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아르파드가 보란 듯 내민 손목에는 여전히 힐리아가 준 아그리피나의 눈물이 걸려 있었다.
두 신물이 서로 접촉하자, 이번에도 신력의 공명이 일어났다.
우웅.
신비로운 공명음과 불티처럼 튀는 빛무리.
그걸 확인한 비오 대주교의 안광이 번뜩였다.
“그 진주는, 혹시 아그리피나의 눈물입니까?”
“그렇다네. 아내가 나에게 결혼 예물로 준 것이지.”
아르파드는 우아하게 손목을 한번 흔들었다. 명백히 자랑하고 있는 태도였다.
사슬에 매달린 물방울 모양의 진주가 찰랑, 흔들린다. 그 움직임을 따라 비오 대주교의 눈빛이 따라붙었다.
“…귀한 신물을 둘이나 한꺼번에 볼 수 있다니, 더없는 영광입니다.”
대주교가 매끈한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황태자비 전하의 외가가 본디 동쪽에 있었던 섬나라 일리아덴 왕가의 후예였지요? 그곳에서 내려온 보물인 모양입니다.”
이번에 대답한 건 힐리아였다.
“맞아요. 잘 아시는군요? 제 외가는 어머니 대에 델핀 공작가에 편입되었고, 모친께서 일찍 세상을 떠나셔서 사정은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말이에요.”
아르파드가 또 끼어들고 싶어 했으나, 힐리아의 가는 손가락이 그의 손등을 살짝 긁었다.
‘내가 하게 놔둬요.’
의미를 알아채고, 아르파드는 입을 다물었다.
덕분에 힐리아는 원하던 질문을 대주교를 향해 쿡 찌를 수 있었다.
“대주교께서는 다섯 여신의 신물에 큰 관심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
비오 대주교는 부드럽게 웃었다.
“사제가 신께서 지상에 남긴 파편을 따르고자 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힐리아는 저 말이 거짓이라는 걸 알았다.
‘주신전의 사제가 왜 다섯 쌍둥이 여신의 신물에 관심을 두지? 주신의 신물이라면 몰라도.’
신화상으로 아그리피나와 스타틸리아는 주신과 모신 사이에 태어난 다섯 자매 중 둘이었다.
주신전과 대지모신의 신전조차 그다지 세가 강하지 못한 것이 이 대륙이다.
전 대륙을 지배하는 것은 이스트리드 제국.
그리고 이스트리드 황실의 권위는 신이 아니라, 조상인 드래곤 아르타누스로부터 나온다.
‘지구의 중세와는 전혀 다르지.’
대관식에서 제국 황제는 사제의 손을 빌려 황권을 신으로부터 받을 필요가 없다.
드래곤의 뼈와 비늘을 엮어, 주먹만 한 드래곤 하트를 박은 보관을 직접 쓴다.
아르타누스상이 옥좌를 내려다보는 아래에서 말이다.
대륙 전체를 먹여 살릴 수 있는 아르타누아 평원의 풍요는 드래곤 아르타누스가 자신의 후손에게 약속한 것이다.
그 때문에 황권은 드높았고, 반면 신권은 낮았다.
게다가 중세 유럽과 달리 일신교로 교단이 통일되어 있지도 않았다.
여러 신을 각기 모시는 교단이 난립하다 보니, 신권은 하나로 뭉칠 수 없었다.
비오 대주교는 그것이 불만인 남자였다.
그는 이렇게 주장하곤 했다.
“주신께선 모든 신의 주인이시니, 마땅히 주신전의 이름 아래 모든 신전이 모여야 합니다.”
그는 ‘만신전’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신전을 하나로 통일하여, 그 권한을 강화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리고 정통성도 용혈도 옅은 루드비히는 신전과 붙어 부족한 권위를 채우려 애썼다.
당연히 이를 뒤에서 조종한 이는 에반젤린이었다.
내 지적을 대주교는 아주 매끄럽게 피해 갔다.
“아무래도 세간에 가장 많이 알려진 신물이다 보니, 사제라면 누구나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지요.”
원론적인 대답.
조금 전의 번뜩이던 안광이나 살짝 드러낸 탐욕과 달리, 비오 대주교는 쉽게 뒤로 물러났다.
“아, 그나저나 불청객이 귀하신 분들의 시간을 빼앗았군요.”
“아니에요. 뵈어서 기뻤습니다.”
“다음에는 정식으로 알현 요청을 드리고, 이번 무례를 사죄드리겠습니다.”
대주교는 갑자기 나타났던 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짧은 접촉이고 별것 없는 대화였지만, 힐리아는 확신할 수 있었다.
‘분명해. 여신의 신물에 관심 있지 않으냐고 물으니까 피하려 들었어.’
전생에는 그가 여신의 신물에 관심을 보이는 이유가 에반젤린 때문이라고만 여겼다.
숭배하는 여자에게 바치기 위해.
하지만 그게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 * *
비오 대주교가 돌아간 이후 다시 티 파티는 화기애애하게 진행되었다.
초대받은 귀부인 중 한 명이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소문이 사실이었던 모양이에요.”
“무슨 소문 말이죠?”
“황태자비 전하의 사교 모임에 참석하면 화제인 미남들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거요.”
지금 힐리아가 초대한 이들은 뮤젠 공작 부인과 가까운 중년 부인들이다.
그녀들은 아르파드나 뮤젠 소공작을 보고 수줍게 얼굴을 붉히는 영애들과 달리 좀 더 노골적으로 말했다.
“제가 요즘 시력이 안 좋아졌는데, 개안하는 기분이랍니다.”
“맞아요. 게다가 아까는 그 보기 힘든 분인 비오 대주교께서도 얼굴을 보이셨잖아요?”
“틀림없이 비 전하에 대한 소문을 듣고 확인하고 싶으셨던 걸 거예요.”
이 말에 아르파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워낙에 미세한 변화라 이를 눈치챈 이는 없었다.
하하 호호거리던 귀부인들의 대화는 마침내 오늘의 본론에 이르렀다.
“그나저나 공작 부인께서 황태자비 전하의 시녀장이 되시다니, 정말 부러워요.”
“맞아요. 축하드려요. 부인.”
“더없는 영광이라 최선을 다해야지요.”
오늘의 티 파티는 힐리아가 뮤젠 공작 부인을 시녀로 들였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게 하는 게 목적이었다.
힐리아가 백금 열쇠를 손에 넣은 것에 이어, 남부의 주인 뮤젠 공작가까지 흡수했다는 사실 말이다.
오늘 티 파티에 초대받은 이들은 전력을 다해 황도를 비롯한 제국 내 곳곳의 사교계에 이 소식을 전할 것이다.
그들을 보면서 힐리아는 흐뭇함에 젖어 있어야 마땅했다.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게 하던 원흉인 대주교도 사라졌으니까.
그런데 힐리아는 지금 불안감 가득한 눈으로 티 파티장 한구석을 지켜봐야 했다.
여성이 대다수인 이 자리에서 신분이 높은 두 남성이 따로 이야기 중이었다.
바로, 아르파드와 아론.
그것도 아르파드가 먼저 아론을 불러냈다.
“뮤젠 공자. 잠시 나와 환담할까?”
“영광입니다. 황태자 전하!”
아르파드는 그야말로 신이 조각한 듯 예술적인 선을 가진 미남이었고, 아론은 좀 더 선이 굵고 쾌활한 데다 그은 피부가 매력적인 전형적인 남부 미남이었다.
이런 미남 둘이 함께 서 있는 광경은 그야말로 그림 같았다.
여자라면 다들 시선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이 자리에는 힐리아와 뮤젠 공작 부인에게 호의적인 귀부인들이 대부분.
그들은 따로 아첨하려는 의도 없이 그저 순순한 마음으로 감탄했다.
“아르타누스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화하셨을 때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우셨다는데 아마 황태자 전하 같은 모습이 아니셨을까 싶어요.”
“정말이지, 황태자 전하께선 인간 같지 않은 미남이라 가까이 다가가기 좀 더 힘든 것 같아요.”
“맞아요. 거기다가 워낙에 위엄이 넘치시니, 대하기 힘든 것도 당연해요.”
힐리아는 마주 웃었다.
‘성격이 개차반이라는 걸 열심히 포장해서 말해 주는군.’
그래도 얼굴 칭찬에는 따로 포장이 필요 없는 수준이긴 했다.
진짜 그런 미남인 건 사실이니까.
곧이어 힐리아가 미처 예상 못 한 말들이 따라왔다.
“그런데 저는 황태자께서 저런 얼굴을 하시는 걸 보게 될 줄은 몰랐어요.”
힐리아는 의아했다.
저런 얼굴? 무슨 얼굴?
“요즘 들어서 깜짝 놀랄 정도로 다정하고 부드러운 표정을 하셔서, 저분이 용혈의 계승자라는 것도 잠시 잊을 정도예요.”
“비 전하 옆에 계실 때만 그러시죠.”
“꼭 비 전하 앞에서는 평범한 남편이 되시는 것 같아요.”
“…….”
힐리아는 얼굴에 홍조가 도는 걸 참지 못했다.
가슴이 간질거렸다.
이건, 꼭… 아르파드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심장에서 시작된 간질거림이 혈관을 타고 왼손 약지에 닿았다. 스타틸리아의 별을 끼고 있는 바로 그 손가락.
힐리아는 어째선지 그 손가락이 두근거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곧 자신의 설렘을 부정했다.
‘에이. 남들이 그렇게 말한다고 내가 착각해 버리면 안 돼. 이건 어디까지나 일을 잘한 협력자에게 준 선물이라고.’
그리고 사방에 ‘우리 사이가 좋아요’라고 과시하는 수단이기도 할 거다.
그렇다고 곧이곧대로 아니라고 할 순 없었다.
부정했다간 두 사람이 잉꼬부부라는 소문을 깨트리는 꼴이니까.
‘그래. 절대 내가 저 말이 듣기 좋아서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고.’
힐리아가 자신이 왜 부끄러워하는지도 미처 눈치채지 못한 사이, 수다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귀부인들은 황태자에 대한 경탄과 덕담에 입이 바빴다.
그다음 화제에 올려진 건 아론 뮤젠이었다.
“소공작께서 저렇게 장성하시다니. 공작 부인께서 든든하시겠어요.”
“열넷에 이미 토너먼트에서 우승하셨으니, 이젠 제국 제일의 기사라 불러도 손색이 없겠어요.”
“과찬이세요.”
공작 부인은 겸양하면서도, 자랑스러움을 감추지 않았다.
“안 그래도 아들을 슬슬 약혼시킬 때가 되어 황도로 올라왔는데, 비 전하께서 가까이 모실 수 있는 영광을 주셔서 정말 감사하고 있답니다.”
힐리아는 자연스레 말을 받았다.
“제가 나서지 않아도 소공작을 노리는 영애들은 줄을 서겠지만, 돕도록 하죠. 나중에 신부가 정해지면 제 시녀로 삼아 선물을 내릴게요.”
“감사합니다. 비 전하.”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예상 못 한 곳에서 분란이 일어나 박살 났다.
바로 귀부인들이 입 아프도록 상찬한 두 남자 사이에서였다.
어느새 아르파드의 미간이 찌푸려져 있었다.
그 앞에서 아론 뮤젠은 호전적인 미소를 지은 채, 정식으로 무릎을 꿇고 폭탄 같은 요청을 올리고 있었다.
“뮤젠 가의 후계자, 아론 뮤젠. 황태자 전하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영광을 청해도 될는지요!”
난데없는 대련 신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