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나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아르파드는 재촉하지 않았다. 다만 더없이 다정한 눈빛으로 내 말을 기다릴 뿐.
다시 심장이 정신을 놓고 쿵쿵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아르파드에게 잠시 넋을 놓을 뻔한 것을 잡아 준 건 놀랍게도 루드비히였다.
“흐…리아, 힐리아!”
살다 보니 루드비히가 도움이 될 때가 있다니. 놀라워라.
아르파드의 뒤를 따라온 기사들이 루드비히를 끌어내기 시작했다.
덕분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 연기를 계속할 수 있었다.
질질 끌려가는 루드비히가 잘 들을 수 있도록.
“…몇 번이라도 다시 말씀해 드릴 수 있어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제가 사랑하게 되는 건 당신일 테니까요. 아르파드.”
순간 아르파드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를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내 말이 전부 연기라는 걸.
그럼에도 그는…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거짓이라도 이 말을 들은 것 자체가 기쁜 것처럼.
‘말도 안 돼. 그러면, 그러면… 꼭 아르파드가 날… 좋아하기라도 하는 것 같잖아.’
스스로 떠올린 생각에 나는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잖은가. 아르파드에게는 곧 연인이 생길……….
그 시점에서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회귀 전 아르파드에게 연인이 있었다는 게 진짜일까?’
세 번의 회귀를 경험했지만, 단 한 번도 아르파드의 연인이라는 존재의 실체를 본 적은 없었다.
그저 소문만 들었을 뿐.
황제 역시 이를 언급했었기에 나는 당연한 사실이라고만 생각했다.
내가 몇 번인가 연인의 가능성을 언급했을 때 아르파드가 한 말도 떠올랐다.
“애인이라니. 몇 번이나 말했지만, 나에겐 애인이 없어. 아내뿐이지.”
그때 아르파드는 조금 상처받은 티마저 냈었다.
그렇게 자신을 믿지 못하냐고.
만일 회귀 전 아르파드에게 연인이 있었던 게 사실이 아니라면…….
아니, 설사 있었다 하더라도 다시 그 인연이 맺어질 거라는 보장이 어디 있을까.
적어도 아르파드 본인은 그럴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아는 아르파드는 빈말할 성격이 아니다.
사실 지금까지 나는 아르파드가 노골적으로 내보이는 몇몇 신호를 의도적으로 모른 척했다.
그에겐 다른 연인이 생길 테니까. 그때 가서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회귀를 몇 번이나 반복하는 와중에 나는 치열하게 싸우고 저항해 왔다.
그러면서도 내 태도의 기반에는 어느 정도 포기와 체념이 깔려 있었던 모양이다.
아르파드에게 언젠가 연인이 생길 테니까, 라는 이유로 그가 노골적으로 보여 주는 모든 호감의 표시를 모른 척하고 있었던 것이 그 증거였다.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일, 정말로, 이 남자가 진심이라면, 그렇다면……?’
조금은 용기를 내도 좋지 않을까.
* * *
루드비히가 끌려 나가고 난 뒤.
황태자궁의 궁의가 불려와 부상당한 벨테인 경을 돌봤다.
아르파드에 비할 수는 없었지만, 루드비히 역시 일반인과는 차원이 다른 힘을 가지고 있었다.
맨손으로 갑옷을 우그러뜨릴 수 있을 정도의 수준.
벨테인 경은 새삼스레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자괴감을 더 깊게 한 건 힐리아를 먼저 돌려보낸 아르파드가 남긴 한 마디였다.
“주제도 모르고 기사의 맹세를 바쳤으면, 그 대상의 앞에 루드비히 따위 놈이 접근하지 못하게 했어야지. 쓸모가 없군.”
벨테인 경은 치료받다가 자세를 바꾸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옳은 비난이었기 때문이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아르파드의 빈정거림은 계속 이어졌다.
“마음 약한 내 아내를 더 걱정시키지 말고 치료나 제대로 받도록.”
휙 돌아 나가며 아르파드가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벨테인 경은 들을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뮤젠 가의 애송이가 있는 게 낫겠군. 적어도 힐리아의 바로 앞까지 루드비히 놈이 범하게 만들진 않았을 테니.”
얼마 전에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젊은 기사.
그 역시 힐리아에게 기사의 맹세를 바친 자였다.
아르파드는 두 기사를 모두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티를 노골적으로 냈다.
그럼에도 차라리 실력이 나은 아론 뮤젠이 낫겠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기사 레누스 벨테인은 이를 악물었다.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 상처가 났으나, 아픔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는 아르파드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무릎을 꿇은 그대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 * *
비참함만을 곱씹으며 돌아온 루드비히의 꼴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팔이 퉁퉁 부은 데다 시퍼렇게 멍까지 들어 있었다.
에반젤린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당일까지 절대 움직이지 말라던 내 말을 무시하고 황궁으로는 왜 간 거야? 게다가 그 꼴은…….”
드래곤의 혈통이 가지는 재생력은 루드비히에게도 유효했다.
덕분에 부러졌던 뼈가 빠르게 붙고 있어 루드비히는 다쳤던 팔을 그대로 흔들어 에반젤린을 막았다.
“네가 신경 쓸 일 아니야, 에바.”
“어떻게 신경을 안 써! 네가 황태자궁으로 쪼르르 달려갔다는 걸 들었는데!”
루드비히는 불처럼 분노했다.
“너, 날 감시했나?!”
“황궁 안에는 아직 나와 어머니의 사람들이 많아. 네가 황궁에서 일을 벌이면 당연히 내 귀에 들어온다는 것도 알아야지.”
에반젤린은 히스테릭하게 물었다.
“힐리아를 만나서 뭘 어쩐 거야?”
그러자 루드비히가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물었다.
“아, 불안해서 그런 거야? 내가 힐리아에게 돌아갈까 봐?”
에반젤린의 미간이 구겨졌다.
“너무 질투하지 마. 그 여자를 꼬드겨서 아르파드 놈과 갈라놓으려고 한 거지, 진심은 아니었으니까.”
자기 입으로 다시 힐리아에게 매달리러 갔다고 실토하는 셈이다.
에반젤린은 새삼 분노와 혐오감에 휩싸였다.
‘진짜 왜 이따위 놈이 원작 남주인공인 거지? 그것만 아니었으면 내가 몇 년이나 이 인간에게 시간을 낭비할 이유도 없었을 텐데.’
그랬다면, 처음부터 자신의 감정대로 행동할 수 있었더라면.
그렇다면 아르파드는 지금쯤…….
이런 생각이 안 들 수 없었다.
‘차라리 회귀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야.’
그렇다고 정말 시간이 되돌아가 주는 일 따위는 없었다.
“그런 건 알 바 아니고, 설마 힐리아에게 우리 계획에 대해 미리 말한 건 아니겠지?”
“…당연하지. 내가 왜 그러겠어?”
평소에도 그다지 믿음이 가는 남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순간에는 정말 손톱만큼의 신뢰도 가지 않았다.
“내가 진심으로 아르파드 놈에게 간 여자에게 미련이 있는 거겠어? 너무 불안해하지 말라고, 응?”
루드비히가 멋대로 떠드는 걸 한 귀로 흘리고, 에반젤린은 한 가지만을 단속한 뒤 대공저를 나섰다.
“잊지 마. 다음 주야. 그때까지는 최대한 조용히 있어.”
* * *
주신전의 대주교 비오는 의외의 손님을 맞았다.
“이런, 루스 후작 영애께서 저를 만나고 싶어 하실 줄은 몰랐군요.”
에반젤린은 뒤돌아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천신의 빛살이 대주교께 내리기를. 오랜만에 뵈어요, 대주교님.”
“몇 년 전에는 소녀셨는데, 이제는 누가 봐도 우아한 숙녀이십니다.”
“대주교님은 몇 년이 지나도 전혀 나이를 안 먹으시는 것 같아요.”
에반젤린은 부드럽게 웃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만일 정말로 힐리아도 빙의자라면 준비를 더 철저히 해야 해. 이번 일이 실패할 경우까지 미리 대비해 두어야 해.’
특히나 루드비히의 꼴을 보고 오니 더더욱 그냥 손 놓고 있을 수 없었다.
에반젤린은 준비해 온 선물을 꺼내어 대주교의 앞에 들이밀었다.
“저는 대주교님께서 원하시는 궁극적인 목표를 잘 알고 있어요.”
비오 대주교의 얼굴에 경계심이 어렸다.
에반젤린은 들고 온 상자를 열어 대주교 앞에 보여 주며 말했다.
“이것, 찾고 계셨죠? 다섯 여신의 신물 중 하나, 데스포이나의 열매랍니다.”
섬세한 덩굴 문양의 금속 장식으로 감싸인 초록색의 둥근 보석이 대주교의 눈을 사로잡았다.
“이것을 어떻게……?”
대주교는 더더욱 강한 경계심 어린 눈으로 에반젤린을 노려봤다.
“게다가 내가 이걸 찾고 있다는 걸 당신이 어떻게 아는 겁니까?”
에반젤린은 자신만만하게 미소 지었다.
“이미 말씀드렸잖아요. 이것만이 아니라 대주교님이 바라는 진짜 목적도 알고 있다고요.”
에반젤린은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신권이 바닥을 기고, 신의 피조물인 드래곤의 혈통이 더더욱 강한 권위를 가진 현실을 바꾸고 싶지 않으신가요?”
“…!”
에반젤린은 대주교가 제안을 거절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지금부터는 빙의자가 본격적으로 활동해야 할 시간이었다.
그리고 다음 주, 루드비히는 황실 재판소에 고소장을 제출했다.
피고는 바로 힐리아 델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