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에반젤린은 손에 들고 있던 다음 주 발간 예정인 <에스피톨라> 지(紙)를 화장대 위로 던졌다.
그 1면에는 이런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의혹은 사실이었나? 황태자비에게 사실은…….
-황실의 추문, 진짜 피해자는 누구였나?
준비는 모두 끝나 있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불안한 이유는 역시 하나였다.
‘역시 힐리아도 빙의자인 건가?’
공작 부인의 일만이 아니었다.
아론 뮤젠이 힐리아의 앞에서 소드 마스터가 되고, 기사의 맹세를 바쳤다 한다.
‘뮤젠 소공작이 원작보다 훨씬 빠르게 소드 마스터가 되었어.’
이게 정말 우연일 수 있을까?
에반젤린은 힐리아와 루드비히의 결혼식 전날 일을 떠올렸다.
루드비히의 앞에서 울면서 힐리아가 했던 말이 귓가에 쟁쟁히 울린다.
“누가 우리 결혼을 방해하고 싶은 게 아닐까요? 저를 미워하고, 우리의 행복을 깨뜨리고 싶은 사람이 근처에 있는 것 같아서 무서워요.”
힐리아의 말은 에반젤린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때부터였다. 힐리아의 태도와 말투, 행보가 완전히 바뀐 건.
‘그러고 보면, 그때 내 방에서 힐리아의 웨딩드레스를 망친 페이퍼 나이프도 발견되었지.’
분명히 에반젤린은 드레스를 망친 적도, 이를 사주한 적도 없었다.
그렇다면 그 일을 꾸미기 가장 쉬운 사람은 누구일까?
‘드레스 주인이자, 계속 옆에 있었던 당사자…….’
이제 와 생각하면 너무 늦게 깨달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지난 몇 년간 에반젤린은 힐리아를 충분히 관찰하고 알고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방심해 버린 것이다.
멍청한 힐리아가 그런 일을 벌일 담력이나 머리가 있을 리 없다고. 지나치게 얕잡아 봤다.
입궁 때 과시하듯 아르파드의 품에 안겨 자신을 노려보던 힐리아의 보랏빛 눈동자가 떠올랐다.
때늦은 서늘함이 얼음을 삼킨 듯 치솟는다.
그녀가 아는 힐리아가 그런 눈빛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나?
아니라는 대답밖에 안 나왔다.
결론은 하나였다.
지금의 힐리아는 그녀가 알던 이와 다르다.
등골이 오싹해졌다.
힐리아는 원작 여주인공이다. 그런 그녀가 빙의자라면?
게다가 에반젤린은 빙의자이긴 해도 원작 내용을 전부 알진 못했다.
만일 빙의자이기까지 한 힐리아가 그녀보다 원작에 대해 잘 안다면…….
‘내가… 이길 수 있을까?’
자신이 정말 진짜 여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
암담한 가능성만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웃기지 마! 그게 아니라면 내가 이 세계에 빙의할 이유가 없잖아?’
에반젤린은 자신이 이 세상에 온 건 우연이 아니라고 믿었다.
이 세계에 빙의하기 전, 그녀는 비참하게 삶을 마감해야 했다.
그저 반 친구들 사이의 가벼운 갈등이 있었던 것뿐이다.
일방적인 괴롭힘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녀에겐 그게 진실이었다.
그런데 그 별것도 아닌 일로 상대가 자살 시도를 했다는 사실 때문에 그녀는 일방적인 가해자가 되었다.
퇴학당하고 집에서도 경원시 당하면서 방에만 숨어 지내야 했다.
방에 틀어박힌 채 닥치는 대로 드라마와 영화를 보고, 소설을 읽으며 시간을 죽였다.
조금만 마음에 안 들면 험한 리플을 남기며 스트레스를 풀기도 했다.
원작을 본 건 그러던 와중이었다.
그리고 약 5년 전, 병에 걸려 죽고 에반젤린의 몸에 빙의한 것을 깨달았을 때.
처음에는 기뻐했다.
새로 시작할 기회를 얻은 거니까.
하지만 자신이 어떤 역할에 빙의한 것인지 깨닫고는 분노했다.
“책 빙의라면 여주인공에 해야 하는 거 아냐? 왜 내가 악녀에 빙의한 건데?”
억울했다. 분노가 치밀었다.
“그러면 내가 빙의한 이유가 대체 뭐야? 의미가 뭐냐고?!”
“전생에도 악당이라고 욕먹다가 비참하게 죽었는데, 이번에도 그러라고?”
여주인공이 행복해지는 걸 악녀로서 지켜보라는 건가?
“이건 불공평해!”
분노하고 슬퍼하던 에반젤린의 머릿속에 번개가 내려친 듯했다.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서 속삭이는 것 같았다.
“네 손으로 쟁취하면 그만 아니야? 결국 이기는 사람이 진짜 주인공이 되는 거라고.”
“네가 현실에서 지고, 결국 악역이 된 것처럼 말이야.”
그건 ‘자신’의 목소리였다.
전생의 자신, ‘유신아’의 목소리.
에반젤린은 다시 한번 그때의 다짐을 반복해서 읊었다.
“그래. 진짜 여주인공은 나야. 내가 될 거야.”
자신은 그러기 위해 빙의한 것이니까.
그게 아니라면 전생의 죽음도, 지금의 두 번째 삶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에반젤린은 루스 후작저 자신의 침실에서 거울을 보며 혼자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때였다. 그녀의 사색을 방해하는 소란이 인 건.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다급한 부름이 들려왔다.
“아가씨! 아가씨!”
“뭐야?! 방해하지 말라고 했잖아!”
에반젤린은 문도 열어 주지 않고 바락 외쳤다.
하지만 이어진 말에는 짜증만 내고 있을 수 없었다.
“대공 전하께서 갑자기 사라지셨습니다!”
현재 대공저에 있는 루드비히는 에반젤린의 수하들이 철저히 감시하고 있었다.
에반젤린은 수하들에게 루드비히의 행적을 놓치지 말라고 신신당부해 둔 상태였다.
다음 주에 루드비히가 쓰일 중요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문을 쾅 소리 나도록 열며 외쳤다.
“그래서 루드비히의 종적을 놓쳤다는 거냐?!”
“그게…….”
“제대로 말해!”
“마지막으로 그분을 목격한 곳이… 황궁이라 합니다.”
“…뭐라고?!”
* * *
나는 귀를 의심했다. 방금 들은 말이 맞나?
내 생각이 표정에서 다 드러난 모양이다. 아니면 소식을 전한 애니 역시 나와 이심전심이라 그런가. 기다렸다는 듯 이런 말이 나온다.
“역시 바로 쫓아내야겠죠?”
“…흐음.”
얼마 전 시녀장으로 임명된 뮤젠 공작 부인이 조심스레 조언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안 만나시고, 돌려보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시녀장의 우려 가득한 표정을 보면 역시 요즘 시중에 도는 묘한 소문을 의식한 듯했다.
그녀는 나에게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어 진언했다.
“그리고… 전하께서 친정에서 데려온 기사 말입니다.”
“벨테인 경 말인가요?”
“예, 한동안 좀 떨어진 곳으로 보내 두심이 어떨까요?”
나는 고개를 돌려 대놓고 물었다.
“내 시녀장은 얼토당토않은 소설에 붙은 뜬소문을 믿는 걸까요?”
“그럴 리 없지요. 저는 전하를 바로 곁에서 지켜보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공작 부인은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구설수는 최대한 피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전하.”
그녀가 뭘 가장 걱정하는 건지 알만했다.
“왜요? 황태자 전하의 귀에 소문이 들어갈까 봐 저어되시나요?”
“아무래도…….”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그야 그러시겠지만…….”
이어진 내 말은 공작 부인의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던 모양이다.
“이미 알고 있으니까.”
“네?!”
공작 부인의 파란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황태자 전하께서 그런 뜬소문에 흔들리실 리 없잖아요?”
“제가 괜한 걱정을 한 모양이군요. 하긴, 두 분의 금실이 그렇게 좋으신데…….”
내 자신감 넘치는 웃음에 뮤젠 공작 부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공작 부인이 저렇게 걱정하며 말리려 한 이유는 간단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사전 약속이나 요청도 없이 갑자기 황태자궁으로 찾아와 만나 달라고 행패를 부리고 있는 이는…….
바로 루드비히였으니까.
루드비히가 갑자기 튀어나왔다…라.
대공저에 심어 둔 세작들의 보고를 보면, 루드비히와 에반젤린이 함께 작당하고 있는 건 분명했다.
어쩌면 이번 만남은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루드비히에게서 에반젤린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좀 더 캐낼 수 있겠어.’
그게 아니라도 개인적인 심술도 조금 있었다.
이미 루드비히에게 꽤 망신을 주고 보복하긴 했다.
하지만 부족했다.
지난 세 번의 삶에서 루드비히에게 당했던 모욕과 고통이 아직도 선명했다.
조금 더 분풀이하고 싶었다. 이런 대답을 한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만나 보도록 하지.”
“비 전하!”
공작 부인은 결국 내 뜻을 꺾지 못했다.
* * *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준비도 없이 루드비히를 만날 생각은 당연히 없었다.
각종 지시를 내리고 필요한 것들을 가져오게 하다 보니 한 시간 가까이 흘렀다.
그동안 루드비히는 응접실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꽤 떨어져 있는 곳까지 소리가 들릴 정도로.
‘이젠 체면이고 뭐고 다 버렸구나.’
이 자체가 루드비히가 얼마나 궁지에 몰려 있는지를 보여 주는 것 같아 조금 통쾌했다.
나는 목에 건 투명한 수정 목걸이를 매만졌다.
은으로 된 사슬 가운데 유달리 커다란 연수정이 매달렸다. 이 연수정을 건드리자 흐릿한 빛이 목걸이에 잠시 감돌았다가 사라졌다.
연달아 팔찌와 반지 중 특정 물건들 역시 버튼을 건드려 확인했다. 모두 이상 없이 작동하는 것을.
‘좋아. 전부 잘 작동하는군.’
확인을 마친 뒤 나는 응접실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곳에는 루드비히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야 보게 되는군.”
그는 낯선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루드비히가 원수를 보듯 나를 노려보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세상에서 가장 탐나는 보물을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어느 쪽이든 나에겐 심히 불쾌한 것이었다. 나는 딱딱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어쨌건 남편의 사촌이니 돌아가시라는 말도 직접 전하는 게 나을 거라 생각했으니까요.”
그러자 루드비히가 이를 갈며 나에게 외쳤다.
“나는 네게 마지막 기회를 주러 온 거야, 힐리아.”
“무슨 기회?”
“아직 늦지 않았어. 지금이라도 돌아와. 그러면 용서해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