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힐리아의 티 파티에 난입하는 데에 거리낌은 없었다.
‘남편이 아내를 보러 간다는데 어쩔 거야.’
그는 마음이 급했다.
한시라도 빨리 힐리아를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자신이 본 환상의 잔재를 씻어 내고 싶었다.
공포와 절망으로 얼룩진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힐리아의 모습도.
그녀를 위협하고 있던 자신의 환영도.
‘잠깐, 그러고 보니 그 환영에서까지 그 기사 놈이 힐리아 옆에 있지 않았나?’
힐리아를 지키려다 깊이 부상당한 듯한 모습이었다.
정말이지 낄 때 빠질 때를 모르는 자였다.
아니면, 자신이 그자가 너무나도 거슬려 환영 속에 포함한 것일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기분 나쁜 일.
동쪽 정원 크리스탈 파고라에 가까이 간 순간.
아르파드의 눈에는 온통 힐리아밖에 안 보였다.
온 정원에 고루 내리쬐어야 마땅한 햇살이 그녀에게만 모이고 있는 것처럼 반짝였다.
넋 놓을 정도로 예뻤지만, 진짜 넋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환영에서도 꼽사리 껴서 그를 불쾌하게 한 벨테인 경이 힐리아 곁에 있는 것도 거슬렸고.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그가 본 기사 중 가장 빼어난 기세를 가진 붉은 머리의 애송이도 눈에 띄었다.
‘아마, 저놈이 뮤젠 소공작이겠군.’
평소라면 눈엣가시로 여겼을 저 두 남자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힐리아의 상태가 이상했다.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고는 있었으나, 안색이 창백했다.
고운 입술을 살짝 깨무는 것도, 치마를 말아 쥐는 것도 두려움을 삼키기 위한 버릇이다.
누군가가 힐리아를 위협이라도 하고 있지 않은 한, 저런 반응은 나올 수 없었다.
‘어느 놈이지?’
아르파드의 눈빛이 매섭게 주변을 훑었다.
그보다 파고라 가까이 다가선 한 남자.
흰 법의 위로 검은 머리카락을 매끄럽게 늘어뜨린 우아하고 단정한 외모의 남자.
그자가 원흉이었다.
판단은 순간이었고, 발걸음은 그 전에 이미 힐리아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명색이 대주교라는 자가 황궁에서 길을 잃다니. 주신전은 사제 교육을 제대로 하지 않는 모양이군.”
자신을 향해 인사하는 이들을 없는 것처럼 무시하고, 한달음에 힐리아의 옆에 섰다.
자연스럽게 에스코트하기 위해 손을 잡았을 때, 아르파드는 낮게 혀를 찼다.
‘손이 차다. 게다가 식은땀이…….’
힐리아가 이렇게 동요하거나 무너지는 모습은 드물었다.
용의 혈통을 물려받은 황족 둘이 기세 싸움을 해도, 아무렇지 않게 움직이던 대담한 여자니까.
그나마 비슷한 모습이라면 쓰러져 앓던 때, 혹은… 마탑주를 만났을 때 정도였다.
그때 아르파드가 달려가 마주 본 힐리아는 평온하고 대담하던 평소와 조금 달랐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명백한 공포의 그림자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지금, 저 남자를 본 힐리아의 반응은 마탑주 때보다 더했다.
어쩌면 마탑주와 만난 직후에도 비슷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불타는 숯을 통째로 삼킨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대주교보다 힐리아의 상태를 안정시키는 게 우선이었다.
주변에 보는 눈이 많니 어쩌니 하는 건 문제가 아니다.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힐리아를 그가 견딜 수 없었다.
아르파드는 힐리아의 뺨에 키스하는 척하며 속삭였다.
“그냥 고갯짓으로만 대답해도 돼. 내 도움이 필요해, 힐리아?”
“……!”
* * *
“당신의 죄를 참회하세요.”
“남자를 끌어들이다니! 당신을 유혹했다뇨! 전 그런 짓을 한 적 없어요! 어째서 거짓말을 하시는 거죠? 대주교님!”
“이젠 대주교가 아닙니다. 추기경이지요. 제대로 부르세요. 아직도 제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니, 참회가 부족한 모양이군요.”
“당신, 처음부터 날 도와주려던 게 아니라 에반젤린의 편이었……!”
“당연하지 않습니까. 당신 따위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 사람은 없어요.”
그는 나를 참회시키겠다며 한 달 내내 지하의 어둠 속에 가둬 두었다.
식사는 굶어 죽지 않을 정도만.
빛을 볼 수 있는 순간은 사흘에 한 번, 체벌 사제가 와서 내 등을 가시나무 채찍으로 때릴 때뿐.
“살려, 살려 줘요!”
하지만 난 죽지 않았다. 죽을 정도로 상태가 심각해지면, 그가 신성력으로 목숨만은 붙여 놓았기 때문이다.
고통스러운 몇 달이 지나고, 나는 결국 순순히 그자가 내미는 진술서와 각서에 서명했다.
저지른 적 없는 죄를 인정하는 자백서.
그에 대한 참회의 명목으로 작위와 영지를 황실에 반환하고, 내 개인적인 모든 재산을 주신전에 바친다는 서류에.
그 대가로 대주교는 약속했다.
“걱정 마세요. 화형은 면하게 해 드리죠. 조용히 지내다 편하게 갈 수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그때의 나는 이미 모든 희망과 삶에 대한 의욕을 잃은 상태였다.
원하는 걸 얻어 낸 대주교는 나를 지방의 작은 수도원으로 치웠다.
그곳에서 감시받으며 온갖 허드렛일을 해야 했다.
하지만 어둠 속에 갇혀 가시나무 채찍질을 당하고, 온갖 고문을 당하던 것보단 훨씬 나았다.
그리고 약 1년 뒤, 나는 신전에서 자살로 위장하여 암살되었다.
비오 대주교를 보자, 두 번째 삶에서의 끔찍한 기억이 나를 덮쳤다.
최대한 티를 내지 않았다는 자신은 있었다.
정말 내가 괜찮은 게 아니었다는 걸…….
“그냥 고갯짓으로만 대답해도 돼. 내 도움이 필요해, 힐리아?”
아르파드의 낮은 목소리가 고막을 울렸을 때 절절히 실감했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이거나 눈짓만 보내는 게 아니라, 아르파드의 가슴팍에 안기며 속삭였다.
“필요해요. 엄청.”
* * *
아르파드는 힐리아를 끌어안은 채, 대주교를 노려보며 말했다.
“길을 잃었다 했나? 내 길잡이를 붙여 주지. 이만 가 보도록.”
아르파드는 벨테인 경에게 눈짓했다.
싫은 놈 옆에 짜증 나는 놈을 붙여 같이 치워 버리려는 심산이었다.
벨테인 경은 아르파드 다음으로 빠르게 힐리아의 상태를 눈치챘기에 충실이 명에 따랐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대주교님. 따라오시죠.”
그러자 비오 대주교는 사람 좋은 웃음을 만면에 띤 채 손사래를 쳤다.
“괜찮습니다. 굳이 황실 기사께서 길잡이가 되실 필요는 없습니다. 주신께서 제가 갈 길을 보우하실 테니까요.”
그는 빙긋 웃으며 한발 앞으로 다가섰다.
“아마도 주신의 이끄심이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귀한 분께서 여신의 파편을 지니고 계셨군요.”
대주교와 황태자 사이의 미묘한 긴장감에 다들 숨죽이고 있던 차였다.
약간 눈치 없는 귀부인이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아까 대주교님께서 황태자비 전하께서 신물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셨죠?”
대주교는 이걸 놓치지 않았다.
“맞습니다. 아마도 저 아름다운 반지가 그것인 듯하군요. 제가 가까이서 확인해 보는 영광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애초에 신물의 진품 여부는 교단을 막론하고 사제에게 확인받는 것이 기본이다.
그걸 생각하면 대주교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아르파드는 칼처럼 단호하게 잘랐다.
“싫다.”
“…예?”
“내가 아내에게 결혼반지로 선물한 이 물건은 ‘스타틸리아의 별’이야.”
주변에서 감탄과 탄성이 일었다.
스타틸리아는 봄의 여신, 모든 계절의 여왕이 제 축복을 담은 신성한 보석이었으므로.
대주교의 눈에 순간이지만 선명한 탐욕의 빛이 돌았다.
“내가 직접 구해 오고 확인한 물건이다. 왜 진위 여부를 신전에서 굳이 판명하겠다는 거지? 설마 내가 아내에게 가짜를 주었다는 건가?”
“그럴 리 있겠습니까. 저는 그저 호기심과 호의였을 뿐입니다.”
“황실에서 청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나서다니… 너무 과한 관심 아닌가?”
아르파드 덕분에 힐리아는 빠르게 안정을 찾았다.
그리고 곧 그의 지적이 맞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2회차 때 대주교가 내게서 빼앗아 간 재산 중에 아그리피나의 눈물이 있었지.’
힐리아의 외가로부터 물려받은 여신의 신물.
그때는 대주교가 자신에게서 빼앗아 에반젤린에게 바쳤으리라고만 생각했다.
어쩌면 그게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설마, 처음부터 내가 가진 여신의 신물을 노리고 있었던 거라면?’
회귀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퍼즐이 맞아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힐리아의 보라색 눈에 안개처럼 어렸던 두려움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녀는 눈을 빛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