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루드비히의 주장 자체는 특별할 것이 없었다.
에반젤린이 에스피톨라와 바람잡이들을 이용해 충분히 퍼뜨려 둔 소문을 그대로 읊은 것에 불과했다.
‘황태자비가 그 기사와 내연 관계였다.’
그러니 달리 새롭거나 사람들의 흥미를 끌 만한 자극적인 내용은 아니었다.
에반젤린은 이 건을 최대한 말초적이고 자극적으로 만들려 노력했다.
‘그래야 과분하게 치솟은 힐리아의 권위를 부수고 끌어내리는 데 도움이 되지.’
에반젤린과 루드비히가 데려온 증인들의 증언 역시 이 의도를 충실히 따랐다.
“저는 비 전하께서 공녀님이시던 때 침실 정리를 맡았던 하녀입니다. 침소를 정리하러 가면 비 전하께서 벨테인 경과 한 침대에 있는 걸 봐야 했습니다.”
첫 증인만이 아니라 모든 증인이 델핀 공작가에서 일한 경력이 있는 고용인 출신이었다.
“저는 정원사로 일했습니다. 대낮인데도 두 분은 열정적으로 애정 행각을 벌이고 계셨습니다.”
그러자 루드비히의 변호사가 흥미진진한 어투로 물었다.
“어떤 애정 행각을 벌이고 있었다는 거죠?”
그러자 정원사는 잠시 힐리아의 눈치를 흘긋 보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입을 다물지는 않았다.
“진한 입맞춤만이 아니라… 이 이상은 너무 낯 뜨거워 차마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증언은 줄줄이 이어졌다.
“저는 주방 하인이었습니다. 식사나 간식을 가져다드리러 갈 때면 두 분이 함께 계시는 걸 자주 봤습니다. 절대, 일반적인 기사와 레이디의 관계로는 안 보였습니다. 훨씬… 깊은 관계였죠.”
“저택에서 잠시라도 일했다면 이 소문을 모르는 이는 없습니다.”
고귀한 여성의, 그것도 결혼 전 추문에 흥미를 느끼지 않는 이들은 적었다.
하나같이 자극적인 증언에 참관객들 사이에 소란이 오고 가기 시작했다.
“전 약혼자가 왜 난리인가 했는데, 이 정도면 분노할 만하지 않아? 아예 약혼자를 우롱한 거잖아.”
“맞아요. 게다가 너무 낯뜨거운 말들이 많아서… 조금 실망이에요. 황태자비께서는 대단한 분이신 줄 알았는데.”
“하지만 한쪽 말만 듣고는 모르는 것 아닌가요?”
“말 못 들었어? 델핀 저에서 일한 자들은 다 안다잖아!”
“내 친구도 델핀저에서 일했는데, 사실상 두 사람이 거의 부부 같았다던데?”
“망측해라…….”
“부러 에스코트까지 해서 따라오셨는데, 아내의 저런 비밀을 알게 되시다니. 황태자 전하도 가여워요.”
“제일 큰 피해자는 루드비히 대공이지만, 역시 황태자 전하께서도 참담하시겠죠.”
“게다가 얼마 전에 새로 들인 기사가 또 있다면서요? 설마 그 기사와도…….”
에반젤린이 심어 둔 바람잡이들이 자신의 지인에게 들은 적 있다며 맞장구를 쳤다.
재판소 내부의 분위기는 단번에 루드비히 쪽으로 무게가 쏠렸다.
아직 힐리아 본인이나 그녀가 데려온 증인에게 증언 기회가 주어지기도 전에 말이다.
여자로서 치명적인 추문의 소용돌이 안에 내던져진 힐리아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보였다.
아직 변변찮은 변명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
누가 봐도 힐리아는 궁지에 몰려 있었다.
아르타누스 연회에서 자신만만하게 내려다보던 얼굴과 같은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에반젤린은 통쾌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지금 그 표정이, 그 처지가 네게 어울려.’
동시에 그녀는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을 확인했다.
‘빙의자더라도 지금 상황은 미처 예상 못 했겠지. 지금 같은 일은 원작에 없으니까.’
원작과는 상관없이 에반젤린 혼자 꾸민 일이다.
원작의 정보에 기대고 있을 빙의자라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오랜만에 에반젤린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자신이 모든 걸 알고 주변을 조종해서 힐리아를 궁지에 몰고 가는 것이 지난 5년간 익숙해진 구도였다.
그 당연한 광경이 다시 펼쳐지고 있었다.
에반젤린에게는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화려한 붉은색 부채를 펼쳐 갈고리처럼 끌려 올라간 입꼬리를 가렸다.
‘그리고… 내가 이 정도로 끝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 이건 시작에 불과하니까.’
참관객들 사이에서 정상적인 질문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저 증언들이 사실이라 해도 전부 결혼 전 문제 아니야? 그걸로 이렇게 재판까지 거는 건 이상하지 않나?”
“결혼만큼은 아니라고 해도, 약혼도 중요한 계약이니까. 약혼 기간 동안 정절을 지키지 않은 이에게 파혼에 대한 배상 책임을 무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실제로 이혼 재판 시에 관련된 갈등이 불거지는 경우가 더 많긴 했지만, 파혼에 대해서도 재판이 진행되는 경우가 종종 있긴 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있었다.
“두 분의 약혼이 파기된 건 그것 때문이 아니잖아.”
사람들의 시선이 힐리아의 곁에 굳건히 선 아르파드에게 닿았다.
“약탈혼 때문이었지.”
“그럼 뭐가 어떻게 되는 거지?”
자극적인 추문을 물고 뜯고 맛보는 이들도 있었고.
이런 추문이 약혼과 파혼에 연관된 건지 의심스러워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에반젤린의 미소는 더더욱 짙어질 뿐이었다.
기다렸다는 듯 루드비히의 변호사가 나서서 추가 증인을 요청했다.
“그리고 저분이 황태자비가 되신 후에도 기사와 깊은 관계를 유지했다는 걸 알려 준 증인이 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힐리아 측 사람이 입을 열었다.
힐리아 본인은 아니었다. 그녀는 여전히 하얀 얼굴로 굳게 입술을 다문 채, 모욕을 견디고 있었으니까.
“그 증인이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목숨을 걸어야 할 거다.”
누구도 예상 못 한 타이밍에 아르파드가 살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루드비히의 변호사가 용기를 긁어내어 반론했다.
“…황태자 전하. 양심에 따라나선 이들을 위협하시는 건 옳지 못합니다.”
변호사의 곁에서 루드비히는 아르파드를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힐리아와 관련해 벌써 두 번이나 아르파드에게 모욕을 당했다.
뼈가 부러진 상처는 이미 완치되었음에도, 통증이 손목을 찌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통증은 곧 치욕과 굴욕감이었다.
루드비히는 이를 갈며 외쳤다.
“내 변호사의 말이 옳다. 증인을 겁박하려 하다니, 법을 수호해야 할 황가의 사내로서 수치스럽지 않나?!”
아르파드는 피식 웃었다.
“글쎄. 팔이 부러져 배 터진 거위처럼 꽥꽥거리던 것보다는 조금도 수치스럽지 않다만?”
“네놈!”
두 황족의 싸움이 될 기미가 보이자 법관이 나섰다.
“두 분은 부디 진정하시길. 저는 황제 폐하의 대리인으로서 이 자리에 있습니다. 두 분께서 재판의 진행을 방해하신다면 퇴정을 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황태자와 대공이라는 고귀한 신분에도 판관은 꼬장꼬장했다.
적어도 이 법정 안에서만은 판사는 황제의 권한을 대행하는 자였다.
그러니 황태자든 대공이든, 퇴정 명령은 거부할 수 없었다.
특히나 이번 재판에는 황제가 보낸 황실 기사단이 판사와 법관들을 호위 중이었다.
황제가 이번 재판의 향방을 주시하고 있다는 표시였으며, 또한 판사에게 권한을 일임했다는 증명이기도 했다.
결국 아르파드와 루드비히는 불만스러워하면서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판관은 우선 힐리아에게 물었다.
“반론을 바로 하시겠습니까?”
그러자 내내 무표정하던 힐리아의 하얀 얼굴에 처음으로 표정이 떠올랐다.
마치 이곳이 자신을 모욕의 제단 앞에 세운 재판소가 아니라, 응접실이라도 된다는 듯 평온한 태도였다.
“하지 않겠습니다.”
“반론이나 변호를 하지 않으시겠다는 겁니까?”
“지금은요.”
힐리아는 손을 뻗어 루드비히의 변호사를 가리켰다.
“아직 저쪽의 주장이 다 끝나지 않은 듯해서요. 말이 전부 끝나고 나면, 저 역시 결백을 증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너무나도 여유 넘치는 목소리였다. 에반젤린은 미약한 불안감을 느꼈다.
처음에 에반젤린은 힐리아가 궁지에 몰려 하얗게 질려 있다고 생각했다.
힐리아가 처음으로 입을 연 지금,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힐리아는 그저 태연하게 무표정만 유지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아냐. 그런 척하는 걸 거야. 정말로 조금도 초조하지 않고, 모욕스럽지 않을 리 없잖아!’
힐리아가 처한 상황을 똑같이 당한다면 혀 깨물고 죽을 수도 있었다.
이런 모욕을 당하는 당사자가 아무렇지 않을 리 없었다.
아닌 척하는 것일 뿐이다.
곧 저 가짜 평온함은 산산조각 날 게 분명했다.
신뢰하던 이에게 배신당한 힐리아가 과연 저 평정을 유지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 * *
루드비히의 변호사가 일어서서 마저 증인들을 요청했다.
“우선 루드비히 대공 전하와 함께 입궁했다가 그 광경을 목격한 대공저의 고용인들과 황궁에 소속된 일부 궁인들…….”
따분해서 하품이 나올 지경이었다. 나는 온갖 죄목으로 재판소에 서 봤다.
반역, 불륜, 살인, 살인 미수 등등…….
매번 재판은 유죄를 이미 정해 둔 채, 나를 대중의 앞에 세우고 비난과 모욕을 주었다. 잘 짜인 연극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나는 모든 것을 준비해 둔 채로 이곳에 왔다.
게다가.
내 손을 잡은 아르파드의 손에 힘이 조금 더 들어갔다.
그의 붉은 눈동자는 재판소에 입장하기 전부터 나만을 향하고 있었다.
오로지 나만이 걱정된다는 듯.
너무 달콤해서, 도리어 무서워질 정도의 눈빛과 태도였다.
동시에 그는 과거, 이런 상황에서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한 든든한 아군이다.
이 사실 자체가 나에게 묘한 감동을 주고 있었다.
그때였다.
루드비히의 변호사가 나와 아르파드를 바라보더니 씩 웃었다.
검고 끈적거리는 아주 기분 나쁜 웃음.
그 이유를 나는 곧 알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증인으로서 이번 일에 연루된 두 명의 당사자 중 한 명인, 레누스 벨테인 경을 요청합니다.”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