.
진홍월의 밤은 하루만 가지 않는 경우도 꽤 있었다.
달이 이지러지면서도 붉은빛이 가시지 않는 것이다.
기록상 가장 길게 이어진 시기가 일주일간이었다던가.
진홍월이 뜬지 이미 하루가 지났음에도 둥근 달은 여전히 붉은빛이었다.
이번 진홍월은 꽤 오래 이어질 모양이다.
황궁 곳곳에 빼곡하게 깔린 방어와 감시를 위한 마법을 교묘하게 피하던 가스팔의 눈에 황태자궁이 비쳤다.
지난번에 얼굴만 보고 가려 했는데 들켰던 그 여자가 떠올랐다.
“남편을 원하면 그 아내에게 먼저 허락을 받아야지.”
두려워하면서도, 당돌하고 자신감에 찬 표정이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내가 원하는 걸 너무 정확히 알고 있었어.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의문은 아직도 풀리지 않았다. 기껏 황궁까지 숨어든 김에 한 번 더 확인하고 가 볼까, 했다.
하지만 곧 생각을 접었다.
아직 진홍월이 떠 있다. 이 시기에 황족들의 광증이 더 심해지는 건 널리 알려진 일. 지금 황태자를 자극하는 건 좋지 못했다.
그리고 궁금하기도 했다.
방금 그가 황후에게 주고 온 물건이 어떻게 쓰일지는 분명했다.
그건 황태자만이 아니라, 그 아내에게도 큰 위협이자 위기가 되겠지.
그러면 그 여자는 어떻게 행동할까?
“기대하며 잘 지켜보도록 하지.”
가스팔은 저 멀리 있을 누군가에게 말을 남기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 *
오늘로 진홍월이 뜬지 이틀째.
그리고 아르파드는 오늘 밤에도 카타콤으로 향한 모양이다.
어제 내가 막으려 해서 그런지, 오늘 밤은 쪽지 하나만 놓고 사라져 버렸다.
오늘도 어제처럼 어두침침한 지하 묘지에서 궁상떨며 밤을 새우는 거겠지.
진홍월의 달빛으로부터 숨기 위해서 땅 가장 깊은 곳에 들어가는 것이다.
아침에 돌아온 아르파드는 일하고 있다는 소식만 시종을 통해 보내고, 직접 찾아오지 않았다.
새삼 깨달았다. 아르파드는 빗물처럼 내 일상에 지나치게 푹 스며들어 있었다.
빈자리가 지나치게 느껴질 만큼.
아침에 눈을 뜰 때 침대에 그가 없는 게 어색했고, 단장 시간에 옆에서 괜히 끼어드는 목소리가 없는 게 낯설었다.
아침과 저녁을 함께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혼자 식사하려니 음식이 맛이 없었다.
요리사의 솜씨가 바뀐 건 아니니, 결국 내 기분 문제일 텐데.
‘나 지금… 쓸쓸해하고 또 외로워하고 있는 건가? 겨우 이틀째인데?’
“오늘 밤은 혼자 자도록 해.”
“왜, 외로울 것 같아서 싫은가?”
아르파드가 장난처럼 던지고 간 말이 정말 사실이 되어 버렸다.
왠지 진 것 같아 기분이 저조했다.
아니, 아니다. 굳이 그 사실 때문이 아니라도 지금 나는 아주 기분이 우울하고 또 머리가 복잡했다.
‘아르파드가 혼자 휙 가 버린 것도 신경 쓰이고…….’
끝까지 잡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
꼭 내가 아르파드를 경계하고, 의심하고 있다는 의미가 되는 것 같아서…….
‘음? 잠깐?’
나 그러고 있는 거 맞잖아.
아직도 지난 삶에서 반인반룡의 괴물이 된 아르파드가 나를 덮치던 순간을 기억했다.
목덜미까지 다가온 죽음의 느낌. 정신없이 내 상처의 피를 핥던…….
“…!”
어째선지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너무 복잡하게 고민해서 그런가?
어쨌든 아르파드는 내 생각만큼 예민하고, 섬세한 편이었다.
당연히 내 경계심과 두려움도 느끼겠지.
그걸 언제 미칠지 모르는 광증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했지만.
실제로는 경험에서 오는 공포라는 걸 나는 말할 수 없었다.
내 경계와 두려움이 아르파드의 광증에 대한 거라는 건 아예 틀린 말이 아니기도 하니까.
그리고 사실 어제 아르파드를 맥없이 보낸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말.
“내가 당신을 해치는 꿈을 종종 꿔.”
아르파드가 덧붙인 설명은 충격적이었다.
이상할 정도로 상세했다.
회귀 전 기억이 없는 아르파드가 날 해치는 꿈이라면, 지금 내 모습을 기반으로 꾸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하지만 아르파드의 설명을 들어 보면, 그가 꿈에서 봤다는 내 상태나 주변 상황은…….
‘회귀 전 그와 있었던 상황들에 가깝지 않나?’
마탑에 갇혀 실험체가 되었을 때.
루드비히에게 미끼로 버려져 도망치다가 그에게 잡혔던 순간.
그런 생각이 들자, 연달아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설마, 아르파드가 회귀 전 기억을 떠올린 건가?’
확신은 아니었다. 하지만 전날에는 그 가능성만으로도 너무 놀란 나머지 제대로 판단하거나 반응하지 못했다.
내가 굳어 버린 사이, 아르파드는 휭하니 창문으로 나가 버렸다.
지금까지도 내 앞에 안 나타나고 있었다.
‘설마, 내가 자기를 두려워하니까 위험한 시기에는 피해 주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건가?’
농반진반으로 그와 내가 자주 주고받던 말이 떠올랐다.
“나 상처받았는데?”
그때는 농담으로 받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아르파드가 유달리 불쌍한 표정을 지었던 것 같다.
세상에, 아르파드와 불쌍함이라니! 이렇게 안 어울리는 조합이 있나!
부정하고 싶어도 계속 이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고 맴돌았다.
눈은 서류를 보고 손은 일을 처리하면서도, 생각은 다른 곳에 있었다.
약 이틀간 아르파드의 잘생기고 재수 없을 정도로 자신감 넘치는 얼굴을 못 본채, 생각만 깊고 복잡해졌다.
이건 안 좋았다.
카타콤에서 혼자 청승 떨고 있을 아르파드가 내 머릿속에서 갈수록 불쌍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시점에 이르자, 거의 가련하게 떨고 있는 유기견에 가까워져 있었다.
‘내가 미쳤나?’
미친 게 틀림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아르파드를 두고!
하지만 나는 도저히 이 영문 모를 죄책감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자정이 되기 직전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고 말 정도로.
‘안 되겠다! 직접 가서 보고, 이 말도 안 되는 망상과 다른 현실을 나에게 확인시켜 주는 거야!’
그리고 겸사겸사 그 이상한 기억에 대해서도 좀 더 자세히 물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