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
과연 이건 예상 못 했다. 너무 황당해서 말문이 막혀 버렸다.
떠오르는 생각은 당연히 하나뿐이었다.
‘뭐라는 거야. 이 미친놈이.’
하지만 내 침묵을 루드비히는 이상하게 해석한 모양이다.
“그래, 너도 감동한 모양이군. 내가 이렇게까지 널 생각할 줄은 몰랐을 테니까.”
X소리를 지껄이면서 루드비히는 성큼 내게 가까이 다가오려 했다.
그러자 내 바로 뒤를 지키고 있던 벨테인 경이 앞으로 나섰다.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네놈!”
루드비히의 적갈색 눈동자가 불을 뿜었다.
“너 따위가 감히……!”
갑주로 감싸인 벨테인 경의 팔이 내 앞을 막아섰다.
“비 전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이만 돌아가십시오, 대공 전하.”
“닥치지 못해?! 너 따위가 감히 내 앞을 막아?”
루드비히의 안광에서 위험한 빛이 번뜩였다.
아무리 그가 황족의 피가 옅다고 해도 그 역시 드래곤의 혈통을 이은 자였다.
퍽!
“커헉!”
루드비히가 휘두른 주먹에 벨테인 경의 가슴을 가린 갑주가 푹 패였다.
“꺼져! 나는 힐리아와 직접 대화를 나누겠다!”
벨테인 경은 신음을 흘리면서도 내 앞에서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루드비히는 물불을 가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곳이 황궁임을 잊은 것처럼.
그는 벨테인 경의 팔을 잡아챈 다음, 괴력으로 그를 바닥에 메다꽂았다.
쾅!
큰 소리가 귀를 두드렸다. 나는 놀라고 걱정스러운 마음에 소리를 질렀다.
“벨테인 경!”
소란 끝에 루드비히는 드디어 나와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애니가 내 앞을 막으려 했으나, 당연히 루드비히에게 상대가 될 리 없었다.
“꺄악!!”
뮤젠 공작 부인이 경악 어린 비명을 내질렀다.
“경비병! 어서 비 전하를 보호해!”
소란 끝에 루드비히는 드디어 나와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 찰나.
나는 차갑게 웃으며 엄지와 검지를 빠르게 세 번 딱딱 소리가 나도록 부딪쳤다.
그러자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 중 하나가 눈부신 빛을 뿌리는 마력 방어막을 내 앞에 펼쳤다.
꽤 강력한 마력을 일시에 퍼부은 것이라 루드비히는 그대로 뒤로 밀려났다.
“큭!”
나는 최선을 다해 얼굴에 강렬한 비웃음을 띠웠다.
보는 것만으로도 모욕감을 느끼고, 분노하도록.
“예상했지만 정말로 무례하군, 키엘른 대공.”
“…뭐?”
예상 못 한 내 말투에 루드비히의 얼굴에 당혹감이 번졌다. 내 이런 태도는 상상도 못 했다는 듯한 반응이다.
그래, 내가 그를 하대할 거라고는 말이다.
“그대는 아직도 자신이 내 약혼자라고 착각하고 있을 만큼 멍청한 듯해서, 굳이 다시 설명하는 수고를 무릅쓰도록 하지.”
내 말투는 당연히 아르파드를 따라 한 것이다.
아는 사람의 말투 중 듣는 사람을 제일 화나게 만드는데 특화된 말투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루드비히는 아르파드에게 꽤 오랜 자격지심과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더 화가 나겠지.’
“정식 알현 요청도 없었고, 예의를 갖추긴커녕 내 기사를 다치게 하고, 나를 위협하려 했지. 이것만으로도 반역 혐의를 주기에 충분해.”
“반역이라니!”
나는 조금 전 방어 마법구의 사용 때문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정리하며 대꾸했다.
“보통 황족을 위협하려다 황실 기사를 다치게 한 짓을 반역이라고 하지 않나?”
“나 역시 황족이야!”
“하지만 나는 황태자비이지. 너는 그저 방계일 뿐이고.”
나는 자애로운 척 미소를 지었다.
“반역자 취급당하고 싶지 않으면, 지금부터라도 예의를 제대로 차리고 사죄라도 하던가.”
한 마디로 이거다.
‘지금 무릎 꿇고 빌어. 그러면 봐줄게.’
당연히 루드비히가 받아들일 수 있을 리 없다.
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당장에라도 다시 나에게 달려들어 폭력을 행사하기라도 할 듯한 태도.
하지만 놀랍게도 루드비히는 곧 평정을 되찾았다.
정말 드문 상황이었다.
내가 아는 루드비히는 내 앞에서 화를 참은 적 없었으니까.
그는 능글맞게 웃으며 나를 달래려 들었다.
“그래, 알겠어. 내게 많이 서운했구나, 힐리아.”
“뭐라는 거야?”
순간적으로 생각보다 말이 먼저 나왔다.
너무 역겹고 짜증 나서, 청각을 의심하게 되는 말.
루드비히는 그 끔찍한 말들을 줄줄이 이어 가고 있었다.
“네가 오해하고 실망해서 토라진 건 나도 이해해. 네가 오해할 만했으니까. 하지만 재판까지 걸어서 날 빈털터리로 만들려 하는 건 너무했어.”
지금 나는 루드비히의 델핀 가의 재산과 영지에 대한 횡령 혐의로 재판을 거는 중이었다.
그 대가로 루드비히의 영지와 재산에 대한 압류를 걸기 위해.
루드비히는 그걸 막기 위해 온 모양이다.
“내 주의를 끌고 싶었던 거라면, 그래, 인정할게. 성공했어. 아니, 네가 이겼어, 힐리아.”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날 이렇게 불러들이는 데에 성공했으니까.”
손끝까지 의미 불명의 자신감과 자기애가 가득 차 있어서 보기 역겨웠다.
“네가 결국 이렇게 나를 보러 왔다는 건, 너도 미련이 있다는 거잖아. 안 그래?”
어이가 없어 입이 저절로 다물려졌다.
“정말 나에게 아무 생각이 없었다면 그냥 무시하면 그만이었어. 하지만 넌 그러지 않았지.”
맞는 말이긴 했다. 그러니 뮤젠 공작 부인도 나에게 루드비히를 그냥 돌려보내라 경고한 걸 테고.
루드비히는 짐짓 어쩔 수 없이 져 주는 연인이라도 된 듯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지금이라도 함께 돌아가자. 비틀린 것들을 전부 제자리로 돌려놓는 거야.”
“제자리로, 돌려?”
루드비히는 환하게 웃었다. 내가 거절할 건 절대 생각도 못 한다는 듯이.
“그래. 네가 돌아오면 에반젤린과 다시는 만나지 않겠어.”
나는 눈을 번뜩였다.
방금 루드비히는 자기 입으로 반쯤 에반젤린과의 관계를 시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흘긋 내 목에 걸린 목걸이를 내려 봤다.
커다란 연수정이 달랑거리고 있는 목걸이.
흐릿한 빛이 다시 번진다. 잘 작동하고 있는 거다.
‘루드비히가 찾아오면 이걸 쓸 일이 있지 않을까 했는데… 정말로 그렇게 되는군.’
나는 하려던 말을 살짝 틀었다.
“당신 말만 들으면, 내가 에반젤린 때문에 당신에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처럼 들리는데요?”
일부러 말투를 바꿨다. 조금 전 루드비히를 분노하게 하고 모욕하려던 아르파드를 따라 한 어조가 아니다.
약혼자 시절, 일상적으로 쓰던 어조.
루드비히의 안광이 번뜩였다. 그도 눈치챈 것이다.
내가 의도적으로 보여 준 태도 변화를.
그는 그걸 물고 늘어졌다.
“그렇잖아. 아니야? 내가 화내고 질투해서 당신을 다시 보길 바라서 그런 거잖아.”
아르파드와 내 약탈혼을 그렇게 해석하는 인간은 루드비히밖에 없을 거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은 건가.
그래서 지금에라도 어떻게든 되돌릴 수 있을 거라고?
어이없고 분노가 치밀어 온몸의 피가 식는 듯한 기분이었다.
입을 다물고 있는 내 침묵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루드비히는 더욱 노골적으로 나를 달래고 꼬드기려 들었다.
“걱정 마. 이제 에반젤린과는 끝냈어. 너만 돌아오면 돼. 그러면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 있어.”
내 입가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이건 100% 진심에서 나온 거였다.
내 환한 미소에 루드비히가 희색을 띤다. 빼앗겼던 희망을 되찾은 듯한 미소였다.
그걸 정면에서 박살 내 주었다.
“내가 미치지도 않았는데, 왜 그래야 하죠?”
“…뭐?”
내 상냥하고 다정한 미소에 잔뜩 부풀었던 루드비히의 희망은 펑 하고 터져 버린 모양이다.
“하지만, 방금! 분명히……!”
나는 차갑게 웃으며 다시 태도를 바꿨다. 그리고 옆에 있는 뮤젠 공작 부인에게 물었다.
“공작 부인. 내가 누구지?”
그녀는 상황을 눈치채고 빠르게 내 앞에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제국의 유일한 황태자비 전하. 지금은 백금 열쇠를 맡으신 내궁의 관리자이십니다.”
루드비히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쭉 훑어보며 노골적으로 혐오와 경멸을 드러냈다.
“그런데 이제 영지도 작위도 유명무실해진 남자에게 내가 왜 가야 한다고 말하는 거지? 이해할 수 없어.”
“너는, 너는 내 여자였어!”
“아니. 나는 한순간도 네 여자였던 적이 없어. 네 여자는 에반젤린이었겠지.”
나는 넋이 나간 루드비히를 놔둔 채, 곁방으로 이어지는 통로로 다가갔다.
그때였다. 분노로 가득 찬 루드비히가 나에게 달려들었다.
문을 여는 데 주의가 쏠려 있어 조금 전처럼 때맞춰 마법 방어구를 발동하지 못했다.
“윽!”
그는 내 손목을 잡아챈 다음, 귓가에 우악스러운 말을 쑤셔 넣었다.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힐리아. 말했잖아. 난 너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러 온 거라고.”
난 침이라도 뱉고 싶은 표정으로 루드비히를 노려봤다.
“그딴 기회도, 너도, 줘도 안 가져.”
그러자 루드비히는 더더욱 격렬하고 노골적인 표현을 써서 나에게 협박의 말을 속삭였다.
“————————.”
이건 주변 누구도 듣지 못하도록 일부러 낮춘 목소리였다.
그 말을 듣는 내내 나는 목걸이를 살피고 있었다.
‘좋아. 잘 작동했군.’
그렇다면 ‘증거’ 역시 확실하게 확보된 셈이다. 굳었던 표정을 풀며 나는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낮게 혀를 찼다.
“?”
루드비히는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고 의아해했다.
그 순간.
쿵! 내가 열려던 곁방의 문이 저절로 열렸다.
그리고 그 문을 통해 바람처럼 달려온 이가 루드비히의 손목을 잡아챘다.
내 손목을 잡고 있는 바로 그 손을.
뿌득!
뼈가 부서질 듯 섬뜩한 소음과 함께 차가운 살기 가득한 아르파드의 목소리가 바닥에 내리깔렸다.
“감히 또 내 아내에게 손을 댄 거냐, 루드비히?”
“크흑!”
“역시 이딴 더러운 손가락 따윈 아예 쓰지 못하게 만들어 주는 게 낫겠어.”
“끄아악!”
고통 어린 신음이 루드비히의 잇새로 쥐어짜였다.
아르파드는 진심 어린 살기를 내뿜고 있었고, 그건 같은 드래곤의 혈통을 물려받은 루드비히도 견디기 힘든 수준이었다.
애니나 공작 부인 같은 단련하지 않은 여성들은 심장을 부여잡고 주저앉을 정도였다.
나는 아르파드를 말렸다.
“그만하세요!”
나는 손을 뻗어 아르파드의 망토를 잡아당겼다.
절대 루드비히 놈을 걱정해서 말리는 게 아니라고 알려 주고 싶었기 때문에 바로 이어 설명했다.
“시녀들이 기절하겠어요. 그만하세요.”
심사가 더 뒤틀리려던 아르파드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그리고 나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확인했다.
“증거 확보 잘했나?”
“네. 완벽히요.”
그것 때문에 아르파드가 곁방에서 대기 중인데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있었던 거니까 말이다.
루드비히가 왔다는 말을 듣고 달려온 아르파드는 자신이 지키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그와 만나게 놔두지 않겠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곁방에서 아르파드가 대기하고, 내가 방어용 마도구를 충분히 두른 뒤에 루드비히를 만나기로 했다.
나는 목걸이를 매만졌다.
‘전부 이걸 위해서였지.’
아르파드는 이를 드러낸 채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바닥에 내팽개친 제 사촌을 향해.
“이렇게 찾아와 행패를 부릴 정도로 네가 잃은 이에 대한 미련을 죽어도 못 놓겠나?”
아르파드는 대놓고 루드비히를 비웃었다.
“그럼 좀 잘해 주지 그랬나, 응?”
이건 좀 통쾌한 말이었다. 나는 아르파드의 어깨를 매만지며 고개를 저었다.
“소용없어요, 아르파드.”
“어째서, 힐리아?”
아르파드와 루드비히의 시선이 동시에 나를 향했다.
어떤 대답이 나올지 기대와 두려움이 뒤범벅된 시선.
“누가 나에게 아무리 다정하게 대했다 하더라도, 결국 나는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을 테니까요.”
아르파드와 루드비히의 표정이 동시에 굳었다.
* * *
아르파드는 알고 있었다.
힐리아가 자신에게 보이는 미소와 자연스러운 스킨십, 그리고 부끄러운 말들은 전부 계산되었다는 것을.
저 말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럼에도… 다 알면서도, 아르파드는 심장이 녹아내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래서였다. 굳이 불필요한 말을 덧붙인 건.
“당신의 그 말이 나에게 얼마나 달콤하고 기쁜지 모를 거야.”
그러자 힐리아는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아르파드는 사심을 조금 더 채우기로 했다.
“한 번만 더 말해 줘.”
힐리아의 눈이 경악으로 둥그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