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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혼으로 남편부터 바꾸겠습니다-111화 (111/210)

111화

힐리아는 입을 떡 벌렸다.

굳이 질문을 던져서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아르파드의 표정은 그가 확신범이라는 걸 알려 주고 있었으니까.

그는 눈을 빛내며 아내의 손등에 가볍게 입술을 눌렀다.

“승리의 월계관보다 기쁘군.”

‘뭐가? 날 놀린 게?’

“…….”

너무 어이가 없어서 힐리아는 뭐라고 할 의지마저 사라졌다.

‘이렇게 감쪽같이 넘어가다니!’

그나마 위안인 건, 아르파드의 가슴팍에 깜찍한 연분홍 리본을 달아 줘서 복수했다는 것 정도일까.

곧 힐리아는 그건 복수가 못 된다는 걸 깨달았다.

당사자가 조금이라도 수치스러워해야 벌이니 복수니 의미가 있지.

아르파드는 오히려 힐리아가 매 준 숄을 자랑하듯 가슴을 펴고 있었다.

시종이 벗어 둔 외투를 가져와 바쳤지만, 손사래를 쳤다.

‘왜, 어째서… 매번 부끄러움만 내 몫인 걸까.’

지난번 다람쥐 건 때도 그렇고, 이런 기분을 꽤 많이 느껴야 하는 게 억울한 힐리아였다.

* * *

엄청난 대련이었다. 기사라면 꿈에서라도 참관하길 바랄 정도로.

하지만 두 남자의 검술 수준이나, 현란한 무위보다 목격자들에게 인상 깊게 남은 건 다른 것이었다.

‘가슴…….’

‘양쪽 모두 엄청났어.’

‘단추, 단추가……!’

그녀들 대부분은 힐리아가 왜 대련이 끝나자마자 달려 나갔는지 백분 이해했다.

‘그래. 나라도 그럴 거야.’

‘절대 다른 여자 눈앞에 보이기 싫지.’

‘맞아. 맞아.’

이 분위기를 수습한 것은 공작 부인이었다.

“감사합니다, 황태자 전하. 부족한 아들에게 친히 가르침을 주셨으니.”

뮤젠 공작 부인은 아들의 완벽한 패배에 대한 아쉬움을 깔끔하게 접었다.

어차피 황족에게 패했다 해서 그건 불명예가 될 수 없었으니까.

오히려 이 정도까지 맞서 싸우는 것은 자신의 아들이 아니면 불가능했으리라.

‘마지막엔 오러까지 쓰셨고 말이지.’

그러지 않으면 이길 수 없을 정도로 아들이 강하다는 의미이리라.

뮤젠 공작 부인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실제로 어떤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일지가 중요했지.

그녀는 아들의 돌발 행동으로 벌어진 대련을 그만큼 뮤젠 가와 황태자 부부가 친밀하다는 증거로 삼아 정리했다.

이건 힐리아도 아르파드도 바라는 바였으므로,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았다.

하녀가 가져온 차가운 차를 아르파드에게 건네며 힐라아가 속삭였다.

“원래 내가 마시려던 거예요. 고맙게 받으라고요.”

“감사하게 마시지.”

아르파드는 피식 웃었다.

조금 전 힐리아가 저도 모르게 반응해서 자신에게 달려올 때와는 좀 달랐다.

지금 음료를 준 건 주변에 ‘우리 사이 좋아요’라고 과시하기 위한 행동이다.

그걸 알면서도 힐리아가 자신을 챙겨 주는 게 기분 좋았다.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이랬던 것 같군.’

금실 좋은 부부를 연기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이 있는 행동이긴 했다.

그런 이유로 힐리아가 행동한다는 걸 알면서도 이상할 정도로 기껍고 즐거웠다.

굳이 힐리아를 놀리듯 행동한 이유도 결국은 그것이었다.

그때였다.

힐리아가 아론 뮤젠에게 향하는 것이 보였다.

그는 조금 얌전하게 굴기로 했다. 기분이 좋아 자비로울 수 있었다.

‘어쨌건 뮤젠 가는 지금 상황의 주빈이기도 하니…….’

그리고 조금 자신감이 생긴 탓도 컸다.

가슴팍에서 대롱거리는 분홍색 레이스 리본이 준 여유였다.

조금 뒤 벌어질 일을 알았다면, 아마 이렇게 여유를 부리지 않았을 거다.

* * *

나는 애니에게서 받은 수건을 아론에게 건넸다.

“어린 나이에 대단하시네요. 뮤젠 경.”

내 기억에 3년 이내에 소드 마스터라 불리게 될 기사다.

조금이라도 좋은 인상을 보이는 게 이득이었다.

그리고 그와 관련해서 한 가지 기억나는 게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에반젤린과 아론이 나누던 대화를 우연히 들은 적이 있었다.

“역시 아론은 대단해요. 남들은 꿈도 못 꿀 경지를 이렇게 젊은 나이에 이루었잖아요.”

“사실 저도 큰 벽에 부딪힌 적이 있었습니다. 소드 마스터의 경지를 코앞에 두고서 처음으로 벽을 느끼고 좌절도 많이 했습니다.”

“어머, 정말요? 그럼 어떻게 그 위기를 극복했는지 얘기해 주세요. 기사들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겠어요.”

에반젤린의 말대로, 기사들은 큰 관심을 보였다. 눈을 번쩍거리며 몰려들어 귀를 기울였다.

이 조언을 들으면 당장에라도 더 높은 경지로 올라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음, 그렇게 기대할만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비유하자면, 너무 높은 벽이 앞에 있다 보니 뛰어서 넘어갈 방법만 찾고 있는 게 문제였더군요.”

모두의 기대를 깨고, 아론은 엉뚱한 말을 했다.

“비유하자면 하다 하다 안 되어서 사다리나 긴 막대라도 만들어서 뛰어넘을 방법을 찾으려고 해 봤지만 소용없었죠. 그런데 어느 날, 발상을 바꿔 보자는 생각이 들더군요.”

“어떤 창의적인 발상인가요?”

“벽이 너무 높아 뛰어서 넘기 힘들다면, 부숴 버리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네?”

“벽을 없애는 결과는 결국 똑같으니까요.”

저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건 에반젤린만이 아니었다.

“막상 깨닫고 보니 정말 바보 같은 고민을 하면서 몇 년이나 정체되어 있었더군요. 그걸 깨달은 그 날, 저는 오러를 다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론의 말이 끝난 뒤 기대감으로 눈을 반짝이던 기사들의 눈빛은 죽은 생선 눈처럼 변했다.

아무도 아론의 말을 이해 못 한 것이다.

하지만 다들 전혀 티를 내지 않았다.

‘훌륭한 조언을 들었다’ 혹은 ‘멋진 말씀에 감사하다’ 등등 인사치레 어린 대답이 쏟아졌다.

물론 그 뒤로 아론의 조언을 바탕으로 높은 경지에 오른 기사는 없었다.

천재면서 욕심이 많아 깨달음을 일부러 알려 주지 않는다고 흉을 보는 이들만 생겼다.

세 번의 회귀를 거치며 내가 보아 온 아론 뮤젠이라는 사람은 그렇게 복잡한 인간이 아니다.

‘오히려… 지나칠 정도로 단순하고 명쾌한 사람이야.’

그러니 그때 한 말은 본인의 깨달음을 그대로 표현한 것일 터다.

생각해 보면 이때쯤 아론 뮤젠은 모친과 함께 황도에 올라와 꽤 사고를 쳤다.

주로 뛰어난 기사들에게 갑자기 접근해서 대련이나 결투 신청을 하는 짓이었다.

그중에는 루드비히나 아르파드도 있었다.

‘황족과의 대련이 이루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이번이 처음이었다.

지난 세 번의 삶에서 아르파드는 아론의 대련 신청을 전부 무시했다.

루드비히는 질까 봐 늘 대련을 피했고 말이다.

이번엔 무슨 바람이 분 건지 모르겠지만…….

아론이 무리하면서까지 아르파드에게 대련을 요청한 이유는 알 수 있었다.

‘지금이 딱, 그 벽에 부딪혀 방황할 때였던 거야.’

그때 한 말을 내가 그대로 옮겨 주는 정도로 큰 도움이 될지는 알 수 없었다.

가만히 있어도 그는 몇 년 뒤에는 소드 마스터가 될 인물이기도 하고.

‘하지만 시도해 봐서 나쁠 건 없잖아?’

내게도, 또 아론 본인에게도.

아론은 상쾌한 웃음을 띤 채, 땀을 닦았다.

“부끄럽습니다, 비 전하. 요즘 들어 한계를 많이 느끼고 있었던 터라, 그만 황태자 전하께 억지를 부렸습니다.”

“아론, 그런 이유로 황태자 전하를 귀찮게 하다니…….”

뮤젠 공작 부인이 아들을 질책하듯 불렀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이 아이가 검 외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서 큰 걱정이랍니다.”

“기사의 귀감이신 걸요.”

뮤젠 공작 부인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나는 조금 전 아론이 한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역시 지금이 그 벽을 만났던 때가 맞구나.’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조심스레 운을 뗐다.

“그런데 뮤젠 경 정도로 뛰어난 기사가 한계를 느끼시다니. 엄청나게 큰 벽을 만나신 것 같은 느낌인 걸까요?”

아론의 눈이 커졌다.

“네! 맞습니다. 정말로 그런 느낌입니다. 어떻게 해도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을 눈앞에 둔 기분이죠.”

“음. 아마 이건 제가 검에 대해 하나도 몰라서 드릴 수 있는 말씀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부러 해맑게 운을 뗐다.

“넘을 수 없을 정도로 높은 벽이라면 굳이 곧이곧대로 넘어가려고만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요?”

“…네?”

아론은 전혀 상상도 못 했다는 듯 입을 떡 벌렸다.

“벽을 아예 빙 둘러서 피해 가는 방법도 있을 수 있고, 아래 땅을 파서 넘어갈 수도 있겠죠.”

회귀 전에 내가 들은 아론의 깨달음은 대충 ‘길은 정해진 것 하나만 있는 게 아니다’ 정도로 압축할 수 있었다.

‘콜럼버스의 달걀이나, 안 풀리는 매듭을 잘라 버리는 것과 비슷한 거지.’

곧이곧대로 가려고만 하지 말고 발상을 바꿔 보라는 말이다.

다른 사람들은 내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아론은 달랐다. 계속 고민하던 것에 관한 이야기라 그런지 진지하게 되물었다.

“…그건 제대로 벽을 넘었다고 보긴 어렵지 않겠습니까?”

“중요한 건 벽 너머로 가는 거죠. 벽을 넘는다는 것 자체가 아니라.”

“하지만, 그건… 아니, 아닌가?”

아론은 몇 번 고개를 젓다가 곧 깊은 생각에 빠졌다.

뭔가 실마리를 잡은 듯한 반응이다.

‘음. 이 정도면 충분하려나?’

그때였다. 아론의 짙푸른 눈동자가 마치 지진 난 것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아르파드나 뛰어난 기사들이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 같은 문외한도 아론에게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멍하니 굳어 버린 듯한 아론의 몸에서 흐린 빛이 스며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

아르파드가 그로부터 나를 보호하려는 듯 감싸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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