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힐리아는 의아해하면서도 일단 주는 대로 받아먹었다.
계속 아르파드가 ‘내기에 져 놓고 약속은 안 지키려고?’ 하고 도발했기 때문도 있었다.
게다가.
‘이상하게 다정하고 부드러운 태도라서 매정하게 거부하기가 꺼려진단 말이지.’
아르파드와 금실이 좋아 보이는 건 외부에 잘 보일 필요가 있기도 하다.
‘특히 에반젤린이 음모를 꾸미고 있는 지금은 더욱더.’
힐리아는 흘긋 눈을 굴려 <에스피톨라>에 그려진 삽화를 보았다.
기사와 다정한 한때를 보내다 남편에게 들킨 귀부인의 모습.
‘어떤 방향에서 공격해 올지 짐작이 가니까 말이야.’
그때였다. 아르파드가 당혹감과 난처함이 섞인 침음을 흘렸다.
“음.”
“?”
힐리아는 놀라서 눈을 돌렸다. 그리고 보고 말았다.
“이런…….”
살구를 자르다가 흐른 과즙이 아르파드의 길고 예쁜 손가락을 타고 흐르는 걸.
옅은 붉은빛을 띤 액체와 흰 피부의 대조가 유달리 도드라졌다.
희고 길쭉한 손끝에 맺힌 붉은 액체.
그걸 핥는 혀.
“…!”
힐리아는 몇 박자 늦게 상황을 눈치챘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아르파드가 과즙으로 젖은 제 손가락을 핥았다.
다시 한번 강조하듯 붉은 혀가 과즙으로 젖은 하얀 손가락을 몇 번 더 핥았다.
화르륵! 힐리아는 얼굴이 불타는 듯 뜨거워진 걸 느꼈다.
‘뭐, 뭐, 뭐야? 이게… 왜, 왜, 왜 이렇게 야하게 보이지……?’
그냥 남자가 칠칠치 못하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비인간적인 미모와 그의 필사적인 진한 눈빛이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힐리아는 못박인 듯 아르파드에게 시선이 붙잡혔다.
위험할 정도로 낮은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달군.”
“…!”
잠시 놀라서 입을 뻐끔거리던 힐리아는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홀린 듯 보고 있다가 그의 목소리에 겨우 정신이 돌아온 것이다.
서둘러 자신 몫의 냅킨을 아르파드에게 건네주었다.
이상할 정도로 야해 보이는 광경을 어떻게든 가리고 싶어서 한 대응이었다.
“이, 입에도 묻었어요. 이걸로 닦아요.”
그러자 아르파드는 고개를 쓱 내밀었다.
“닦아 줘.”
숨결이 솜털 위로 닿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단숨에 가까워졌다.
“…!”
힐리아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조, 조금 뒤로 가요! 그래야 닦아 주지!”
“알았어.”
아르파드는 안 어울리게 충견처럼 순순히 힐리아의 말을 따랐다.
쿵, 쿵, 쿵! 두근거림이 세차게 귀를 두드렸다. 마치 북소리 같았다.
‘놀라서 그래. 놀라서. 그냥 그것뿐이야.’
지금 상황은 드래곤이 사람 앞에서 배를 드러내며 애교를 부리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있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의미다.
원래 맹수가 갑자기 다가오거나 애교를 부리면 사람은 당황하기 마련 아닌가.
그러니까 자신이 놀라는 것도 당연하다.
‘설레거나 한 게 절대로 아냐!’
힐리아는 그렇게 자신을 합리화하며 냅킨을 살살 움직였다.
평소였다면 아르파드가 닦아 달란다고 진짜 닦아 줬을 리 없었다.
‘당신은 손이 없냐 발이 없냐 그랬겠지.’
아르파드는 피식 웃었다. 그도 눈치챈 걸 힐리아는 깨달을 정신이 없었다.
살금살금 움직이던 흰 천 끝이 아르파드의 입술을 스쳤을 때 힐리아는 저도 모르게 파드득 놀라고 말았다.
아르파드가 손을 뻗어 힐리아의 손등을 제 손으로 눌렀다. 냅킨을 든 힐리아의 손이 떨어지지 않도록.
“왜 그래, 힐리아?”
우아한 눈매가 가늘게 휘었다. 붉은 눈동자가 유달리 날카로워 보였다.
“뭔가 이상하기라도 하나?”
조금 전 제 심장이 상황도 모르고 팔딱팔딱 뛴 걸 다 들킨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들 정도로.
힐리아는 잠시 멍하니 아르파드를 보다가 그대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냅킨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이제 알현 준비하러 가야 해요. 먼저 일어날게요. 미안해요!”
그 말만 남긴 채 힐리아는 도망치듯 방을 나갔다.
“…….”
아르파드는 잠시 미간을 찌푸린 채 힐리아가 사라져 버린 문을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냅킨을 주워 올리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효과가 있긴 한 건가? 의식하는 것 같긴 한데…….”
그는 진지한 태도로 전력을 다해 힐리아를 유혹하고 있었다.
“흐음.”
그는 매끈한 턱을 매만지며 고민에 빠졌다.
‘예상대로 조금만 강하게 나가도 바로 도망가는군.’
자극의 정도를 좀 조절할 필요가 있었다.
여기까지는 아르파드 본인의 행동과 그 결과에 대한 냉철한 평가였다.
두텁게 낀 콩깍지는 그 사실보다 다른 것에 더 집중하게 했다.
아르파드는 조금 멍하니 중얼거렸다.
“도망치는 모습도 귀엽군.”
잘 익은 사과보다 붉어진 얼굴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한 품에 끌어안고, 그녀의 체향을 맡으면서 키스하고 싶을 정도로.
당장에라도 쫓아가서 잡고 싶은 걸 애써 참았다. 그랬다간 놀란 토끼처럼 달려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황궁 밖으로 도망칠지도 몰랐다.
* * *
“…….”
나는 괜히 천장을 노려보았다. 이곳은 투왈렛 룸. 오후 알현을 위해 드레스를 갈아입는 중이다.
시녀들이 시중을 들어주고 있어서 두 팔만 든 채 허공을 노려보며 생각에 빠지는 게 가능했다.
심장이 여전히 미친 듯이 두근두근 뛰고 있었다.
눈과 심장에 유해한 인간에게서 도망 나왔는데, 그 여파가 아직 남아 있었다.
아직도 아르파드가 과즙을 혀로 핥던 광경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유달리 희던 피부, 그 위로 번지는 붉은 액체는 명백히 자극적이었다.
그 혀와 입술의 감촉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입술을 맞댈 때 아르파드가 어떻게 내 머리를 매만지는지, 허리를 감아 오는 팔의 온기와 느낌 역시도.
내 숨결을 다 빼앗을 듯이 정열적으로 몰아붙여 오던…이 아니지!
‘지금 뭐 하는 거야, 힐리아 델핀!’
두 뺨과 귀가 불타는 듯 뜨거워져 있었다.
게다가 심장이 또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심장이 북채고, 내 몸이 북이라도 된 것 같다. 내 온몸을 심장이 미친 듯이 때리는 것 같은 고동이다.
명백히 비정상적인 반응. 내 이상 반응은 주변에서도 눈치챌 만큼 선명했던 모양이다.
내 옷을 갈아입혀 주던 애니가 놀라서 물을 정도였다.
“괜찮으세요, 비 전하? 혹시 열이라도 나시는 거 아니에요?”
애니는 내가 또 연회 직후처럼 쓰러지는 게 아닌가 싶어 호들갑을 떨었다.
덕분에 정신을 차리는 데 조금 도움이 되었다.
“아, 날이 좀 더워서 그런가? 올해 여름은 더울 것 같네.”
“네? 오늘은 아주 시원한데…….”
창문으로 눈치 없이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어왔다.
나는 애니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아, 애니. 티아라는 그 사파이어로 바꾸는 게 낫겠어.”
“아! 네, 비 전하!”
지금 나이야 열아홉이지만, 내가 실제 살아온 기간은 그 몇 배는 된다.
한국인으로서의 기억에, 세 번의 회귀까지 합쳐졌으니까.
그동안 남자를 보고 설렘을 느껴 본 적 없다면 거짓말이다.
‘첫 번째 삶에서는 루드비히를 사랑한다고 착각했었지.’
하지만 회귀가 시작되며 그런 감정은 사치가 되어 버렸다.
절망과 좌절에서 일어나는 것도 힘들었고, 살아남기도 버거웠으니까.
지금도 마찬가지다.
‘정신 차리자, 힐리아 델핀.’
아무리 아르파드가 잘생겼어도, 태도가 달콤해도… 흔들리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굳이 다짐해야 한다는 건 이미 동요하고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라는 걸 나는 애써 무시했다.
* * *
<에스피톨라>에 연재되는 연정 소설 ‘귀부인과 기사들’의 인기는 점점 더 올라갔다.
그러면서 아주 조심스럽게 소문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이 소설… 모델이 있다는 얘기 들었어요?”
“사실 나도 듣기는 했는데…….”
“진짜 기사를 수집하는 귀부인이 있다면서요?”
‘기사를 수집하는 귀부인’은 소설 속의 주인공에게 붙은 별명이었다. 당연히 부정적인 의미의.
“아니, 그런 말을 함부로 했다간…….”
“나는 그냥 소설을 말하는 것뿐인걸요.”
과거, 에반젤린이 주도해서 힐리아에 대한 불온한 소문이 돌던 때와 비슷한 양상이었다.
물론 그때에 비해 훨씬 간접적이고 음습한 말들이 오고 갔다.
누군가 힐리아에 대해 역성을 들려 하면 이건 소설일 뿐이다, 라고 말하며 빠져나가는 식이다.
몇 달이 지났을 무렵에는 이 소문은 사실상 정설처럼 퍼져 있었다.
그 모든 걸 뒤에서 세심하게 조율한 에반젤린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좋아. 이걸로 분위기는 잘 만들어졌어. 여기에 한 방만 더해지면…….’
하지만 좀 더 조심할 필요는 있었다.
지난번 뮤젠 공작 부인의 일 이후 에반젤린을 괴롭히는 한 가지 가능성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힐리아가 알고 있었던 것처럼 거기서 기다렸던 거지?’
게다가 자신이 준비한 알레르기 치료제보다 더 강한 약까지 준비해 왔다.
그게 정말 우연일 수 있을까?
부정하고 싶은 한 가지 가능성이 찌꺼기처럼 머릿속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원작에서 여주인공 힐리아는 한국인이 환생했다는 설정을 가지고 있다.
과연 그게 전부인 걸까?
한국인으로서의 기억과 지식만으로 힐리아가 공작 부인에게 한 일은 설명할 수 없었다.
깊어지는 생각에 에반젤린은 초조해졌다.
빙의한 사람이 혼자뿐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