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그게 대체 무슨 소리예요? 벨테인 경!”
나는 놀라서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벨테인 경의 굳은 표정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추문과 재판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결백한 건 다 밝혀졌잖아요.”
그때였다. 옆에서 아르파드의 얄미운 목소리가 끼어든 것은.
“글쎄. 나중에라도 누가 또 문제시할 수도 있을 텐데.”
나는 아르파드를 노려본 다음, 벨테인 경을 달래려 애썼다.
“그런 거짓말 때문에 당신 같은 고결한 기사를 잃는 건 너무 큰 손해예요.”
내내 입을 굳게 다물고 있던 벨테인 경의 입이 열렸다.
“고결하고 부끄러움이 없으신 건 비 전하이십니다. 하지만… 제게 일말의 부끄러움도 없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그렇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나만 일어서 있고, 아르파드는 여유를 잃지 않고 다리를 꼰 채 앉아 있었다.
하지만 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아르파드가 벌떡 일어섰다.
“너는 지금, 그 의미를 알고서 하는 소리인가?!”
요즘 들어 안 어울리는 짓만 해 대서 얼굴 근육이 풀린 게 아닌가 했는데, 아르파드는 아르파드였다.
섬뜩할 정도의 기세와 분노였다.
그걸 한 몸에 받고 있을 벨테인 경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지금 이렇게 말씀 올리는 겁니다.”
두 사람 사이에 심각한 대화가 오고 간 이후.
벨테인 경의 사직 언급에 너무 놀라서 의미를 다 받아들이지 못하다가 뒤늦게 깨달았다.
방금 벨테인 경이 한 말은…….
‘벨테인 경이 나에게… 마음이 있기라도 하다는 거야, 설마?’
나는 혼란의 도가니에 빠진 채,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벨테인 경은 참담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와 오래 알아 온 나는 알 수 있었다.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게 맞다는 걸.
‘하지만, 3회차 때 아무 일 없었잖아?’
그와 나는 함께 도망치기까지 했음에도, 남녀 간의 일이 없었다.
당연히 나는 벨테인 경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날 여자로 좋아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너무 놀라 입만 뻐끔거리고 있었더니, 흉흉한 기세의 아르파드가 벨테인 경 앞으로 나아갔다.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알고는 있나?”
“저는 그저…….”
“방금 너는 몇 마디 말로 내 아내의 추문을 일부나마 진실로 만들었어!”
“…면목이 없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재판 결과와 상관없이 힐리아와 너의 추문을 기정사실이라고 하는 놈들이 반드시 있을 거다!”
벨테인 경은 고개를 들어, 아르파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기실 죽을 때까지 입 밖으로 낼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럼 그렇게 했어야지……!”
아르파드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몇 마디를 더 하려는 걸 내가 막았다.
“잠시만요. 아르파드.”
“힐리아!”
“내가 직접 대화하고 싶어요. 내 기사예요.”
“…….”
아르파드는 속에서 용암이 들끓는 듯한 얼굴을 하면서도 한발 물러섰다.
나는 벨테인 경의 앞으로 직접 다가갔다. 그리고 그와 시선을 맞추고 물었다.
“평생 숨길 생각이었다면서, 지금 이야기하는 이유는 뭐예요?”
“…….”
“그리고… 언제부터였어요?”
지난 생에서 벨테인 경은 내 부탁대로 결혼식 전날 나와 함께 도망쳤다.
그리고 반년 정도 이어진 도피 생활 동안 그는 나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한 방에서 잠든 적도, 노숙하면서 서로의 체온을 의지한 적도 많았다.
그럼에도 내가 아는 벨테인 경은 완전히 결백하고 부끄러움 없는 기사였다.
물론 전생에 그 사실을 믿어 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 때문에 벨테인 경은 감히 결혼 전 신부를 납치한, 그것도 황족의 신부를 빼앗은 죄인이 되었다.
루드비히는 나와 제대로 결혼식을 치르고 나서도, 벨테인 경에 대한 분노를 참지 않았다.
사지의 근맥을 잘라 그를 폐인으로 만들고, 지하 감옥에서 죽을 때까지 고문했다.
바로 숨이 끊어지지 않은 것이 도리어 벌처럼 느껴질 정도로.
끔찍하고 처참한 최후.
그럼에도 그는 마지막까지 나를 걱정했다.
그것이 단지, 그가 기사로서 나를 염려하고 걱정했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데, 만일 그게 아니라면…….
“벨테인 경, 당신이 말한 그 마음이… 언제부터였던 건가요?”
아르파드의 살기 어린 분노 앞에서도 의연하던 벨테인 경이 천천히 고개를 떨궜다.
마치 있어선 안 될 죄를 고백하는 사람처럼.
“…오래되었습니다. 비 전하께서 약탈혼 당하시는 것을 보고 깨달았으나, 지금 생각하면 그전부터였습니다.”
그렇다면, 회귀 전 그 역시 똑같은 마음이었다는 소리였다.
그런데도 그는…….
순간적으로 울컥,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라 말문을 막았다.
벨테인 경은 쥐어짜 내듯 말했다.
“…죄송합니다.”
“왜 사과를 해요?”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어째서 잘못이 될까.
하지만 아르파드가 화를 낸 이유를 생각해 보면, 그가 저렇게 책임을 통감하는 것도 이해할 만했다.
“제가 물러나겠다고 말씀 올린 것은 제 마음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리고 사죄를 드린 것도.”
“무슨 말이에요?”
뭔가 더 다른 게 있다는 건가?
애절한 진심과 나에 대한 죄책감만 가득하던 벨테인 경의 태도가 조금 달라졌다.
“재판 때 저는… 대공 측 증인으로 나설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건… 하지만 나를 위한 증언을 했잖아요?”
그래서 나는 벨테인 경이 일부러 에반젤린에게 속아 넘어간 척 증인석에 선 줄 알았다.
루드비히측 증인으로 나와서 나에게 유리한 말을 하면 더 효과적일 테니까.
본인이 그렇게 말하기도 했고.
그런데 벨테인 경의 말은 내 생각과 전혀 달랐다.
“증인석에 설 때까지 저는 진짜로 대공 측 증인이었습니다.”
“…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지는 저도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다만, 루스 후작 영애와 대화할 때 뭔가 이상했습니다.”
결과가 좋아서 그냥 넘어가긴 했지만, 그날 보인 술수는 그의 성격에 어울리지 않았다.
에반젤린의 회유를 정면에서 거절하고, 원래대로 우리 측 증인으로 나서서 말하는 게 그의 곧은 성정과 맞았다.
“그 여자의 사악한 말에서 뭔가 이상한 힘이 느껴졌습니다.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있던 욕망을 건드려 저를 조종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건 정말로 심각한 이야기였다.
지난 세 번의 회귀 동안 단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일이니까.
타인의 정신을 조종하는 건 마법으로도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본 가장 강력한 마법사인 마탑주조차 그런 마법은 쓰지 못했으니까.
‘이건, 좀 자세히 알아봐야 할 필요가 있겠어.’
벨테인 경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떼며 정말 어렵게 말을 이었다.
“…비 전하를 나락까지 떨어뜨리면, 제 것이 될 수 있을 거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아르파드가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증인석에 설 때까지는, 저는 정말로 그걸 원하고 실천할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하지 않았잖아요?”
벨테인 경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증인석에서 비 전하를 뵌 순간, 머리가 깨끗하게 개는 듯했습니다.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지요.”
“벨테인 경은 하지 않았잖아요. 마음에 품은 것까지 죄가 되지는 않아요.”
벨테인 경은 바닥에 머리를 조아린 채 고개를 저었다.
“마지막 선을 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제가 한 일이 아닙니다. 비 전하께서 이끌어 주신 거지요.”
“경의 정신력이 이긴 거예요.”
“아뇨. 아닙니다. 그것만은 알 수 있습니다. 그때 비 전하와 눈이 마주치지 않았다면, 저는 그 더러운 말들을 내뱉었을 겁니다.”
쿵!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과 분노에 젖어 벨테인 경은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나는 깨달았다. 벨테인 경은 나를 마음에 두었기 때문에 물러나길 청하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에반젤린의 흉계에 넘어갈 뻔했다는 사실에 자책하며, 자신이 방해된다고 생각하여 청하는 것이다.
정말이지… 내가 잘 아는 벨테인 경다웠다.
지금 그를 감정적으로 설득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벨테인 경이 스스로를 용서할 핑계를 만들어 주는 일이다.
나는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레누스 벨테인. 나에게 검을 바친 내 첫 번째 기사. 내 명이라면 뭐든 따를 수 있겠나요?”
“예, 비 전하. 무엇이든 하명하십시오. 목숨을 바쳐 따르겠습니다.”
“그러면 한동안 델핀 저로 물러나 있어요.”
한동안이라는 건 곧 불러들이겠다는 말이기도 했다.
벨테인 경이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원래 사람의 정신이 위태로울 때 가장 좋은 해법은 이거였다.
‘일. 아주 많은 일!’
바쁘면 땅 팔 시간도 없다.
그래서 나는 벨테인 경에게 일을 아주 많이 주기로 했다.
“내가 지금 델핀저 내부를 관리할 여유가 없어요. 아직 인력 충원도 제대로 되지 못했고. 저택에 대해 잘 아는 벨테인 경이 직접 가서 살펴 주세요.”
물론 이게 다는 아니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명분이에요. 벨테인 경이 황궁 밖으로 나가 있을 수 있는.”
“명분이라면, 실제는 다르단 말씀입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대가 기사의 명예를 스스로 더럽혔다 느껴 내 곁을 떠나겠다면, 그 원인을 직접 찾아내 오명을 씻으세요.”
“…비 전하.”
에반젤린과 루드비히에 대한 감시도 벨테인 경에게 맡긴 것이다.
대체 무슨 수를 써서 벨테인 경을 조종할 뻔했는지 그건 반드시 알아내야 했다.
벨테인 경은 내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
게다가 조종에 당할 뻔했지만 이겨 낸 사람이기도 했다. 이보다 적임자는 없었다.
자기 손으로 그에 대해 밝혀내는 동안에는 혐오와 분노를 스스로에게 풀 시간이 없을 거다.
전부 밝혀내고 나면, 자신 때문이 아니라고 객관적으로 판단 내릴 수 있겠지.
‘그때도 땅 파고 있으면 혼내서 다시 끌고 와야지.’
감격한 듯 바닥에 이마를 대는 벨테인 경을 향해 다가가며 물었다.
“나는 벨테인 경이 영원한 내 첫 번째 기사님이라고 생각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비 전하…….”
벨테인 경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렸다.
“계속 그렇게 남아 달라고 부탁하는 건, 경에게 잔인한 일일까요?”
벨테인 경의 얼굴이 굳었다. 내가 그의 고백을 직접적으로 거절한 걸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부디 그가 많은 상처를 받지 않기를 바라며 말을 맺었다.
“경이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내 마음속 첫 번째 기사 자리는 늘 벨테인 경의 것이에요. 그것만은, 믿어도 좋아요.”
당신이 내 소중한 기사라는 사실은 몇 번의 생을 살아도, 어떤 일이 있어도 그대로일 테니.
* * *
아르파드는 한탄했다.
“내 성격도 너무 부드러워진 것 같아서 큰일이야.”
뭐래? 아까 벨테인 경을 그대로 산산조각 낼 기세였으면서.
물론 실천하지 않는 건 칭찬할 만하긴 하다만.
나는 아르파드가 늘 그렇듯 자신의 자비로움에 대해 자랑하고, 칭찬하라고 당당하게 요구할 줄 알았다.
마음의 준비(?)도 끝냈고.
그런데 의외로 아르파드는 더는 생색을 내지 않았다. 오히려 이상한 짓을 사부작사부작 벌이고 있었다.
지금은 저녁 식사가 얼마 안 남은 시간이다. 그런데 아르파드의 옷차림이 이상했다.
“왜 그걸 입고 있어요?”
그는 수도 한복판에서도 눈에 띄지 않을 평범하고 낡은 옷차림이었다.
가면만 쓰면 용병왕 제랄드다.
아르파드는 어쩐지 미약한 분노와 두려움 섞인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두려움? 아르파드가 두려움이라고?
“오늘 밤은 혼자 자도록 해.”
“네?”
이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자, 아르파드는 조금 전의 수심을 깨끗이 지우고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왜, 외로울 것 같아서 싫은가?”
“아니, 갑자기 왜 그래요?”
왜 날 독수공방(?) 시키겠다는 거냔 말이다.
그냥 놀랐을 뿐이다. 절대 서운하거나 실망한 게 아니었다!
이어진 아르파드의 말에 내 표정도 굳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 밤, 진홍월이 뜰 거야.”
진홍월의 별명은 광기의 달.
황족의 광증이 가장 강해지는 날이 바로, 진홍월이 뜬 밤이다.
그게 오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