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아론 뮤젠이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는 것은 엄청난 속도로 소문이 퍼졌다.
호사가들의 입이 바빠지는 건 당연했다.
“그 나이에 소드 마스터라니 정말로 대단해!”
“다들 이번 대에 소드 마스터가 나온다면 뮤젠 가라고 하긴 했지만, 정말로 이뤄질 줄은 몰랐어.”
“젊은 테슬란 공작이 꽤 속이 아프겠군.”
“하긴, 그분도 소드 마스터에 준하는 기사로 이름이 높았죠. 아직 소드 마스터가 되었다는 소식은 없지만요.”
거기에 두 가지 정보 역시 함께 붙었다.
우선 새로 탄생한 소드 마스터의 모친인 뮤젠 공작 부인이 정식으로 황태자비의 시녀장이 되었다는 것.
“그럼 악시온 대공비께서는요?”
“설마 그사이에 황태자비 전하와 대공비께서 사이가 벌어지신 건……?”
“외손주 며느리를 도와주시느라 임시로 맡으신 거였다고 하더라고요.”
“사실 대공비께서 신분도 연치도 있으니 시녀장을 맡으시기엔 과하긴 하죠.”
뮤젠 공작 부인이 황태자비의 시녀장이 되는 것도 과한 편이긴 했다.
황후의 시녀장보다 황태자비의 시녀장이 훨씬 신분이 높은 상황이니까 말이다.
그 사실이 지금 황태자비 힐리아의 위세를 보여 주었다.
거기에 한 가지 소식이 더 끼얹어져 소문에 불이 활활 붙었다.
“그런데 그 얘기 진짜일까요? 뮤젠 소공작이 소드 마스터가 되자마자 황태자비께 기사의 맹세를 바쳤다는 거요.”
“설마…….”
“진짜래요. 제 친구인 라슈트 백작 부인이 직접 목격했다더군요.”
“세상에!”
안 그래도 황실 내정 관리권이 황태자비에게 넘어간 상황이다.
거기에 새로 탄생한 소드 마스터가 황태자비의 기사가 되었다니.
혹자들은 이런 생각을 할 정도였다.
‘이건 좀 과할 정도로 황태자비에게 힘이 쏠리고 있는 상황 아닌가?’
만일 연애결혼(을 넘어선 약탈혼)이 아니라 정략혼이었다면, 황태자가 자신의 비를 견제하지 않을까 하는 말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 * *
그 와중에 소식지 <에스피톨라>에 새로 연재되는 연정 소설이 살롱을 중심으로 퍼지며 금세 화제가 되었다.
제목은 ‘귀부인과 기사들’.
살롱에서 구한 소식지를 귀부인들과 영애들은 흥미진진하게 돌려보았다.
“어머, 에스피톨라를 보시는 거예요? 그거 지난번에 황태자비 전하에 대한 기사가 전부 틀렸었잖아요.”
“맞아요. 드레스도 그렇고, 먹을 게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고 하셨다는 낭설도 그렇고.”
힐리아와 에반젤린 사이의 드레스에 대한 진실은 널리 퍼져 있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소문의 드레스를 직접 만든 프리다 웨스의 의상실이 영업 중이었다.
웨스의 의상실은 이미 몇 년 치 주문이 꽉 차 있을 정도로 성황이었고, 몰려든 손님들은 관련 소문에 대해 프리다에게 물어보곤 했다.
그리고 당연히 프리다 웨스(이세핀)는 힐리아를 위해 사실대로 열심히 설명해 소문이 퍼지는 데에 한몫했다.
“소문이 맞습니다. 비 전하께서 입으신 드레스는 제가 만든 거고, 당연히 루스 영애를 따라 하지 않았어요.”
“그나저나 <에스피톨라>는 어떻게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알고 기사로 낸 걸까요?”
다들 의아해하는 사실이었다.
해당 기사는 아르타누스의 홀 연회 당일 오전에 살롱에 배포되었다.
인쇄하고 옮기는 시간까지 생각하면, 사건이 일어나기도 전에 기사가 작성되었다고 봐야 한다.
“누가 꼭 그렇게 될 거라 예상하고 미리 소식지를 뿌린 것 같아요.”
“신기한 일이죠.”
덕분에 지금 <에스피톨라>의 신뢰성은 첫 발간 이후 최저를 찍고 있었다.
다행히 인지도는 유지되고 있었다.
사과 및 정정 기사도 발간되고, 그 뒤로 오보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대체재가 없는 게 가장 컸다.
여전히 사교계나 황실의 일을 알려면 <에스피톨라>가 제일 빠르고 간단했다.
영애들은 키득거리며 말을 주고받았다.
“하긴 저도 그때 실망 많이 했어요. 정기 구독을 끊을까 했다니까요.”
“그러시면서…….”
“하지만 봐요. 이건 그런 사실을 전하는 기사가 아니에요. 그냥 소설이지. 재미로 보는 거라고요.”
“그건… 그렇네요.”
<에스피톨라>를 비판하던 영애도 소식지에 실린 화려하고 예쁜 삽화와 자극적인 소설에 바로 사로잡혔다.
“어머, 어머. 이거 진짜 재밌네요. 저도 구독할까 봐요.”
세간에 한창 화제가 되기 시작한 연정 소설 ‘귀부인과 기사들’의 내용은 간단했다.
이미 남편이 있는 고귀한 신분의 숙녀가 뛰어난 기사들에게 구애를 받는 내용이었다.
소설 속의 귀부인은 남편과 연애결혼했지만, 수많은 기사의 흠모를 한 몸에 받았다.
그중에는 친정에서부터 그녀를 성실하게 모셔 온 한 기사가 있었는데…….
그 기사와 귀부인이 약혼 기간에 이미 연인 사이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소설 속에서 귀부인의 남편은 그 사실을 알고 분노했다.
다들 이후 전개가 어떻게 될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 * *
“흐응… 재밌네.”
아삭, 힐리아의 잇새로 물오른 청포도 과육이 씹히는 소리가 났다.
포도를 직접 힐리아에게 먹여 준 아르파드는 어쩐지 불퉁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걸 보고도 웃음이 나오나?”
“그야 의도가 빤히 보이니까 웃기죠.”
안 그래도 소드 마스터가 된 아론이 힐리아의 기사가 된 게 화제가 된 참이다.
그런데 ‘귀부인과 기사들’이라니.
누가 짠 듯한 제목이다. 내용은 말할 것도 없었고.
에반젤린과 빌헬름의 유착 관계를 아는 힐리아는 이 상황을 어느 정도 예견했다. 당연히 대응 준비도 하고 있었고.
‘하지만 픽션이라는 방법을 쓸 줄은 몰랐네. 좀 놀랐어.’
힐리아가 아는 에반젤린의 방식이라면 소설이라는 간접적인 수단을 취하지 않았을 거다.
‘대놓고 소문을 냈겠지.’
힐리아는 조금 긴장할 필요성을 느꼈다.
에반젤린이 이전보다 더 교묘하고 신중하게 접근하기로 한 모양이니 말이다.
그렇게 판단하며 힐리아는 들고 있던 종이를 툭 하고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문제의 연정 소설이 연재된 <에스피톨라> 최신호다.
아르파드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소설의 삽화를 보았다.
거기엔 주인공의 남편이 아내가 기사와 밀회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충격받는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저 장면이 유달리 불쾌한 건 얼마 전 있었던 일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며칠 전 그는 아론 뮤젠이 제 아내에게 검을 바치는 걸 지켜봐야 했으니까.
게다가…….
그는 흘긋 안구만 움직여 응접실 구석에 서 있는 호위 기사 중 하나를 보았다.
파리한 안색의 벨테인 경이다.
아르파드는 시선을 돌리며 낮게 이를 갈았다.
“이 삽화의 주인공, 누가 봐도 당신을 닮게 그렸어.”
“하지만 그걸로 <에스피톨라>를 처벌할 순 없어요. 알잖아요?”
그냥 우연이라고 주장해 버리면 그만이다.
<에스피톨라>가 의도적으로 힐리아를 음해하기 위해 ‘귀부인과 기사들’의 내용을 쓰고 삽화를 그렸다고 해도 증거가 없었다.
“그랬다간 권력에 취한 황태자비가 언론을 탄압한다면서 난리를 치겠죠.”
알아서 저쪽이 피해자인 척할 빌미를 줄 순 없었다.
아르파드는 낮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지만 다른 꼬투리를 잡아서 내가 난리를 칠 수는 있지. 미친 황태자가 뭐에 또 심기가 뒤틀렸다고 하면 아무도 의심 안 할걸?”
힐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요?”
“당연하지!”
힐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건 당신 명예도 같이 실추시키려는 거니까…….”
“그대의 명예에 대놓고 먹칠하려는 거잖아!”
힐리아와 아르파드의 말이 거의 동시에 엇갈렸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았다.
“?”
“?”
힐리아는 곧 히죽 웃었다.
“그만큼 나 걱정해 주는 거예요?”
“당연한 것 아닌가? 남편이 아내를 걱정하는 건. 내 명예는 아무래도 상관없어. 애초에 명예랄 것도 없기도 하고.”
힐리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사이 아르파드는 앞에 놓인 과일 접시에서 이번엔 살구를 집어 올렸다.
그러고는 오러를 이용해 껍질을 벗겨 반으로 갈라 씨까지 바른 다음, 힐리아의 입 근처에 직접 가져갔다.
“자, 아―”
“…….”
힐리아는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언제까지 당신이 주는 간식을 계속 받아먹어야 해요?”
그러자 늘 치켜 올라가 있던 아르파드의 눈썹이 축 처졌다.
“싫은가?”
“아니, 싫은 건 아니지만 이상하잖아요! 벌써 사흘째인데!”
그렇다. 아르파드가 힐리아에게 과일 등 여러 간식을 직접 먹여 주고 있는 건 사흘 내내 이어지는 중이다.
시작은 사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힐리아가 아론에게 기사의 맹세를 받은 바로 다음 날.
정말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일로 아르파드와 내기를 하게 되었다. 떨어지는 꽃잎의 방향을 두고 누구 쪽으로 갈까 하는 내기였다.
그리고 아르파드가 이겼다. 진 사람은 이긴 사람이 원하는 간단한 걸 들어주기로 했다.
“무슨 수 쓴 거 아니죠?”
“하하. 설마 졌다고 말 바꾸는 건 아니겠지, 힐리아?”
“누가 한 입으로 두말한댔어요? 그래서 원하는 게 뭔데요?”
아주 얼토당토않은 걸 시킬 줄 알았는데, 아르파드는 의외의 말을 했다.
“내가 주는 건 가리지 않고 전부 먹어 주기.”
“…네?”
“그대는 너무 말랐어.”
힐리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또 아르파드가 자기가 먹기 싫은 야채를 자신의 입에 버리는 정도려니 한 것이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고, 황실의 식사는 맛있으니까.’
그런데 아르파드는 지난번처럼 자기가 먹기 싫은 음식을 먹으라고 하지 않았다.
‘어?’
이상하게도 본인 몫의 식사에 있는 브로콜리까지 깨끗하게 먹었다.
오히려 식사 중에 힐리아에게 먹으라고 준 건 본인이 좋아하는 고기나 생선류였다.
“자, 아―”
“으응?”
“약속했잖아? 아―”
그 뒤로도 각종 디저트 혹은 지금처럼 과일 등등을 입 앞까지 배달해 주곤 했다.
껍질과 씨를 발라 내서는 아주 먹기 좋게 다듬어서 말이다.
‘이래서는… 내기의 벌칙이라기보단 아르파드가 일방적으로 내 시중을 들어주는 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