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결투…는 아니지만, 대련?
이렇게 갑자기?
나를 비롯한 여자들은 당황했다.
특히 놀란 건, 아론의 모친인 뮤젠 공작 부인이었다.
아들이 황태자에게 대련을 청했다는 걸 파악하자마자 달려가서 말렸다.
“황태자 전하께 이 무슨 무례니, 아론!”
그녀는 아들의 앞을 반쯤 막아서며 아르파드에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이 아이가 덩치만 컸지, 아직 철이 없답니다. 부디 아들의 실수를 용서해 주세요. 전하.”
아르파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친에게 반항한 건 아들 쪽이었다.
“실수가 아닙니다, 어머니!”
“아론!”
“저는 순수한 무인으로서 대련을 요청드린 겁니다! 용혈의 계승자인 전하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면, 더없는 영광일 겁니다!”
처음으로 아르파드의 입에서 제대로 된 대답이 나왔다.
“나는 사람을 가르치는 데엔 재주가 없어.”
거절인 줄 알고 공작 부인이 안도하려던 찰나였다.
“실전 같은 대련이 될 거다. 칼을 들고 어린애 장난질 같은 건 하지 않으니까.”
공작 부인의 안색이 파래졌다. 모친의 걱정을 모르는 아론은 오히려 기뻐했다.
“바라던 바입니다! 저 역시 기사, 검을 들고 장난하는 건 원치 않습니다!”
“다치거나 죽어도 모른다.”
“그건 기사 서임을 받을 때 이미 각오했습니다!”
두 남자를 제외한 모두의 불안과 걱정 속에서 난데없는 대련이 시작하게 되었다.
* * *
아르파드는 본인이 쓰는 검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론의 경우 입궁하며 황실 기사단에 검을 맡긴 상태였다.
그 때문에 아르파드의 특별 명령으로 아론의 검이 도착했다.
그사이 아르파드와 아론은 거추장스러운 예복 겉옷을 벗었다.
가벼운 셔츠와 바지만 남긴 것도 모자라, 움직임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옷 곳곳의 단추를 풀기까지 했다.
덕분에 잘 단련된 두 남자의 조각 같은 몸이 드러났다.
귀부인들은 누가 이길지에 대한 흥미에 앞서, 젊고 아름다운 남자들의 육체미에 열광했다.
“황태자께선 과연 팔다리 근육도 조각 같으시네요.”
“게다가 저 너른 가슴팍을 보니 절로… 음. 어험!”
뇌를 거치지 않고 본능대로 말하던 귀부인들은 곧 주인(?) 앞에서 과하게 말했다고 생각했는지 화제를 돌렸다.
나는 괜찮은데 왜들 저러지?
그냥 예쁘고 멋있는 거 보고 감탄하는 건 사람의 본능이잖아?
게다가 아르파드의 몸은 저 안에 들어앉은 성질머리를 알고 봐도 홀릴 만큼 예술적이었다.
‘저 인간은 햇볕에 타지도 않나? 몸통이랑 팔다리 색이 똑같이 희네.’
아르파드는 단련도 자주 하는 편이고, 제랄드로서 꽤 나다니곤 했다.
흰 얼굴이 귀족의 우아함을 상징하는 거라며, 양산이니 모자니 요란을 떨었던 루드비히와는 달랐다.
그런데도 아르파드가 루드비히보다 훨씬 하얀 피부를 가졌으니,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덕분에 나는 흰 대리석을 완벽한 비율로 조각한 예술품 보듯 아르파드의 몸을 감상했다.
반면 뮤젠 소공작 아론은 정반대였다.
아직 열여덟이라 성장이 다 끝나지도 않은 몸이다. 그럼에도 큰 뼈대 위로 단단한 근육이 촘촘하게 들어찬 것이 눈에 띄었다.
선명하게 갈라진 근육 사이로 푸른 혈관이 선명하게 드러난 걸 보며, 시중을 들던 어린 하녀들이 꺅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 팔뚝에 혈관 도드라진 거 보여?”
“게다가 가슴이… 어마어마하네. 단추가 터질 것 같, 어머! 진짜 터졌어!”
“꺄아, 어떡해!”
아론이 준비 운동을 하려고 좌우로 어깨를 열며 가슴을 폈더니, 셔츠가 팽팽해지다 못해 단추 하나가 터져서 날아갔다.
하녀들은 저도 모르게 ‘어머! 어머!’를 연발하다가 선배나 시녀들에게 혼이 났다.
하지만 하녀들의 눈이 빛나는 건 막을 수 없었다. 그중 몇몇은 날아간 단추를 몰래 주우러 갔다.
평소라면 이런 환호성에 둘러싸여 아들을 자랑할 뮤젠 공작 부인은 불안감으로 가득 차 보였다.
그녀는 준비 중인 아들에게 다가가 몇 번이나 말리려 노력했다.
“다른 분도 아니고 황태자 전하와 진검 대련이라니, 제정신이니? 지금이라도 그만두거라!”
옆에서 아르파드가 낮게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공작 부인이 아들의 재주에 자신이 넘치나 보군. 날 이길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공작 부인의 아들을 향한 책망은 안전에 대한 것보다 황가에 대한 무례를 걱정하는 게 더 컸다.
그만큼 아들의 실력에 대한 신뢰가 큰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아르파드에겐 안 되겠지만.’
아무리 미래의 소드 마스터라도, 드래곤의 혈통을 이은 황족에겐 어림도 없었다.
“그럴 만도 하죠. 열넷에 토너먼트에서 우승했었다니까요. 지금은 더 강해졌겠죠.”
“내게 상처라도 내면 문제가 될까 봐 저렇게 호들갑을 떠는 걸 보니 조금 심술이 나는데.”
정말 아들의 안위만 걱정된다면 저렇게 사방에 아르파드가 얼마나 강한지 미리 외칠 필요가 없다.
혹시라도 이길 경우 ‘정말로 본의가 아니었다, 이럴 줄 몰랐다’로 넘길 수 있도록 열심히 말하고 있는 거다.
공작 부인이 아들의 옆에 선 것처럼 나 역시 아르파드의 곁에 있었다.
남편을 걱정하는 척은 해야 하니까.
주변에 들리도록 걱정하듯 말했다.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진짜 하려는 말은 작게 속삭였다.
“죽이진 말아요.”
“알아. 아무리 나라도 공작가의 후계자를 죽일 생각은 없어.”
“불구가 되거나, 큰 흉터가 남을 상처를 입혀도 안 돼요.”
“…안 보이는 곳은 괜찮지 않나?”
“안 돼요.”
그러자 아르파드가 ‘칫!’하고 혀를 찼다.
“공작 부인은 내 시녀장이 되어 줄 사람이에요. 게다가 소공작이랑은 오늘 만난 사이면서, 왜 그렇게까지 거슬려 해요?”
“끼를 부리잖아.”
“…네?”
이건 또 무슨 창의적인 헛소리인가?
“아까 가슴팍의 단추를 날려 버렸을 때, 당신도 놈에게 시선을 줬잖아.”
“그거야 놀라서…….”
아르파드는 고개를 숙이더니 내 귓가에 속삭였다.
“나도 할 수 있어. 보여 줄까?”
“됐거든요!”
아르파드는 시원할 정도로 맑게 웃었다.
그리고 손을 내밀며, 조금 전과 달리 주변이 다 들을 수 있도록 말했다.
“내 아내에게 승리를 바치도록 하지.”
이미 승리를 확신하는 어조였다.
“결투도 아니고 대련에서 무슨…….”
나는 그를 타박했지만, 순순히 손을 내주었다.
아르파드는 내 손등에 키스를 남기고, 검을 들고 나아갔다.
긴장감과 호승심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뮤젠 소공작에게로.
드디어 대련의 시작이었다.
* * *
대련은 황태자궁의 연무장으로 자리를 옮겨서 진행되었다.
알음알음 소문을 들은 황태자궁 소속의 황실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와 대련을 참관했다.
캉!
쇠와 쇠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연무장의 공기를 베었다.
쩌적―!
단단한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바닥재가 발길질 한 번에 갈라져, 그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기사들이 나서서 이를 막아 주었기에 다치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놀라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꺅!”
“위, 위험……!”
놀란 귀부인들이 비명을 지르는 와중에 힐리아는 흥미진진하게 지켜보았다.
이만한 수준의 기사들이 검을 나누는 걸 볼 기회는 별로 없었다.
게다가 회귀 전에는 아론과 아르파드가 대련하거나 결투를 벌이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대련이라는 단어에 비해 훨씬 거친 상황에 귀부인 중에는 놀라고 두려워하는 이도 꽤 있었다.
주변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은 하나같이 열정적인 시선으로 이 대련을 지켜보고 있었다.
벨테인 경도 예외는 아니었다. 늘 진중하고 차분한 모습만 보이던 사람이 지금은 흥분을 애써 누르고 있는 게 보였다.
기사들에게 뛰어난 기사들 간의 전투를 관람하는 건 그 자체가 훌륭한 수업이다.
열네 살에 토너먼트에서 우승하고 곧 소드 마스터 자리에 오를 게 분명하다는 말을 듣는 아론 뮤젠. 그는 이미 평범한 인간 중에서는 최강자로 불리고 있었다.
그리고 용혈을 짙게 물려받은 황족으로서, 태어날 때부터 소드 마스터라 봐도 좋을 수준이었던 아르파드.
두 초인의 대결은 그야말로 기사들에게는 꿈의 결전이었다.
나는 벨테인 경이 이 대련을 지켜보고 기사로서 성장하길 기대하며 흐뭇해했다.
그때였다.
흥분과 열망이 들끓듯 피어올랐던 벨테인 경의 얼굴에 그림자가 어린 것은.
불꽃처럼 피어올랐던 감정들이 다 타 버린 뒤에 남은 건 재와 같은 찌꺼기였다.
패배감, 열등감, 그리고… 선명한 좌절.
나는 벨테인 경을 오랜 시간 알았고, 그만큼 표정 변화를 잘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잘못 본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너무나도… 내가 아는 벨테인 경과는 어울리지 않은 감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늘 곧고 바른, 기사의 표본 같은 이였으니까.
“…!”
나는 황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어째선지 봐선 안 될 걸 봐 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게 들켰다는 걸 벨테인 경이 알아챌까 봐 심장이 불안하게 두근거렸다.
벨테인 경은 조금 전 보인 부정적인 감정을 내게 들키고 싶어 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때였다.
캉―!
한 명의 검이 부러지며 승부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