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Chapter 13. 불륜 재판
루드비히가 힐리아를 고소하기 전 주.
외출하고 돌아온 루드비히를 맞이한 건 에반젤린이었다.
그녀는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루드비히를 추궁했다.
“얌전히 있으라는 내 말 잊었어? 어딜 다녀온 거야?”
“내가 일일이 행선지를 보고하고 다녀야 하나?”
에반젤린은 자신이 선 나선계단 난간을 손바닥으로 치면서 외쳤다.
“네가 로비턴 가에 다녀온 걸 알고 묻고 있는 거야!”
로비턴 가는 루드비히가 꾸준히 찾는 애인 중 한 명이 사는 곳이다.
루드비히는 미간을 찡그렸다.
“의부증이라도 있어? 내 행선지를 일일이 감시하고 있는 건가?”
분노하면서도 그는 어쩐지 우쭐하는 듯한 태도를 감추지 않은 채 말했다.
“나는 집착이 심한 여자는 별론데.”
에반젤린은 혐오감을 감추지 않으며 대꾸했다.
“의부증이라니. 네가 내 남편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지 마.”
그 차가운 말투에 루드비히는 움찔했다.
두 사람이 부부처럼 함께 지내온지는 꽤 되었다.
루드비히가 힐리아와 약혼하기 전부터 그들은 연인이었고, 델핀저를 거의 신혼집처럼 사용했다.
당연히 루드비히는 에반젤린이 지금 질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에반젤린의 태도나 반응이 예상과 달랐다.
“그럼 나 말고 또 누가 있어, 너에게? 네가 힐리아처럼 애인을 여럿 달고 다니진 않을 거 아냐.”
루드비히는 나름대로 힐리아를 깎아내리고, 에반젤린을 칭찬하며 말했다.
하지만 그것이 에반젤린에게는 전혀 다르게 들렸다.
‘너에겐 나 외에 다른 남자가 있을 리 없어.’
이렇게 말이다.
에반젤린에게는 더없이 굴욕적으로 들리는 말이었다.
‘안 그래도 괜찮은 남자들이 힐리아의 옆에 있어서 짜증 나는데, 루드비히 따위가 나를 모욕해?’
황태자 아르파드. 소드 마스터가 된 아론 뮤젠…….
전부 진짜 여주인공의 곁에 있어야 마땅한 이들이다.
에반젤린은 힐리아에게 그 남자들을 빼앗겼다고 느끼고 있었다.
안 그래도 마음에 안 차는 루드비히가 돌발 행동하고 와서는 심기를 거스르자 분노가 치밀었다.
그녀는 루드비히를 아예 무시하고, 이미 자신의 사람들로 채워진 대공저의 고용인들에게 명령했다.
“루드비히를 방으로 데려가.”
“무슨…….”
에반젤린을 비웃으려던 루드비히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처음 보는 얼굴의 고용인들이 다가와 그의 어깨를 잡았다.
“재판은 바로 내일이야. 내일까지 쓸데없는 짓 못 하도록 감시해.”
“예.”
“알겠습니다, 아가씨.”
루드비히는 코웃음을 쳤다.
“네놈들 따위가 감히 날……!”
그때였다. 낯선 얼굴을 한 자들의 몸에서 흰빛이 뿜어져 나온 건.
“뭐, 뭐야?!”
그건 신성력이었다.
신성력은 마력과 반발하는 힘이었다. 특히나 신성력은 드래곤에게서 물려받은 마력을 가진 황족들에게는 더더욱 강한 반발력을 발휘한다.
강력한 신성력으로 둘러싸인 루드비히는 경악했다.
“내 힘이! 설마, 신성력? 왜 하인 놈이 신성력을……?!”
그는 자신의 신체 능력이 일반인과 거의 차이가 없는 수준으로 떨어졌음을 깨달았다.
에반젤린은 질질 끌려가는 루드비히를 차가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 뒤로 흰 로브 위로 긴 검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남자, 비오 대주교가 에반젤린의 곁으로 다가왔다.
루드비히를 경멸하듯 바라보던 에반젤린은 표정을 싹 바꿨다. 그리고 다정하고 뿌듯한 미소 가득한 표정으로 비오 대주교를 향해 돌아섰다.
* * *
고소 소식과 함께 루드비히가 주장한 죄목을 듣자니 어이가 없었다.
“불륜이라고? 언제 키엘른 대공이 내 남편이 된 건지 이해 못 하겠군.”
내 옆에 앉아 다리를 모로 꼬고 살기를 풀풀 풍기는 중인 아르파드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를 불륜 혐의로 재판정에 세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여기 있는데.”
고소장을 가지고 온 재판소 소속 상급 서기관은 몸을 떨면서도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좀 더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약혼 기간 동안 비 전하께서 다른 이와 통정하며 약혼의 신의 성실을 위배하였으니, 그에 대한 손해 배상을 요구하겠다는 고소입니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가 참지 못하고 소리 내며 웃자, 서기관은 당황한 듯했다.
귀부인의 명예에 직결된 문제로 고소당하고 웃으니 이상해 보이는 모양이다.
나는 너무 웃어서 눈가에 맺힌 눈물을 장갑 낀 손가락으로 닦으며 말했다.
“너무 황당하고 웃겨서 못 참아 버렸네.”
그때 옆에서 아르파드가 물었다. 이를 가는 듯한 소리가 섞여 서기관이 바짝 어는 게 보였다.
“내 아내가 통정했다는 걸 이유로 고소했다면, 상대 남자가 있겠지. 루드비히는 그게 누구라던가? 혹시 나라던가?”
“그건 아니옵고…….”
서기관의 불편한 시선이 구석을 향했다.
그곳에는 나와 아르파드를 경호하는 황실 기사들이 모여 있었다.
그 사이에 선 벨테인 경의 안색이 흙빛이 되었다. 예상한 바이긴 했다.
‘최근에 돌던 소문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너무 분명했으니까.’
서기관은 모두의 예측대로 대답을 내놨다.
“비 전하를 공작저에서부터 모셔 온 기사인 레누스 벨테인 경입니다.”
나는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
어제 루드비히가 와서 행패를 부렸을 때 나만 들을 수 있도록 작게 속삭인 말, 아니, 협박이 있었으니까.
“잘 생각해. 지금 네가 돌아오면 전부 용서해 줄 수 있어. 하지만 끝까지 나와 싸우겠다면… 넌 부정한 여자가 되어서 모든 걸 다 잃게 될 거야.”
그는 자신이 무슨 짓을 벌일지 대놓고 알려 준 셈이었다.
* * *
재판에 대한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에스피톨라>는 루드비히가 정식으로 고소장을 내자마자, 바로 수도 모든 살롱에 관련 기사를 내보냈다.
이번에는 일어나지 않은 일을 잘못 전한 게 아니었기 때문에, 에스피톨라는 실추되었던 신뢰를 일부 회복할 수 있었다.
덕분에 살롱의 귀족들만이 아니라 젠트리 및 평민들 역시 관련 소문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소문 들었어? 대공이 황태자비를…….”
“잠깐, 그럼 그 소문이 사실이었던 건가?”
“에이, 그건 그냥 소설 얘기 아니야?”
“자네 진짜 소식이 느리구만. ‘기사를 수집하는 귀부인’이 사실 실제 모델이 있다는 소문이 짜하게 퍼졌다고.”
“뭐? 그럼 설마……?”
이런 추문은 사람들이 가장 물고 뜯기 좋아하는 가십이었다.
고귀한 이를 바닥까지 끌어내리는 즐거운 스포츠인 것이다.
힐리아의 권위가 올라간 만큼, 이를 질시하고 끌어내리는 데서 희열을 느끼는 이들도 많았다.
“젠체하는 귀부인들이 애인을 두는 일은 별로 특별할 것 없지 않아?”
“하지만 난 실망이야. 황태자 전하와 잉꼬부부라는 소문을 듣고 얼마나 설렜는데…….”
“그것도 다 거짓인 걸까?”
“그렇다기엔 황태자께서 한눈에 반해서 약탈혼까지 하셨잖아.”
“그럼 황태자 전하만 불쌍하게 된 거지. 약탈혼까지 해서 데려온 신부가 사실은 부정할 수도 있다는 소리 아냐.”
“말 함부로 하지 마!”
갑론을박이 사방에서 벌어졌다.
힐리아를 깎아내리고 싶어 하는 이들과 반대로 편드는 이들이 언쟁을 벌였다.
장소 불문이었다. 귀족들이 모인 살롱은 물론, 최근 들어 유행하기 시작한 커피 하우스도 모자라 거리에서까지 말다툼이 벌어졌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싸움을 붙이고, 이를 퍼뜨리는 움직임도 활발했다.
덕분에 황궁 재판소에서 정식으로 재판이 열리게 된 날, 온 수도의 관심이 그곳에 몰려 있었다.
힐리아는 이 무수한 관심과 난립하는 뜬소문을 밟으며 재판소 안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 * *
“비 전하…….”
애니가 등 뒤에서 울먹이는 소리가 들렸다. 시녀장 뮤젠 공작 부인이 침착하게 묻는다.
“정말 혼자 입장하실 생각입니까? 비 전하의 위엄에 손상이 갈 겁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내 위엄을 보이는 것보다 차라리 동정받는 게 더 나아.”
지금 나는 부정을 의심받고 있는 처지였다.
되도록 치장도 소박하게 하는 게 좋았다. 화려하게 꾸미고 나서면 저들의 눈에 편견을 씌우기 쉬웠으니까.
사치하는 여자는 부정한 여자에게 붙이기 딱 좋은 비난 중 하나였다.
머리에 역시 티아라는커녕 핀 하나 꽂지 않았다.
장신구는 목에 걸고 있는 연수정이 눈에 띄는 목걸이 하나뿐이었다.
그것을 바라보며 웃었다.
‘좋아. 준비는 끝났어.’
나는 시녀들마저 놔둔 채 혼자 재판소로 입장할 예정이었다.
그때였다. 내 손을 잡아당기는 사람이 있었다.
“힐리아.”
고개를 돌리자 아르파드가 거기 있었다.
그와 재판소까지 함께 마차를 타고 오긴 했다.
“입장은 나 혼자 할 거예요.”
내 주장에 아르파드는 별다른 반대를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 아르파드의 차림을 보고 깨달았다.
아까까지 평소처럼 붉은 망토를 두르고 있어서 미처 몰랐는데, 지금 아르파드는 검은색의 소박한 차림새였다.
마치 나와 맞춘 것처럼.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 혼자 가도 충분해요.”
아르파드는 내 손목을 쥔 손에서 힘을 빼지 않으며, 낮은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이런 모욕적인 곳에 그대 혼자 들어가게 둘 순 없어.”
어쩐지 가슴이 저릿하게 하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