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아론이 아르파드에게 대련을 신청한 이유는 간단했다.
‘태어날 때부터 소드 마스터라는 황족의 강함을 직접 경험해 보고 싶다!’
게다가 요즘 들어 그는 자신의 앞에 가로막힌 벽의 존재를 느꼈기에 더욱 그러했다.
아론은 5살 무렵부터 천재로 전 대륙에 이름이 알려졌었다.
첫 스승을 이긴 건 열 살 때였다.
뮤젠 공작가의 유일한 후계자에, 천재 중 천재라 불리는 재능. 그야말로 부족함은 하나도 느껴 보지 못한 인생이었다.
어떻게 넘어야 할지 알 수 없는 벽을 느껴 본 건 당연히 처음이다.
검술 능력의 성장이 정체된 걸 느끼기 시작한 건 작년부터였다.
‘이 벽만 넘으면,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을 것 같은데…….’
하지만 태어나 처음 경험하는 벽을 아론은 어떻게 이겨 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만한 천재가 없었기에 같은 눈높이에서 조언해 줄 만한 이도 없다.
‘모두 내가 당연히 소드 마스터가 될 거라 말하지만, 정말로 가능한 걸까?’
아론은 태어나 처음 경험하는 초조함과 불안감, 그보다 몇 배는 강한 갈망을 느껴야 했다.
어머니는 신붓감을 찾기 위해 황도로 오자고 제의했지만, 아론이 이를 받아들인 건 다른 이유에서였다.
‘더 넓은 물로 나아가면 좀 다를 수도 있겠지.’
열네 살에 처음 참석했던 토너먼트 때 경기 한판 한판마다 성장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때의 감각을 다시 한번 느껴 보고 싶어서 황도로 온 것이다.
그리고 아론이 기대한 것 중에는 지금 ‘이 상황’도 있었다.
황족과의 대련.
드래곤의 혈통을 물려받은 황족들은 신체 조건부터가 일반인과 다르다.
보통 인간은 극한까지 단련해서 겨우 손에 넣는 마력에 대한 감응과 지배력을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다.
그 때문에 황족은 토너먼트 등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대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니 아론은 아르파드나 루드비히와 검을 맞대 볼 기회가 없었다.
아르파드를 마주할 수 있었던 건 토너먼트 시상식 때였다.
그때 아론은 이 사람은 자신이 죽었다 깨어나도 이길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였다.
아르파드에게 무례에 가까운 대련을 청한 것은.
‘황태자와 한번 검을 맞대 보면, 이 벽을 어떻게 뛰어넘을 수 있을지 알 수도 있어.’
거기에 순수한 무인으로서의 호승심도 더해졌다.
그리고 직접 칼을 마주 대고 경험하게 된 아르파드의 강함은…….
상상 이상이었다.
‘인간의 형상을 한 드래곤을 상대하는 기분이군!’
인간의 육체에서 나올 수 없는 힘과 속도가 눈앞에서 펼쳐졌다.
아론은 순수한 경탄과 희열을 느끼며 전투에 빠져들었다.
아르파드의 칼을 겨우겨우 쳐 내며 그는 경외감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소문이 과장되었다고 생각했는데 흡! 아니었군요! 오, 히려 반대입니다!”
“어이없는 놈이군.”
꽤 큰 목소리였지만, 단둘이 넓은 공간을 점유하고 대련 중인 상황이다.
게다가 두 진검이 수십 번 부딪치고 쇠가 쇠를 깎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서로에게만 들리는 대화였다.
마치, 이 대련처럼.
한편으로 아르파드 역시 좀 놀라고 있었다. 아론의 재능이나 실력이 그의 예상보다 뛰어나서는 아니었다.
자신의 힘을 보고도 기죽거나 열등감을 느끼지 않고, 순수하게 열정과 경탄이 가득한 눈빛 때문이었다.
같은 드래곤의 혈통을 타고난 루드비히조차 아르파드를 볼 때는 패배감과 열등감을 감추지 못하는 걸 생각하면 특이하다.
‘이런 놈은 또 처음이군.’
아르파드는 처음으로 진심 어린 질문을 던졌다.
“반칙이라고 생각 안 하나?”
“예?”
“내 존재가 말이야.”
일반 기사들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아르파드를 아예 인간 외의 존재로 생각했다.
태어나면서부터 근력도, 속도도, 동체 시력도 일반인과는 차원이 달랐으니까.
질시와 질투를 넘어 존재 자체를 반칙이라고 보는 시선에 아르파드는 이미 질려 있었다.
그런데 이자는 달랐다.
그저 순수한 경탄과 전투 자체의 희열만이 가득하다.
아론은 순순히 인정했다.
“솔직히, 부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죠.”
“혹시 그래서 나에게 시비 걸고 싶어서 대련 신청한 건가?”
설마 그래서 힐리아에게 접근하는 건 아니겠지?
아르파드는 아론이 알면 얼토당토않은 누명이라고 억울해할 억측을 했다.
감정을 자각한 이후부터 아르파드는 자신의 모든 생각이 ‘기-승-전-힐리아’로 끝난다는 걸 자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어떻단 말인가.
아르파드는 자신이 첫사랑에 정신을 못 차리는 애송이라는 걸 인정했다.
아론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요?”
그는 아르파드가 허를 찔러 휘두른 폼멜을 칼막이로 간신히 쳐 냈다.
쩡!
그 한방에 칼막이가 박살 났다.
아마 스쳤으면 살이 찢기고 뼈가 부러졌을 거다.
경악으로 벌어진 아론의 눈빛이 즐거움과 흥분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보다는… 직접 부딪쳐 보고 싶었습니다! 절대 못 넘을 벽에 말이죠!”
아르파드의 입가에 호승심만으로 가득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어쩐지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괴물 취급받는 것이야 익숙했지만, 신경을 거스르지 않냐면 그건 또 아니니까.
이런 반응을 보이는 놈은 또 신선했다.
그래서였다. 호의에 가까운 대우를 해 준 건.
‘힐리아가 공을 들여 뮤젠 공작가를 끌어들이기까지 했으니, 나도 조금은 도와줘도 나쁘지 않겠지.’
아르파드의 전신에서 붉은 마력이 피어올랐다.
연이어 그의 검을 오러가 감싼다.
“!”
아론은 피하거나 흘리지 않고 그대로 돌진했다.
처음 만나 보는 소드 마스터를 향해.
캉―!
아론의 칼이 깔끔하게 잘려 나갔다.
연이어 아르파드가 내민 칼날이 아론의 가슴팍에 닿았다.
상처는 전혀 없었다.
땀에 젖은 채, 아론은 오히려 홀가분하고 즐거움 가득한 말투로 선언했다.
“졌습니다. 후, 역시 대단하십니다.”
아르파드는 아론이 깨끗하게 승복하는 것에는 관심 없었다.
대련 내내 힐리아에게 신경이 집중되어 있었다.
아르파드는 치밀하게 계산했다. 힐리아가 보고 있는 각도에서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 말이다.
최고로 멋지고, 날카롭고, 아름다워 보일 거라 예상되는 각도로 선 채, 그는 칼을 가볍게 휘두른 후 검집에 넣었다.
그 순간 상체의 근육에 힘이 들어가며 이미 터질 듯하던 셔츠의 앞섶에서 실이 뜯어지는 소리가 났다.
뿌득!
그리고 단추 두 개가 연이어 터져서 날아갔다.
팡! 파팡!
“…….”
황태자의 승리를 축하하는 말을 하려던 귀부인들의 입이 아교를 붙인 듯 달라붙었다.
그들은 갑자기 확 드러난 아르파드의 가슴팍을 향해 저도 모르게 눈을 굴렸다.
맹세코 의식하고 한 건 아니었다.
아까 아론의 단추 하나가 날아갔던 때처럼 본능의 발로였을 뿐이다.
그때였다.
힐리아가 당황해서 몸을 일으켰다.
“그, 어! 전하!”
“응? 왜?”
아르파드는 당황해서 자신을 향해 도도도 달려오는 아내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햇살이 아르파드의 머리 위로만 내리쬐는 듯한 착시 현상을 불러일으킬 수준의 미소였다.
지켜보던 귀부인들이 절로 붉어진 고개를 끌어내릴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리고 아직 그들은 깨닫지 못했지만, 오늘 집으로 돌아간 뒤.
부인들은 자신의 남편과 아들을 보고 잠시 눈을 비비게 된다.
잘생기고 몸 좋은 두 남자, 특히 예술적으로 아름다운 아르파드를 보고 돌아갔더니 집에 있던 남자들이 전부 오징어로 보이는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그 사실을 아는 이들은 아직 없었다.
* * *
타닷!
정신을 차렸을 때 힐리아는 이미 앞으로 달려 나온 뒤였다.
‘뭐야? 내가 왜 이러지?’
그렇다고 갑자기 뒤로 물러나는 것도 이상하다.
게다가 아르파드의 상태가 남사스러운 건 사실이지 않은가!
‘여기 외간 여자가 얼마나 많은데!’
자기 입으로 외간 남자가 어쩌고, 정실이 어쩌고 해 놓고는!
힐리아는 아르파드의 옆으로 다가가자마자 자신이 두르고 있던 연분홍빛 얇은 레이스 숄을 벗어 들었다.
“이거, 이거 걸쳐요! 빨리!”
“응?”
아르파드는 자신이 지금 얼마나 민망한 꼴인지 전혀 모르는 듯했다.
그녀는 분통을 터뜨리다가 결국 숄을 든 두 손을 뻗었다.
아르파드의 키가 너무 커서 까치발을 해야 했지만, 어쨌건 목과 어깨에 숄을 걸쳐 주는 데에 성공했다.
숄의 양 끝을 가슴팍에서 모아 야무지게 리본을 묶는 것도 잊지 않았다.
‘휴. 이제야 겨우 안 민망해졌네.’
겨우 안도의 한숨을 쉬던 힐리아는 이상한 걸 눈치챘다.
아르파드가 지나칠 정도로 만족스러운 미소를 띤 채, 눈을 가늘게 접고 있었다.
그 묘한 눈웃음이 의미하는 바는 너무나도 선명했다.
‘설마, 이러길 바라고 일부러 그런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