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힐리아가 커다란 보라색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물었다.
“혹시, 당신 나한테 말 못 할 큰 잘못이라도 했어요?”
“…….”
잠시 말문이 막힌 아르파드는 이 와중에도 제비꽃 사탕 같은 눈만 굴리는 게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 중증이라고 생각하는 동시에 힐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게 아니면 이렇게까지 다정하고 상냥하게 굴 리가 없잖아요!”
대체 뭐가 맞다는 건지.
아르파드는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자신을 놀리는 것처럼 유달리 밝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햇살이 계속 힐리아의 얼굴을 비추었다. 심장이 간질거렸다.
‘확, 그냥 지금 고백해 버릴까?’
그게 아니면 이 눈치 없는 여자가 계속 헛다리를 짚고, 혼자 속 터지는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곧 아르파드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남녀 간의 감정에 눈치가 없다고는 하지만, 이 정도면… 모른 척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아르파드는 사심을 접어 두고 냉철하게 판단했다.
그렇다면…….
저렇게 나왔다는 것 자체가 힐리아가 무의식적으로 그의 접근을 눈치채고, 암묵적인 선을 그은 셈이다.
그 선을 함부로 넘는다면, 이 여자는 바로 도망칠지도 모른다.
게다가 약혼자와 친구에게 배반당한 경험에, 저택 안에도 자신의 편이 없는 삶을 살아온 힐리아다.
자기 입으로도 말했지만, 쉽사리 타인을 믿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경계심을 푸는 게 1순위다.’
아르파드는 일부러 가볍고 유쾌하게 물었다.
“내가 요즘 들어 너무 친절하고 다정해 보이기라도 하나?”
“맞아요. 그래서 이상하다니까요? 말이 안 되잖아.”
“남편에게 하는 말이라기엔 폭언 아닌가? 나 상처받았는데?”
“그건 미안해요. 하지만 사실이잖아요.”
“…….”
그나마 상처받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비웃지 않은 걸로 1보 전진…이라고 믿고 싶었다.
이게 다 초반에 신뢰를 깎아 먹은 과거의 자신 탓이었다.
그는 제 생각을 능숙하게 숨기면서, 힐리아가 부담스러워하지 않도록 농담을 섞어 말했다.
물론 농담이 아니라 100% 진심이었지만.
“나는 평소와 똑같은데. 그대에게 그렇게 보인다면… 내가 실제로 다정하고 상냥해서가 아닐까?”
농담을 겉에 살살 발라서 말했는데도 힐리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말하기 싫으면 말아요! 굳이 그렇게 소름 돋는 농담을!”
힐리아는 진저리를 쳤다.
“…아, 이건 진짜 상처받았어.”
이건 진심 100%였다.
아르파드는 어깨를 축 처지게 하고, 눈썹을 늘어뜨렸다.
장난기를 넉넉히 섞으면서도, 진심이 빠지진 않았다고 힐리아가 느끼도록.
그래서 웃으면서 부드럽게 말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삐치지 말아요.”
힐리아가 충분히 안심하도록.
의심 따윈 접어 두고, 충분히 깊숙한 곳까지 들어오도록.
그리고 그녀가 뒤늦게 눈치챘을 때는 이미 퇴로가 모조리 차단된 뒤일 것이다.
그는 자신이 있었다.
가장 짙은 용혈의 계승자인 아르파드는 뛰어난 사냥꾼이었으므로.
* * *
며칠 뒤. 아르파드는 웃는 얼굴로 서류 하나를 들고 방문했다.
“무슨 일이에요?”
“남편이 아내를 보러 오는 데에도 이유가 필요하나?”
아르파드는 투덜거리면서도 곧 웃는 얼굴로 내게 서류를 하나 내밀었다.
“축하해. 그대가 이겼어.”
뜬금없는 말의 의미를 깨달은 건 그가 내민 서류를 읽어 본 뒤였다.
‘승소.’
지난번 공개 재판에서 승소한 그 건이 아니다.
이전에 내가 루드비히의 횡령과 불법적 명의 이전에 대한 고소 결과였다.
원래는 몇 년쯤 걸리는 건이지만, 지난번 승소가 영향을 주어서 빨리 결과가 나온 모양이다.
애니는 감격한 듯 잔뜩 상기된 얼굴로 무릎을 굽혔다.
“경하드립니다, 비 전하!”
연이어 궁인들과 기사들까지 모두 무릎을 굽혀 나에게 축하 인사를 올렸다.
물론 나도 기뻤다.
손에 돈이 들어왔다는 것보다 루드비히에게 강한 보복이 되었으리라는 점이 기뻤다.
회귀 전에는 이런 상황은 꿈도 꿔 보지 못했으니까.
사실 그걸 생각하면… 지금 나는 꽤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복수의 희열에 몸을 떨어도 이상하지 않은데 말이다.
이제 내 안에서 루드비히의 위치가 그것밖에 안 되는 모양이다.
그 사실이, 나는 더 기뻤다.
감정이 표정에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걸 막지 않았다. 이건 굳이 감추거나 왜곡할 필요 없었으니까.
덕분에 축하 인사하는 이들에게 홀가분한 기분으로 이렇게 말해 줄 수 있었다.
“고마워.”
그리고 이 소식을 부러 전해 주러 온 아르파드에게도 말했다.
“고마워요. 당신.”
“별말씀을.”
아르파드는 부드럽게 웃었다.
늘 칼날처럼 예리하고,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만 하던 남자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보드랍고 따스한 표정이었다.
‘어째 좀 인상이 달라 보일 정도란 말이지.’
나는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당신도 무슨 좋은 일 있어요?”
“당연히 있지. 아내가 승소했으니까 나도 기쁠 수밖에.”
하긴, 정치적으로 이미 몰락한 루드비히지만, 이제 황족이라 부를 수도 없는 수준으로 떨어졌다.
그가 아르파드의 하나뿐인 경쟁자였음을 생각하면 당연히 즐거울 수밖에 없을 거다.
이번 재판에 패소한 루드비히의 전 재산에 대한 압류 명령이 떨어졌다.
황족으로서의 작위는 황실로부 받은 것이기 때문에 압류하지 못했다.
다만, 그에 딸린 영지의 껍데기를 제외한 모든 이권은 전부 내가 가져왔다.
징세와 징발의 권한은 기본이었다. 거기에 키엘른 영지의 모든 땅과 숲에 대한 개간 권리, 영지 성의 소유권 및 자원에 대한 개발 권리까지.
작위를 몰수하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알맹이는 전부 빼앗았으니까.’
정말로 밀 한 톨도 남기지 않고 말이다.
이제 루드비히는 정말로 이름뿐인 황족이었다. 그야말로 빈털터리.
그 명의의 재산은 정말 한 푼도 없었고, 이후 영지에서 나는 소출 역시 전부 나에게 오게 되어 있었다.
‘그래도 내게 주어야 할 배상금을 다 갚지 못하겠지.’
애초에 루드비히가 과욕을 부려 델핀 가의 전 재산을 노렸던 게 컸다.
요구한 만큼 토하게 되자 이게 발목을 잡은 것이다.
‘남은 길은… 정말로 노역형뿐이네.’
제국 역사상 처음으로 황족이 노역형을 받는 꼴을 보게 생겼다.
나는 압류 예정인 재산 목록을 대충 훑어보며 냉정하게 평했다.
“내가 아는 것보다 재산 목록이 적네.”
아르파드가 옆에서 이죽거렸다.
“그 짧은 기간 동안 열심히 빼돌리려고 했겠지.”
“그것도 전부 찾아내서 가져와야겠죠.”
“율켄.”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는지 펠릭스 율켄이 아르파드의 부름에 쪼르르 들어왔다.
“드디어 뵙는군요, 비 전하! 너무 오랜만입니다! 어헝! 뵙고 싶었어요!”
야근과 야근 사이에서 갈리고 있는지, 율켄의 눈 밑이 여전히 시커멨다.
“무슨 일 있었어? 얼굴이 반쪽이 됐네.”
율켄은 짐짓 우는 척을 하며 일러바쳤다.
“전부 피도 눈물도 없는 주인께 시달린 덕분이지요. 정말… 정말… 많은 일이 있었지요. 너무, 너무 힘들었어요.”
그는 눈물 한 방울을 손가락으로 훔치며 먼 곳을 봤다.
아르파드가 얼마나 괴롭힌 거야.
그때 아르파드가 율켄의 말을 끊으려는 건지, 아니면 내가 책망하는 걸 듣기 싫은 건지 선수를 쳤다.
“내 아내를 위해 최고의 인재를 대령했지.”
“네?”
“제가 최고의 인재이긴 하죠. 어떤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
율켄도 아르파드가 무엇 때문에 자신을 불렀는지 모르는 듯했다.
아르파드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걸렸다.
“루드비히 놈이 아무리 필사적으로 재산을 빼돌려도, 전부 찾아낼 수 있는 인재가 바로…….”
그의 손이 율켄을 가리켰다.
그러자 율켄의 안광이 번쩍거리기 시작했다.
“맡겨만 주십시오! 그건 이 펠릭스 율켄이 적임이지요!”
“그래. 탈세와 돈세탁, 밀수, 뇌물, 횡령 등등에 아주 탁월한 인재니까.”
그러자 율켄은 찔끔하더니 곧 변명했다.
“제가 그런 걸 잘 찾아낸다는 말씀입니다. 절대 탈세, 돈세탁 기타 등등을 잘해서 잘 아는 건 아닙니다.”
“…….”
아니, 아주 잘할 거 같은데.
하지만 날 도와줄 사람이니 그런 것으로 하기로 했다.
“잘 부탁해.”
“맡겨 주십시오!”
힘차게 주먹을 쥐는 율켄은 아주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없는 재산을 만들어 내서라도 다 캐내 올 듯했다.
율켄은 재판소에서 재산 압류 실행을 하기 위해 보낼 관리들과 함께 가기로 했다.
거기에 나는 한 명을 더 붙여 주었다.
“뮤젠 경.”
“예, 전하.”
“첫 임무예요. 법관들과 펠릭스의 안전을 지켜 주세요. 물론 루드비히의 말을 들을 고용인이 남아 있을 리 없지만, 있다면 감히 소드 마스터 앞에서 무력으로 저항할 생각은 못 하겠죠.”
사실상 그를 내 대리인으로 보내겠다는 소리였다.
아론은 환하게 웃는 얼굴로 허리를 숙였다.
“믿고 맡겨 주시니,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그는 장난기 가득한 어조로 말했다. 임무를 맡게 된 두 남자는 의욕적으로 다짐했다.
“반드시 키엘른 대공을 알몸으로 내쫓아, 망신을 주도록 하죠!”
“하하. 꼭 대공이 저항해 줬으면 좋겠군요.”
율켄은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아론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갔다.
그러고 나자, 내 집무실에 남겨진 한 남자의 우울한 표정이 유달리 마음에 걸렸다.
‘벨테인 경.’
그는 수호 기사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내 옆을 지키고 있었다.
재판이 끝난 이후부터 그의 얼굴에 드리운 그늘은 한시도 지워지지 않았다.
우리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는데, 스캔들의 주인공이 된 것도 그렇고…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으리라.
게다가 말하자면 선임인 그를 두고 아론에게 일을 맡긴 게 서운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나는 그의 마음을 어림짐작하며 말했다.
“미안해요, 벨테인 경. 이번 일을 뮤젠 경에게 맡긴 건 더 믿어서가 아니에요. 그도 내 기사이니, 슬슬 임무를 주어야지요. 그래도 내 첫 번째 기사는 벨테인 경뿐이에요.”
“…비 전하.”
내내 짙은 그림자에 덮여 있던 벨테인 경의 얼굴이 재판 이후 처음으로 살짝 밝아졌다.
어느새 의자까지 가져와 내 옆에 앉아 있던 아르파드가 ‘쳇’ 하고 혀를 찼다.
뭐야? 갑자기?
하지만 내가 아르파드에게 신경을 쓸 여유는 없었다.
아주 조금 밝아졌던 벨테인 경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잠시 망설이다가 그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했다.
곧 이를 악물고 내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내가 전혀 예상 못 한 요청을 내뱉었다.
“부디, 제가 비 전하의 수호 기사라는 중책에서 물러나길 허락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