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순간, 힐리아는 말문이 막히는 걸 느꼈다.
목구멍 속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울컥했다.
벨테인 경은 증인석에서 담담하게 말을 이어 가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경건하게까지 느껴지는 어조였다.
“비 전하께서는 황태자 전하의 아내이시며, 주신과 모신 앞에서 영원을 맹세하신 부군께만 충실한 분입니다.”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잇는다.
이 자체가 힐리아와 자신 사이에 확실한 선을 그어 두려는 듯한 의도가 엿보였다.
“…저는 그저 비 전하의 부족한 기사일 뿐입니다. 이런 일에 제 이름이 비 전하와 함께 오르내리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됩니다.”
그리고 벨테인 경은 고개를 돌렸다.
루드비히와 그 변호사, 그리고 참관객들 뒤쪽에 숨어 있는 에반젤린을 향해.
“감히 비 전하의 명예를 욕되게 하려 하지 마십시오.”
벨테인 경의 기세에 눌려 잠시 할 말을 잃고 있던 변호사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 삿대질을 시작했다.
“아까 나에게 말한 것과는 다르지 않습니까?! 불륜 관계가 맞다면서요!”
실제로 루드비히 측에서 벨테인 경을 무턱대고 믿고 내보냈을 리 없다.
에반젤린이 그를 단단히 회유했음을 따로 확인한 후에 증인석에 세웠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증인석에서 딴말하다니.
루드비히가 분노해서 외쳤다.
“기사의 명예는 어디다 버린 거냐?! 아까 대기실에서 내 변호사에겐 힐리아와 부적절한 관계였다고 말했잖아! 아, 혹시 누가 협박이라도 한 건가? 절대 사실대로 말하지 말라고?”
그러자 벨테인 경은 잠시 침묵하다가 도리어 물었다.
“저를 협박하고 회유하려 한 건 당신들이 아닙니까?”
“뭐?”
“뭐라고요?”
“없는 죄를 지어내 비 전하를 궁지에 몰기 위해서 말입니다.”
“개소리!”
루드비히와 변호사가 경악하는 것을 벨테인 경은 신경 쓰지 않았다.
판사를 똑바로 보며 그는 허리춤에 걸려 있던 검을 꺼내 들었다.
판사는 물론 참관객들 사이에서도 두려움이 번졌다.
재판 중에 칼을 뽑아 드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벨테인 경의 검은 누구도 위협하지 않았다.
그는 뽑아 든 검을 증인석 바닥에 세워 박았다.
“기사의 생명이며 명예, 일신의 모든 것인 이 검에 대고 맹세하건대… 황태자비 전하께선 무고하십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소리 높여 외쳤다.
“감히 고귀한 숙녀의 명예를 더럽히려는 자는, 부족하나마 이 검부터 꺾어야 할 겁니다.”
그때 참관객석에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한 남자가 끼어들었다.
그는 후드를 벗은 뒤 참관객석을 가로막은 난간을 훌쩍 뛰어넘어 재판정 안에 가볍게 착지했다.
그는 격앙된 어조로 벨테인 경의 말에 동조했다.
“같은 황태자비 전하의 기사로서 깊이 동감하는 바이오. 비 전하의 명예를 더럽히려거든, 그리고 이 명예로운 기사에게 오명을 씌우려거든 내 검 역시 함께 부러뜨려야 할 것이다!”
붉은 머리카락이 불꽃처럼 흩날렸다.
이 남자의 정체를 알아챈 이들이 소리를 질렀다.
“아론 뮤젠!”
“뮤젠 소공작이다!”
“소드 마스터가 나섰어!”
루드비히 측의 경악은 신경도 쓰지 않고서, 아론은 뿌듯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증인석에 선 벨테인 경의 옆에 섰다.
그리고 모두에게 들으란 듯 말했다.
“같은 기사로서 당신의 기사도에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
정작 칭찬받은 벨테인 경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해맑은 아론은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 * *
재판정 안에 소란이 파도처럼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잠깐, 이러면 이거 어떻게 되는 거야? 기사가 부정했잖아.”
“설마 자기가 저질렀다고 곧이곧대로 말하겠어? 당연히 아니라고 하겠지! 아직 모르는 거야.”
“뭐?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저기 소드 마스터 앞에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어?!”
“그, 그건……!”
벨테인 경이 루드비히 측 증인으로 등장했을 때는 이미 결론이 났다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정작 그의 증언은 힐리아의 결백을 주장하고 있었다. 판사는 망치를 두드려 혼란에 빠진 내부 분위기를 수습했다.
“기사의 명예는 물론 중요하겠지만, 지금은 그걸 따지는 자리가 아니오. 특히 뮤젠 소공작은 허락받지 않고 난입했습니다. 조금 전의 발언 역시 고소인과 증인들에 대한 협박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즉시 퇴정 조치하겠습니다.”
맞는 말이긴 했다.
애초에 아론은 힐리아나 아르파드의 지시가 있어서 행동한 게 아니었다.
순수하게 참관하러 왔다가 벨테인 경의 행동과 태도에 감동해서 충동적으로 나선 것이다.
그는 순순히 판사의 권위를 인정하며 물러났다.
“협박 같은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지시에 따르도록 하지요.”
아론은 순순히 기사들에게 둘러싸인 채 퇴정했다.
하지만 그가 남긴 말 자체의 위력은 그대로였다.
‘황태자비의 명예를 떨어뜨리려는 자는 자신의 검과 싸워야 한다.’
이 사실이 법정 안의 모든 참관객과 대기실에 있던 증인들에게까지 확실하게 각인되었다.
법정 바로 옆에 대기실이 있었고, 구조상 법정에서의 소리가 다 들리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루드비히와 에반젤린의 사주로 자극적인 거짓 증언을 한 이들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일부는 불안감에 덜덜 떨 정도였다.
그때 루드비히의 변호사가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나섰다.
“고소인은 레누스 벨테인 경을 회유하거나 매수하려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자 벨테인 경은 바로 반박했다.
“아닙니다. 분명히 루스 후작 영애가 직접 찾아와 저를……!”
“아니, 이번 재판과 전혀 상관없는 루스 후작 영애께서 지금 왜 나옵니까?”
변호사는 루드비히를 변호할 때보다 에반젤린이 언급되자 더 예민하게 반응했다.
벨테인 경에 대한 감동과 미안함, 그리고 뮤젠 소공작에 대한 고마움에 잠시 젖어 있던 힐리아의 머리가 깨어났다.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듯한 감각이었다.
‘변호사가 에반젤린의 사람인 건 알았지만, 역시 따로 무슨 수를 썼구나.’
그사이, 변호사는 능수능란하게 벨테인 경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차라리 고소인이자 저의 의뢰인인 대공 전하께서 회유를 시도했다고 주장하지 그러셨습니까? 그러면 설득력이라도 있었을 텐데요.”
“하지만 분명히……!”
변호사가 교활하게 웃으며 물었다.
“증거라도 있으십니까?”
“…!”
당연히 에반젤린이 벨테인 경을 직접 회유하려 했다는 증거가 있을 리 없다.
아니라고 우기기만 하면 그만인 것이다.
벨테인 경은 그래도 최선을 다했다.
“제가 고소인 측의 증인으로 나온 것이 증거 아닙니까. 고소인 측이 저를 매수하려 한 게 아니면 제가 지금 왜 여기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말하기 위해 일부러 고소인 측에 접근한 거겠죠!”
변호사는 순간적으로 말의 앞뒤를 맞춰 냈다.
그리고 루드비히에게 신호를 주어 그가 주장에 힘을 싣도록 했다.
“마, 맞아! 우리가 저 기사를 증인으로 내세운 건, 저놈이 먼저 찾아와 증인으로 삼아 달라고 했기 때문이야!”
“아닙니다!”
변호사는 다시 능글거리게 웃으며 물었다.
“증인이나, 증거가 있습니까? 당신을 저나 대공 전하께서 회유하려 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것 말입니다.”
“…!”
벨테인 경은 루드비히나 에반젤린이 자신을 협박했다는 것까지 증명하고 싶은 듯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만약을 대비해 증거나 증인이 남지 않도록 에반젤린이 확실히 손을 쓴 모양이니까.
벨테인 경의 성격이나 성향을 생각하면 지금 상황만으로도 많이 노력한 것이었다.
그는 권모술수와는 거리가 먼 전형적인 기사였으니까.
‘좋아. 이젠 내 차례야.’
충직한 기사가 만들어 준 기회다.
준비해 둔 것들을 내놓을 절호의 기회였다.
그녀는 소리를 높여 외쳤다.
“증인도, 증거도 있습니다.”
“…네?”
“뭐라고?”
벨테인 경에게 집중되어 있던 시선이 힐리아에게 다닥다닥 달라붙는다.
잠시 당황했던 변호사가 평정을 되찾고 그녀에게 물었다.
“설마 우리가 벨테인 경을 매수하려 했다는 증거와 증인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러자 힐리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변호사가 미미하게 안도하려는 찰나.
힐리아는 당당하게 물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요. 비 전하께서 약혼 기간에 부정을 저지르셨는지가…….”
힐리아는 이번에도 차갑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이미 증언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사이엔 아무 일도 없었다고요.”
그녀는 증인석의 벨테인 경을 보며 호의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그쪽의 증인으로서 출석한 내 충직한 기사가.”
“하지만, 다른 증인들의 말은 달랐지 않습……!”
힐리아는 여유 넘치는 어투로 루드비히의 변호사에게 물었다.
“당신은 지금 이 재판의 쟁점이 내가 약혼 기간 동안 기사와 부적절한 관계였는지라고 생각하나요?”
“…당연하지 않습니까!”
힐리아의 말투가 고압적으로 변했다.
“틀렸어. 진짜 중요한 건 파혼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그러니 배상을 받아야 하는 쪽이 누구인지지.”
루드비히가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섰다.
“그건 당연히 너지! 이 뻔뻔한 여자!”
힐리아는 몸을 휙 돌려, 루드비히를 노려보며 말했다.
“파혼에 대한 책임은 내 쪽이 아니라, 키엘른 대공에게 있음을 주장한다. 당연히 배상 역시 내가 받아야 마땅해!”
“뭐라고?!”
루드비히와 그 변호사가 경악한 사이, 힐리아는 판사에게 요구했다.
“사전에 제출한 추가 증인들의 입정을 요구합니다. 그들은 약혼 파탄의 책임이 키엘른 대공에게 있음을 증언해 줄 겁니다.”
힐리아가 증인의 이름들을 쭉 나열하자, 이번엔 루드비히의 안색이 시커멓게 물들었다.
힐리아가 나열한 이름들이 아주 익숙했기 때문이다.
루드비히의 전 애인들 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