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나는 놀라서 외쳤다.
“벨테인 경? 그대가 어째서?”
벨테인 경이 지금 루드비히 측 증인으로 나서는 건 내 계획이 아니었다.
그는 내가 준비한 결정적인 증언과 증거가 모두 제출된 뒤에야 증인으로서 나올 예정이었으니까.
날카롭거나 잔인한 질문이 전혀 필요 없어진 때 말이다.
‘에반젤린!’
다른 이유가 있을 리 없었다. 나는 참관객석 가장 안쪽에서 교활하게 웃고 있는 에반젤린을 노려보았다.
에반젤린은 내 생각을 읽은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보기만 해도 역겨운 미소였다.
그때 아르파드가 끼어들었다.
“저자는 내 아내의 증인일 텐데?”
그러자 루드비히의 변호사는 준비했다는 듯 대답을 내놓았다.
“레누스 벨테인 경께서 우리 측 증인으로 참석하겠다고 동의하셨습니다. 그러면 얼마든지 증인으로 나설 수 있지요.”
그는 과시하듯 벨테인 경에게 다시 물었다.
“아닙니까? 벨테인 경?”
놀랍게도 벨테인 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참관객석으로 놀라움이 번져 나갔다.
“이건 이미 재판 결과가 나온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요?”
“저 기사가 대공 측 증인이라는 것부터가 이미 사실이라고 말하는 셈인데.”
“그럼 아까 증인들의 망측한 증언이 전부 사실이라는 얘기야?”
“재판 결과가 어떻든 이미 이것만으로도 황태자비의 이미지와 권위는 바닥으로 떨어진 게 확정이네.”
지금 상황을 두고 신이 나서 떠드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닿았다.
에반젤린이 풀어 둔 바람잡이들만은 아니었다.
이미 분위기가 저쪽으로 넘어가 버렸다.
큰 충격이라거나, 두려움은 없었다.
예상하고, 어느 정도는 나도 방조한 감이 있으니까.
‘그래야 반전이 일어났을 때 더 극적일 테니까.’
덤으로 무고당한 불쌍한 피해자로서의 내 이미지도 더 만들기 쉬울 테니까 말이다.
궁지에 몰리고, 받은 비난이 클수록 이것이 반전되었을 때의 효과도 배가 된다.
하지만 벨테인 경의 변심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당연히 마음의 준비가 되었을 리 없다.
지난 세 번의 회귀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나를 배신한 적 없는 사람이니까.
꿈에서라도 그가 날 배신하는 것은 상상한 적도 없었다.
놀랍게도 벨테인 경은 아주 평온하고 또렷한 정신으로 보였다. 약이나 마법 등의 수단으로 정신이 흐려진 것도 아닌 듯했다.
‘그렇다면, 그런 거라면… 설마……?’
처음 경험하는 상황에 충격받은 모양인지 나도 모르게 손이 살짝 떨린 모양이다.
내 손이 떨리고 있다는 걸 아르파드가 꽉 쥐어 왔을 때야 깨달았다.
‘아!’
아르파드의 낮은 속삭임이 귀를 두드렸다.
“괜찮아, 힐리아.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 덕분에 나는 빠르게 충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고마워요.”
놀랍게도 아르파드의 손에 가득한 온기가 내게 큰 힘이 되고 있었다.
지금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벨테인 경을 본 후 굳어진 표정을 조금 풀 수 있었다.
겨우 미소가 얼굴에 걸렸다.
* * *
그때 아르파드가 사나운 미소를 지은 채 힐리아에게 속삭였다.
“사실 조금 마음에 안 들긴 해. 그대가 이렇게 충격받은 건 처음 봤으니까.”
“…….”
힐리아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알았다.
충격받지 않았다는 거짓말은 소용없을 게 분명했다.
아르파드는 확신하고 있었으니까.
벨테인 경과 애니는 그녀에게 특별한 사람들이다.
생각보다 힐리아는 자신이 그들에게 심정적으로 많이 의지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렇게 충격받을 정도로.
아르파드는 낮게 혀를 찼다. 초조한 독점욕이 가슴 속에서 치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 전 눈엣가시 같은 기사가 재판정에 모습을 드러낸 직후의 힐리아가 보인 모습이 말이다.
‘동요든, 경악이든, 분노든, 배신감도 전부… 나로 인해 보여 줬으면 좋겠군.’
힐리아의 모든 감정이 자신 때문이었으면 했다.
스스로 좀 과한 생각이라는 걸 알았기에 입에 담지는 않았지만.
게다가 곧 이성이 태클을 걸었다.
‘아, 배신감은 빼고.’
아르파드는 힐리아가 배신감으로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노려보는 광경을 상상할 수 있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 더러워진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힐리아를.
허름한 옷과 대충 잘린 머리카락, 뺨의 상처가 더없이 가여워 보였다.
“나는… 그래도 당신을……!”
‘?!’
아르파드는 순간적으로 떠오른 환각을 떨쳐 내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뭐지?’
근래 이런 환각이나 이상한 꿈을 꾸는 경우가 늘었다.
‘게다가 매번, 전부 힐리아와 관련된 것들이야.’
이상했다.
늘 얼어붙은 듯 감정의 변화를 그다지 경험한 적 없는 심장이 불안하게 두근거렸다.
그가 자신의 혼란에 집중할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힐리아가 마주 잡은 손에 힘을 주었기 때문이다.
아르파드는 퍼뜩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환하게 웃고 있는 힐리아가 보였다.
조금 전의 두려움과 동요는 모두 잊은 듯 평소의 그녀 그대로였다.
불길한 환상 속에서처럼 다치거나 불행하거나, 원망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아르파드는 현실에 좀 더 집중하기로 했다.
이 불길한 환각들은 잠시 미뤄 두고서.
힐리아와 함께 벨테인 경이 변호사의 심문에 어떻게 대답하는지 지켜보았다.
* * *
루드비히는 꿈틀거리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너무나도 통쾌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짜증 나고 눈에 거슬리던 기사 놈이 제 죄를 스스로 증언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면 힐리아도 더는 발뺌하지 못할 거다.
‘그래. 당연하지. 그게 사실이니까!’
루드비히는 진심으로 그렇다고 믿었다.
본인이 약혼 동안 에반젤린과 비밀 연애를 했고, 그 밖에도 많은 애인을 두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힐리아 역시 그랬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자신만이 피해자이고, 죄인은 저 둘이라고 생각했다.
‘좋아. 이제 당연한 내 걸 되찾을 수 있게 되었어!’
그가 생각하는 ‘내 것’은 당연히 힐리아가 횡령과 명의 문제로 압류를 요청한 본인의 재산이 아니었다.
3년간 그가 자신의 것처럼 마구 사용해 온 델핀 가의 집과 재산이었지.
변호사가 벨테인 경에게 결정적인 질문을 했을 때 그의 기대감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증인에게 묻겠습니다. 증인은 키엘른 대공 전하와 황태자비께서 약혼 중, 아직 델핀 공녀이셨던 때에 저분과 부정한 관계였습니다. 그리고 델핀 공녀께서 황태자비가 되신 이후에도 그 관계는 이어졌지요.”
변호사는 대답을 확신했다. 그는 자신감으로 가득 찬 채, 잠시 뜸을 들였다가 질문을 덧붙였다.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맞습니까?”
판사와 루드비히, 에반젤린, 힐리아와 아르파드, 그야말로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의 눈이 벨테인 경의 입만을 주목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의 입이 열렸을 때.
“저와 비 전하는…….”
힐리아는 미약한 불안감과 배신감을 애써 억누르며 증인석의 벨테인 경을 보고 있었다.
격렬한 동요는 아르파드 덕분에 정신을 차려서 억눌렀지만, 감정 자체가 없어진 건 아니었으니.
그때였다. 벨테인 경이 힐리아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것은.
힐리아는 법정에 출석한 이후 처음으로 벨테인 경과 눈이 마주쳤다.
힐리아는 계속 그를 보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까지는 벨테인 경이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는 의미였다.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여전히 결백하고 곧은, 힐리아가 아는 레누스 벨테인 그대로였다.
‘아……!’
전생에 함께 도망치면서도 절대 그녀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던, 그리고 처참하게 죽으면서도 도리어 그녀를 걱정했던.
조금 전까지 힐리아의 가슴, 아니, 몸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던 불안감과 배신감이 눈 녹듯 스러졌다.
덕분에 그녀는 놀랄 정도로 평온한 마음으로 이어질 말을 기다릴 수 있었다.
“…우리 둘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비 전하께서는 흰 눈처럼 무고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