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루드비히가 공개 재판을 요구한 이유는 간단했다.
‘나에게 최대한 모욕을 주고 싶다는 거지.’
아마도 참관객이 구름처럼 몰려와 있으리라.
내가 재판소 입구까지 오는 동안에 목격한 인파만 해도 엄청났다.
그들 모두가 오늘 재판 결과에 호기심을 곤두세우고 몰려온 자들이다.
사람들 손에는 오늘 자 에스피톨라지가 들려 있었다. 주로 나와 벨테인 경의 관계를 의심하는 내용이 메인이었다.
그 인파를 뚫고 여기까지 오는 것 자체가 일반적인 귀부인이라면 끔찍한 일일 것이다.
나야 목이 잘리는 경험도 해 봤으니 아무렇지 않지만 말이다.
공개 재판 요구는 루드비히의 협박 수단 중 하나였다. 본인이 바라는 대로 하라는.
하지만 나는 그걸 거절하고, 공개 재판을 받아들였다.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손을 내민 아르파드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지금 난 재판소에 피고 자격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당신은 함께 들어갈 수 없어요.”
재판소에 들어갈 때 피고소인이 대동할 수 있는 이는 변호사뿐.
하지만 나는 따로 변호사를 데려오지 않았다. 혼자서도 충분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아르파드는 빙긋 웃더니, 내 손등에 키스했다.
“오늘은 내가 그대의 변호사가 되도록 하지.”
“…당신 변호사 자격 없잖아요?”
“자격은 없어도, 황족의 특권은 있지.”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아르파드는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요즘 들어 이 남자의 말투는 이상하리만치 다정해졌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황족은 아르타누스의 권위가 내리는 어떤 곳이라도 발걸음 할 수 있다.”
“아…….”
재판소는 곧 제국 황실의 사법권을 상징하는 곳이다.
실질적인 재판을 실행하는 건 법관들이지만, 그들은 황제의 대리인에 불과했다.
그 때문에 재판소 안, 판사들의 머리 위에는 드래곤 아르타누스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그러니 아르파드가 나와 함께 들어가는 것에는 문제가 없는 모양이다.
“…….”
어쩐지 기분이 묘했다.
세 번의 회귀 동안 나는 꽤 여러 번 재판소의 피고석에 서 봤다.
변변한 변호사를 구하기도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혼자 재판소에 출두하는 것과 유죄 판결을 받고 온갖 모욕을 겪는 일은 익숙했다.
이번에도 나는 익숙하게 혼자 입장할 생각이었다.
이전과 달리 확실하게 승리할 준비도 되어 있으니까.
나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아르파드가 내게 준 스타틸리아의 별을 보여 주면서.
“나 못 믿어요? 걱정 말아요. 이 반지값 이상은 한다고 했잖아요?”
“…….”
나름대로 꽤 힘 있고 당당하게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르파드의 표정이 더 구겨졌다.
그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내게 차근차근 말했다.
“나는 당연히 그대를 믿어. 지금 내가 함께 가고 싶다는 건 그대를 못 믿어서가 아니야.”
어쩐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 쉬운 것부터 알려 주는 듯한 태도다.
“그보다는 적의만 가득하고 모욕적인 공간에 그대 혼자만 나아가는 걸 내가 견딜 수 없어서야.”
아르파드는 슬쩍 이를 갈았다.
“사실은 아예 내보내고 싶지 않지만, 당신이 이번 일을 기회로 삼을 수 있을 거라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보내는 거야.”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건… 나를 걱정한다는 거예요?”
비로소 그가 웃었다.
“이제야 제대로 이해했군. 너무 오래 걸렸어.”
아르파드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능력에 대한 믿음과는 별개로, 그대가 상처받을까 걱정되고 보호해 주고 싶은 거야.”
나는 어쩐지 조금 멍해졌다.
‘처음이야. 이렇게 말해 주는 사람은.’
누군가가 순수하게 나를 걱정해서 재판소에 함께하고 싶다는 건 처음이다.
그것도… 그 당사자가 아르파드라니.
믿어지지 않고 지극히 낯설기만 한 상황.
하지만 동시에 가슴 속에 따스한 것이 차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분명한 기쁨과 고마움, 그리고 안도감이었다.
‘세상에. 나에게 이런 걸 느끼게 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르파드라니…….’
놀랍고 새삼스러웠다.
약탈혼 의뢰를 하러 찾아갔을 때 내 목에 칼부터 들이대던 인간이 이렇게 변하다니.
어쩐지 가슴 속 단단하게 굳어 있던 감정이 조금 녹아내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진짜 변호사는 아니지만, 당신의 옆에서 편을 들어주고 싶어. 사실 그게 변호사 아닌가?”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몰랐다.
결국 변호사라는 건 누군가를 감싸고 타인을 위해 변명해 주려는 행위에서 시작된 것일 테니까.
그렇게 본다면, 나는 네 번째 생에 와서야 처음으로 나만의 변호인을 가지게 된 걸지도 몰랐다.
이건 도저히 거부할 수 없었다. 결국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잘 부탁해요. 일일 변호사 씨.”
“성심을 다하도록 하지요. 의뢰인.”
나는 매번 이 남자의 의뢰인이 될 운명인 모양이다.
* * *
내가 아르파드의 손을 잡고 재판소에 입장하자 사람들은 경악했다.
특히 놀라고 분노한 것은 루드비히였다. 그는 본인의 변호사를 통해 판사에게 항의했다.
“변호사 외에 다른 이가 피고와 함께 입장할 수 없는 게 원칙 아닙니까?!”
판사는 자신이 등진 벽에 걸린 아르타누스의 문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르타누스의 영광이 닿는 모든 곳에 황족이 발걸음 하지 못할 곳은 없습니다. 대공께서도 이에 해당하는 분이시니, 잘 아시겠지요.”
결국 나는 아르파드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재판정에 섰다.
사방에서 호기심 혹은 적의 어린 시선과 수군거림이 화살촉처럼 내리꽂혔다.
“설마 황태자가 함께 올 줄은…….”
“고발 내용이 사실이면, 황태자가 함께 올 리 없잖아요. 무죄인 거 아니에요?”
“에이. 황태자께서도 모르고 믿으시는 걸 수도 있죠.”
불온한 시선들 사이에서 나는 예상한 이를 찾아낼 수 있었다.
참관인석 가장 뒤쪽에, 회색 베일로 얼굴을 가린 채 서 있는 여자.
‘에반젤린!’
루드비히를 조종해서 이번 일을 꾸민 당사자이니, 당연히 올 거라 생각했다.
‘안 오면 오히려 곤란하지.’
베일에 가려져 있었으나, 눈빛이 마주친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마주 웃어 주었다. 베일이 살짝 떨린 듯했다.
그리고 에반젤린의 뒤에는 두 남자가 서 있었다.
긴 검은 머리칼을 늘어뜨린 흰 사제복을 입은 남자. 비오 대주교.
그 옆에 밤색 단발머리에 안경을 쓴 남자 역시 기억에 있다.
‘빌헬름 필레르모.’
오늘 재판에 대해 열정적으로 보도한 에스피톨라의 발간자.
에반젤린은 이 남자들을 마치 자랑하듯 옆에 늘어놓은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애써 우월감을 드러내려는 것처럼.
나는 그녀를 비웃어 준 채 고개를 돌렸다.
아르파드는 여전히 내 손을 맞잡고 있었다.
* * *
“과연 소문대로, 그리고 제가 본 대로 황태자 전하가 아내에 대한 애정이 극진한 모양입니다.”
비오 대주교의 목소리는 마치 에반젤린을 비웃는 것처럼 들렸다.
에반젤린은 조금 전 힐리아가 자신을 비웃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안 그래도 기분이 안 좋은데, 자신의 편을 들어야 할 비오 대주교가 저렇게 말하자 짜증이 확 치솟았다.
“그것도 곧 끝이죠. 아내가 부정한 여자였다는 걸 알게 되고도 사랑할 남자가 어디 있겠어요?”
빌헬름은 에반젤린의 비위를 맞추려는 듯이 말을 받았다.
“맞습니다. 황태자께서도 진실을 아시면 결국 마음이 식을 수밖에 없겠지요.”
하지만 비오 대주교는 팔짱을 낀 채 대꾸할 뿐이었다.
“하나, 오늘의 화제는 결국 결혼 전 문제 아닙니까. 약탈혼으로 데려가실 정도로 사랑하신다면 그 정도는 문제 되지 않는다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에반젤린은 도끼눈을 뜨고 성직자를 노려보았다.
‘대체 누구 편인 거야, 이 인간은?’
뾰족한 말이 나왔다.
“대주교께서는 꼭 그러길 바라시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그러자 그는 다정하게 웃었다.
“그야 주신전은 결혼 서약의 가장 큰 수호자니까요. 황태자께서 신성한 결혼 서약을 지키시길 바라는 것뿐이랍니다.”
힐리아의 편을 들려는 것은 아니라는 변명이었다.
에반젤린은 차갑게 일침을 놓았다.
“그 변명이 사실이셔야 할 거예요. 대주교께서 원하는 목표를 이루시려면 결국 제 도움이 필요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에반젤린은 고개를 돌렸다.
비오는 경멸 어린 시선으로 잠시 에반젤린을 내려다보았다.
곧 재판 시작을 알리는 망치 소리가 울리며 모든 이의 주의가 그쪽으로 쏠렸다.
덕분에 에반젤린이나 그 옆에 선 빌헬름도 비오의 불온한 시선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루드비히의 히스테릭한 외침과 함께 재판이 시작되었다.
“저 여자는 나의 약혼녀였던 동안 침실에 다른 사내를 끌어들인 부정한 여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