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레누스 벨테인은 침착하다 못해 우울해 보이는 표정으로 천천히 재판정 안으로 들어왔다.
다른 증인들보다 그는 압도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번 추문의 두 당사자 중 한 명이니 당연했다.
사방에서 온갖 흥미와 평가, 조롱이 날아들었다.
“저 사람이 그 유명한 불륜 기사…….”
“충직해 보이긴 하는데, 그다지 미남은 아니네요. 난 엄청난 미남일 줄 알고 기대했는데.”
“그러니까 말이야. 황태자 전하나 루드비히 대공께서도 손꼽히는 미남이신데… 황태자비께서 보는 눈이 낮으신 건가.”
“또 모르죠. 외모와 애정이 꼭 비례하지는 않잖아요. 아, 그래도 몸은 확실히 좋아 보이네요.”
온갖 모욕적인 말들이 사방에서 쏟아졌다.
그가 루드비히 측 증인으로 나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 불륜 추문이 사실이라고 판단한 사람들이 많았다.
힐리아는 주변의 악의 어린 시선이나 말에 신경 쓰지 못했다. 그럴 여유가 없었다.
표정이 모든 걸 증명했다.
에반젤린은 재판 시작부터 힐리아의 표정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기에 알 수 있었다.
지금 힐리아는 재판 시작 이후 처음으로 진심으로 당황한 상태였다.
‘그래, 이런 얼굴을 보고 싶었어!’
에반젤린의 머릿속으로 희열이 불길처럼 번졌다.
그녀는 조금 전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 * *
에반젤린은 피고인 측 증인 대기실에 있던 벨테인 경을 비밀리에 불러냈다.
황실 재판소에서 일하는 일반 행정관 중 한둘을 매수한 것으로 이런 일을 벌이기엔 충분했다.
에반젤린을 보고 벨테인 경은 경악하여 얼굴을 굳혔다.
그는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비 전하를 위해 중요한 정보를 알려 주겠다던 게 당신이었습니까?”
“그래요. 친구였던 정으로 힐리아를 도울 방법을 벨테인 경에게 알려 주려고 온 거예요.”
그러자 벨테인 경의 표정이 잔뜩 찌푸려졌다.
그는 태어나 처음으로 레이디에게 거친 말을 썼다.
“네가 그동안 그분을 얼마나 괴롭혔는지 내가 전부 곁에서 지켜봤는데, 헛소리하지 마라.”
그럼에도 에반젤린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네가 나를 매수하려 들었다는 것까지 전부 재판에서 증언해 주지.”
그 말에도 에반젤린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여유 넘치게 웃음을 입가에 떠올린 채, 부채를 살랑거렸다.
“딱딱하기도 하셔라. 하긴 당신 유명했지. 대공저나 내 하녀들도 당신에겐 말도, 돈도 안 통한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으니까.”
“잘 알고 있군. 그럼 이만…….”
벨테인 경은 기사가 레이디에게 갖춰야 할 예의를 에반젤린에게는 전혀 차리지 않았다.
냉정하게 돌아가려는 그의 등을 에반젤린이 벼른 단어가 푹 찔렀다.
“늘 그렇듯 충직하고 성실하게 증언하고 나면, 이제 쓸모없어진 기사님은 버려지겠지.”
조롱을 넘어 확신이 가득 찬 목소리였다. 벨테인 경의 발이 절로 멈췄다.
에반젤린은 교활한 뱀처럼 혀를 놀렸다.
“그게 싫으면, 루드비히 측 증인으로 나서. 그리고 증언하라고. 너와 힐리아가 약혼 기간에 연인이었고, 결혼 이후 황궁에서도 그런 관계였노라고.”
“…웃기지 마! 내가 만에 하나라도 그럴 성……!”
“내 핑계를 대. 내가 협박해서 어쩔 수 없었노라고. 그러면 착한 힐리아는 이해해 줄걸?”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재판이 끝나고 모든 걸 잃은 힐리아를 위로하며 손을 내밀면, 결국 널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걸? 어쨌건 넌 어린 시절부터 단 하나뿐인 힐리아의 기사였으니까.”
“내 목숨이 끊어지는 한이 있어도 그런 일은 없을 거다.”
“안 그러면 넌 이제 곧 버려지게 될걸? 힐리아에게.”
“…뭐?”
분노로 차서 고개를 돌렸을 때 벨테인 경은 놀라서 잠시 멈칫했다.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는데 에반젤린이 그에게 가까이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에반젤린의 검은색 모자에 매달린 이름 모를 검은 보석이 잠시 위험스러운 빛을 내뿜었다.
워낙 찰나의 일이었고,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려 있어서 그는 눈치채지 못했다.
“귀부인에게 이런 추문은 치명적이야. 특히나 힐리아는 결혼 시작부터 파혼에 약탈혼이라는 사건까지 있었지. 거기에 너와의 추문이 더해지면, 그야말로 ‘가벼운’ 여자 취급당하기에 십상이야.”
“그게 네 목적이면서… 그분을 생각하는 것처럼 말하는군.”
그러자 에반젤린은 빙긋 웃었다.
“옛 친구로서 힐리아를 생각해 주는 것도 맞아.”
“잘도 헛소리를…….”
“진짜라니까. 분수에도 안 맞는 자리에서 고생하느니, 진짜 자기를 사랑해 주는 남자와 사는 게 낫지 않겠어?”
에반젤린은 작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동굴 속에서처럼 웅웅거리는 듯했다.
벨테인 경은 어째서인지 아찔한 감각을 느꼈다.
‘뭐지? 이건?’
피가 나도록 손을 거머쥐었으나, 점점 머릿속이 멍해졌다.
“그리고 덤으로 네 편도 들어주는 거지, 레누스 벨테인 경. 힐리아의 유일한 충성스러운 기사, 아, 이제는 아닌가?”
머리가 멍해지려는 와중에도, 벨테인 경은 심장이 쿵 내려앉은 듯한 감각을 느꼈다.
“너보다 늦게 힐리아에게 기사의 맹세를 하긴 했지만, 공작가의 후계자에 소드 마스터인 아론 뮤젠이 있잖아?”
“…….”
아니라고, 도저히 부정할 수가 없었다.
놀랍게도 에반젤린은 벨테인 경이 그동안 느껴 온 불안감을 정확히 찌르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추문만 생길 뿐인 너를 계속 곁에 둘 이유가 있겠어? 누구라도 널 멀리 보내거나 치울걸?”
실제로 비슷한 조언을 시녀장인 뮤젠 공작 부인이 힐리아에게 했다.
소문이 안 좋으니 그를 멀리 보내라고 말이다.
‘하지만 힐리아 님은 그러지 않으셨어. 날 내치지 않으셨다.’
게다가 재판 시작 전에 친절하게 말해 주기까지 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벨테인 경. 우리는 결백하잖아요? 이건 나만이 아니라 경의 명예도 짓밟는 거예요. 내가 그런 걸 용납할 리 없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힐리아는 눈부시게 웃었다.
아득해지려던 정신이 다시 또렷해지는 듯했다.
그때 전혀 예상 못 한 말이 에반젤린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이런 방법이 아니면, 너는 사랑하는 여자를 영영 손에 넣을 수 없어.”
벨테인 경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무, 무슨 헛소리를! 나는 순수하게 기사로서 그분께 충성을 맹세한 것뿐이다! 그런 마음 따위는……!”
“웃기지 마. 다른 사람 눈은 속여도 나는 못 속여. 내가 델핀저에 드나든 게 몇 년인데. 네가 힐리아를 보는 시선을 내가 몰랐을 것 같아?”
에반젤린은 사악하게 웃으며 단언했다.
“너는 힐리아를 사랑하잖아.”
“…!”
아니라고, 그런 적 없다고 부정해야 했다.
그것이 본인의 명예를 지키고, 무엇보다 소중한 주인을 지킬 수 있는 길이다.
그럼에도…….
“정말 단 한 순간도 바란 적 없어? 힐리아를 네 여자로 만들고 싶다고?”
저 목소리가 왜 이렇게 달콤하게 들리는 걸까?
벨테인 경은 다시 멍한 머리로 생각했다.
비틀거리며 방을 나서는 벨테인 경의 등을 보며 에반젤린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모자에 달린 검은 보석이 장식된 브로치를 떼어 손 안에서 굴리며, 중얼거렸다.
“진짜 편한데, 이거? 진짜 신물(神物) 맞아? 차라리 저주받은 물건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겠어.”
그러자 문을 열고 들어선 비오 대주교가 불쾌한 표정으로 에반젤린에게서 브로치를 빼앗았다.
“불경한 말은, 그것을 담은 입도 저주받게 만듭니다. 말을 조심하시죠.”
폭언에 가까운 말이라 에반젤린은 미간을 찌푸렸다.
“당신이 찾아 헤매던 신물을 주고,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협력자에게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비오 대주교.”
“당신이 신심이 없는 사람인 건 알지만, 적어도 제 앞에서는 조금은 신경 쓰는 척은 해 주십시오.”
에반젤린과 비오 대주교 사이에서 불온한 시선이 얽혔다.
어쨌건 지금 비오 대주교와 대놓고 척을 질 순 없었다.
그는 에반젤린의 가장 큰 협력자 중 하나였고, 비오 대주교가 능력을 개화시킨 신물을 빌려주었기에 벨테인 경을 현혹하는 것도 가능했다.
‘물론 내 말솜씨가 좋았으니 가능한 일이지만 말이야.’
성격에 안 맞지만, 에반젤린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주의하도록 하죠.”
“준비는 끝난 듯하니, 이만 재판정으로 들어가시죠.”
그렇게 에반젤린은 비오 대주교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주변의 귀부인들에게 질투 어린 시선을 즐겼다.
* * *
그리고 지금, 힐리아가 진심으로 경악한 얼굴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에반젤린은 자신을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는 힐리아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힐리아의 ‘네 짓이지?’라는 눈빛에 대한 답이었다.
물론 겨우 이 정로도 끝낼 생각은 없었다.
그사이, 기세등등해진 루드비히의 변호사가 벨테인 경을 지명했다.
“고소인은 우선 레누스 벨테인 경에게 증언을 요청합니다.”
그에 따라, 증인석에 벨테인 경이 세워졌다.
모두의 시선이 그의 입에 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