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Chapter 14. 진홍월의 밤
새삼 놀랐다. 시간이 이렇게까지 빨리 흐르다니.
내가 약탈혼을 의뢰하기 위해 아르파드를 만난 시점이 저번 진홍월 때였다.
그때로부터 거의 반년 가까이 흘렀다.
하도 사건이 많았다 보니 시간이 이렇게 흐른 줄도 모르고 있었다.
아르파드는 장난기 섞인 말을 이어 붙였다.
“다녀오도록 하지. 아침엔 올 테니까 걱정할 것 없어. 혼자 밤에 외로워도 울지는 말고.”
나는 손을 뻗어 아르파드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가지 말아요.”
“…….”
“옆에 있어요.”
그러자 아르파드는 폭, 한숨을 쉬었다.
“이걸 의도하지 않았다면 더 악질적이야. 그대는.”
“무슨 소리예요?”
아르파드는 갑자기 한발 앞으로 다가와 내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
붉은 홍채가 내 시야를 가득 채웠고, 숨결이 잡힐 듯 내 뺨과 목 언저리에 닿았다.
“남자 옷을 잡아끌면서 그렇게 애처롭게 가지 말라고 하는 건… 유혹 말고 뭐가 있겠어.”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누, 누가 유혹을 했다고 그래요?!”
진짜 시도 때도 없이, 필요도 없으면서 괜히 그러는 건 자기면서!
“당신 또 카타콤에 혼자 가서 처박혀 있으려는 거잖아요.”
“맞아. 진홍월 시기에는 아무래도 위험하니까.”
그건 맞는 말이긴 했다.
내 첫 생에도 아르파드가 완전히 정신을 놓고 폭주한 건 진홍월의 밤이었으니까.
아르파드는 아주 조심스럽게 자신의 손목을 쥔 내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 놓았다.
자칫 잘못하면 내 손가락이 부러지기라도 할 듯 조심스럽다.
하긴, 실제로 그가 조금만 힘을 줘도 내 손가락은 우두둑 부러질 수 있었다.
나는 다른 손까지 끌고 와서 아르파드를 더 단단히 잡았다.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살아 있는 거라곤 시궁쥐와 벌레, 아르파드밖에 없는 어둡고 적막한 공간.
그 가운데 서 있던 아르파드를 본 순간, 나는 찰나지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너무 외로워 보여.’
그 쓸쓸함이 느껴지며 아르파드를 우중충한 지하묘지로 보내기 싫었다.
“내가 광기의 전조를 보인 횟수가 몇 번인지 아나? 그때마다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는지도.”
“알아요!”
아르파드의 붉은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황태자궁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궁의에게 물어서 확인했으니까.”
“…나한텐 말한 적 없잖아.”
“굳이 알고 있다고 말할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나는 아르파드의 광증에 대한 정보를 천천히 조심해서 수집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 과정에서 혹시라도 내가 ‘신부’인 것을 들키게 되지 않을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열 살 무렵 첫 전조를 보인 이후 지금까지 총 아홉 번이었고, 정말 심각했던 건 세 번이었다고 했죠.”
대대로 황족을 섬겨 온 궁의의 말에 따르면, 직계 황족 중에서도 압도적으로 많은 횟수라고 했다.
“솔직히 말씀 올리자면, 지금까지 광증에 잡아먹히지 않고 계시는 게 기적이나 다름없습니다.”
“기록에 남아 있는 역대 황족 중 이만한 폭주 전조를 경험하고도 이성을 유지하는 분은 황태자 전하 한 분뿐입니다.”
“그래. 그 심했던 세 번에는 궁인들이나 길을 가던 부랑자의 피를 봤지.”
그는 뚫어져라 나를 관찰했다.
“그런데도 두렵지 않나?”
나는 고개를 들고,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당신, 나랑 왜 계약한 건지 잊어버렸어요?”
“뭐?”
나는 참지 못하고 아르파드의 멱살을 잡았다.
“내가 당신 광증을 가라앉혀 주겠다고 약속했잖아요! 당신도 그거에 넘어온 거였잖아!”
“…아.”
놀랍게도 아르파드는 잠시 잊고 있던 걸 이제 떠올렸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뭐야, 진짜야?
* * *
스스로도 놀라웠다.
‘정말로 잠시 잊고 있었군. 그 중요한 일을.’
힐리아는 광기를 잠재워 주겠다 호언했고, 그걸 신물을 걸고 맹세까지 했다.
당연히 그 자체를 완전히 잊어버린 건 아니었다.
다만, 그보다 걱정이 앞섰을 뿐.
아르파드는 손끝으로 미간을 누르며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지 자기 자신이 한심해서 견딜 수 없었다.
‘내가 곁에 있다가 광증 때문에 다치게 할 걸 걱정하느라, 그것마저 생각을 못 하다니…….’
어이가 없었다. 멍청이가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시야를 가려 오로지 정면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처럼 힐리아가 위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머리에 박혀 빠지질 않았던 거다.
‘이래서야 펠릭스 놈이 한 말이 완전히 틀리지도 않군.’
첫사랑에 정신 못 차리는 애송이 같다고 했었나.
이 순간만은 아르파드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힐리아는 잠시 어이없다는 듯 그를 보다가 허리에 한 손을 짚고 당당하게 말했다.
“내가 있잖아요. 나만 믿으라고요.”
어쩐지 심장이 녹진녹진 녹아내리는 듯한 기분이다.
진홍월을 앞둔 시기에 아르파드는 예민하고 신경질적이 된다.
그런데 지금 이 여자가 지켜 주겠다고 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이렇게 말랑말랑해지다니.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힐리아가 말하는 대로 따를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안 돼.”
“뭐? 왜요? 왜 안 돼?!”
아르파드는 진지하게 말했다.
“진홍월 기간에는 가끔 의식이 흐려질 때도 있어. 정신 차리면 주변 기물이나 건물이 파손되어 있기도 하지. 당신이 옆에 있으면 정말 위험해.”
아르파드는 바짝 타는 입술을 혀로 핥으며 말을 이었다.
“그대를 다치게 하지 않을까 걱정돼서 그래.”
“광증을 가라앉혀 줄 귀한 몸이니까?”
“…그렇다고 해 두지.”
“그러면 더 말이 안 되잖아요. 내가 당신의 광증을 가라앉혀 줄 수 있으니, 함께 있는 게 더 유리해요.”
아르파드는 낮은 목소리로 겨우 말문을 열었다.
“요즘 들어, 가끔 꿈을 꿔.”
“네?”
갑자기 웬 뜬금없는 소리냐는 표정.
아르파드는 애써 웃으며 힐리아의 보드라운 뺨을 손등으로 스치듯 매만지며 말했다.
“내가 당신을 해치는 꿈을 종종 꿔.”
“…!”
“그때마다 당신은 다치거나, 험한 꼴을 당한 상태였어. 늘… 울고 있었지. 살려 달라고 비명을 지르기도 하고.”
힐리아는 소름이 쭉 돋는 걸 느꼈다.
‘설마?’
* * *
진홍월의 밤 이틀째 날.
황후궁은 괴괴한 침묵에 짓눌려 있었다.
그 주인이 실권을 전부 빼앗기고 근신 중인 상황이니 당연했다.
이전이라면 밤이라도 사방을 환하게 밝혀 두었겠지만, 지금은 작은 촛대 하나만 세워져 있었다.
황후 이자벨은 고요하게 타오르는 작고 초라한 초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침묵을 방해한 건 아는 목소리였다.
“소박맞은 황후께서 이러시니 궁상도 이런 궁상이 없군.”
황후가 고개를 들었다.
“늦었어. 가스팔.”
가스팔은 고개를 저으며 소리 없이 걸어왔다.
“황후궁 안이 무덤 같아. 얼마나 궁인들을 잡아 댄 거지?”
실제로 황후가 아랫사람을 다그치거나 짓누른 건 아니었다.
그저 아무 말 없이 침실에 칩거한 것뿐.
그것만으로도 궁인들은 주인의 눈치를 살피느라 조용해질 수밖에 없다.
황후는 굳이 변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무시하고 손을 내밀었다.
“가져왔겠지?”
그녀의 목소리에는 선명한 초조함과 기대감이 묻어났다.
“그래. 꽤 고생했다고. 차라리 이전과 같은 곳에서 빼 오라고 할 것이지. 하필이면…….”
황후는 몇 번이나 강조했다. 가장 나중에 안치된 석관 안의 것을 가져오라고.
“내놓기나 해.”
가스팔은 순순히 들고 온 주머니를 황후의 무릎 위로 던졌다.
이자벨은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를 열었다.
그 안에는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뼛조각이 몇 개 있었다.
손가락뼈. 그중 하나에는 황후도 아는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죽은 전 황후 록셀린이 연애 시절 남편에게 받은 선물 중 하나.
그래서 관에 들어가는 순간에도 가져간 반지.
“네 말대로 그 관에서 부장품도 하나 함께 빼 왔어. 이걸로 충분한 증거가 되었겠지?”
이 유골이 광증으로 죽은 록셀린 황후의 것이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