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Chapter 12. 남편의 유혹
율켄이 세모눈을 하고 주인을 노려보았다.
“일주일이나 자리를 비우신 걸로 모자라, 이제는 태업하시는 겁니까?”
당장에라도 아르파드의 황태자 자리에 대한 자격을 통렬하게 비판할 기세였다.
“그동안 우리 비 전하께서 홀로 얼마나 고생하셨는데! 돌아오자마자 게으름이라니! 우리 비 전하의 남편 복이 이것밖에 안 된다니 슬픔을 금할 수가 없……!”
“…그만. 율켄.”
율켄은 머리가 좋고 그 이상으로 눈치가 빨랐다.
평소처럼 뻗댔다간, 아르파드가 대충 넘어가지 않으리라는 걸 눈치챘다.
율켄은 입을 댓 발로 내밀면서 ‘눼’ 하는 비비 꼬인 대답과 함께 서류를 한가득 쌓아 놓고 사라졌다.
도망갔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리라.
그 정도로 지금 아르파드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야 아내에게 고백하기도 전에 차인 남자가 기분 좋으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나?
아르파드는 율켄이 두고 사라진 서류를 보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내내 자신의 심기를 긁고 있는 물건을 꺼내 들었다.
힐리아에게서 얼렁뚱땅 받아 온(빼앗아 온) 반지.
‘루드비히 놈과의 결혼반지를 설마 아직도 가지고 있을 줄은…….’
게다가 어젯밤 그가 침실에 들었을 때 힐리아는 복잡한 표정으로 이 반지를 보고 있었다.
‘꼭 반지를 준 누군가에게 미련이라도 있는 것처럼…….’
뿌득! 단단한 흑단 책상의 모서리가 손아귀 힘에 박살 났다.
그 누군가가 책상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 순간이었다.
아르파드는 반지의 보석 세 개 중 하나가 반짝거리는 걸 본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
그와 동시에, 눈앞으로 암흑이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선 땅의 감촉이 바뀌고, 공기의 움직임과 온도가 바뀌었다. 비강을 훅 찌르고 들어오는 것은 진한 피비린내.
별조차 숨어 버린 검은 하늘에는 더없이 불길한 붉은 달이 떠 있었다.
그걸 올려다보면서 입술이 절로 움직였다.
“난 내가 언제 미쳐 버릴지 늘 두려웠거든. 특히나 어머니가 돌아가신 진홍월이 뜬 때에는 더 그랬지.”
지금의 자신이 한 말이 아니다. 과거에도 기억이 없는 말.
하지만 그가 할 법한 말이긴 했다.
대체 지금 자신은 누구에게 이 말을 하는 걸까?
이 의문에 대답하기라도 하듯 시야가 바뀌었다. 공포와 눈물로 얼룩진 보라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지금보다 훨씬 까칠하고 수척해 보이는 얼굴.
‘힐리아!’
분명히 그녀였다.
그리고 자신은… 그녀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었다.
“…헉!”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 아르파드는 여전히 집무실이었다.
손에 들린 루드비히의 결혼반지도 그대로였고, 박살 난 흑단 책상의 모서리도 기억대로다.
지독한 당혹감과 의문이 그의 머리를 지배했다.
한번은 힐리아의 옆에 누워서 잠들었을 때.
그리고 지금은 그녀의 전 약혼자가 준 반지를 들고 있을 때.
두 번의 환상에서 모두 힐리아는 두려워하거나 고통스러워하는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지독한 혼란이 먹구름처럼 아르파드의 머리를 뒤덮었다.
‘대체 뭐지, 이건?’
기분이 아주 더러웠다. 초조하고, 불안하고, 끔찍했다.
도저히 서류를 붙잡고 씨름하고 있을 수가 없어서 집무실에서 뛰쳐 나왔다.
곁방에서 서류가 다 처리되기만 기다리던 율켄의 가련한 외침은 귓등으로 흘려듣고서.
그렇게 상아의 침실로 왔을 때 거기는 텅 비어 있었다.
“…….”
비슷한 일이 저번에도 있었던 것 같은데.
아르파드는 기분이 더욱 저조해지는 걸 느끼며, 지나가는 하녀를 불러 물었다.
“지금 황태자비는 어디 있지?”
“동쪽 정원의 크리스탈 파고라에서 손님분들과 티 타임을 가지시는 중입니다.”
멀지 않았다. 바로 달려갈 수 있는 위치.
“어떤 손님이지?”
누구라 해도 아르파드가 난입하는 걸 막거나, 거부할 수는 없지만.
하녀의 대답에 아르파드는 입매가 굳는 걸 감추지 못했다.
“뮤젠 공작 부인과 소공작을 만나고 계십니다.”
“…….”
뮤젠 소공작이라면, 그 남자다.
감히 힐리아에게 자수정 보석 세트를 바친 놈.
‘안 그래도 거슬리는 놈이었는데, 더 마음에 안 드는군.’
초조함이 치받아, 아르파드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 * *
오센 산 투명한 유리는 아주 귀한 물건이다.
물처럼 투명하고, 유리임에도 강철처럼 단단해서 더욱 귀중하게 여겨진다.
그 오센 산 유리로만 짜 맞추어 만들어진 동편 정원의 구조물은 크리스탈 파고라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주변에는 귀한 꽃과 나무를 심었고, 그 안에서 파고라는 마치 거대한 보석처럼 빛났다.
뮤젠 공작 부인은 황홀한 표정으로 파고라와 주변 광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도 이곳엔 처음 초대받아 본답니다. 정말로 영광입니다. 비 전하.”
힐리아는 부드럽게 웃었다.
“이제 곧 집처럼 자주 드나드시게 될 텐데요, 뭘.”
그녀는 힐리아가 자수정 목걸이와 브로치를 달고 나온 것을 보고 만족스러워했다.
‘나에 대한 호의를 대놓고 표시해 주시는군.’
그런데 황태자비에게서 한 가지 이색적인 것이 눈에 띄었다.
뮤젠 공작 부인은 조심스레 물었다. 그녀로서는 도저히 안 물어볼 수 없었다.
“그런데 비 전하. 그 아름다운 반지는 어떤 것인가요? 심상찮은 물건인 듯한데요.”
공작 부인의 안광이 번뜩였다.
힐리아는 새삼 깨달았다.
‘아, 스타틸리아의 별이 연보라색이니, 공작 부인이 좋아하겠구나.’
공작 부인이 먼저 말문을 터 주었고, 주변에는 공작 부인이 데려온 호의적인 귀부인 서넛이 있었다.
소문내기 딱 좋은 상황.
힐리아는 왼손으로 입가를 가려, 반지가 유달리 잘 보이도록 했다.
“아, 그이가 어제 선물해 준 거랍니다.”
“어머, 세상에!”
“하긴, 대단한 물건인 것 같기는 했어요.”
그때, 정원 구석에서 갑작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례지만, 황태자비 전하. 그 보석은 혹시 신물이 아닌지요?”
남성의 목소리이지만 명백한 미성.
그럼에도 힐리아는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 목소리는…….’
심장이 불길하게 두근거렸고, 입 안이 바짝 말라 왔다.
하지만 외면할 수는 없다. 힐리아는 고개를 돌렸다.
길게 기른 밤처럼 검은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단정하게 묶었고, 우아한 회색 눈동자가 침착하게 빛났다.
신성한 흰 법의와 주신(主神)전의 문양이 어깨에서 금색으로 반짝였다.
기억 그대로였다.
벨테인 경을 비롯한 황실 기사들이 경악해서 파고라 앞을 막아섰다.
“누구냐?!”
“침입자인가?!”
그들은 놀라고 있었다.
저 남자가 말하기 전까지는 전혀 기척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뮤젠 공작 부인을 비롯한 귀부인들이 작게 환성을 내질렀다. 그녀들의 눈이 번쩍거렸다.
“어머! 비오 대주교님!”
그제야 기사들은 자신들이 이 남자의 기척을 느끼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대주교 자리에 오를 정도로 강력한 신성력을 가진 이에겐 당연한 일이었다.
귀부인들이 경계심 없이 재잘거렸다.
“대주교님께서 어떻게 이곳에 오신 거죠?”
“저는 대주교께서 안식년이라 동쪽으로 가 계신다고 들었는데요.”
“그동안 신앙에 소홀했는데, 대주교님께서 오셨으니 다시 신앙심을 되찾을 수 있겠네요.”
비오 대주교는 침착하고 예의 바르게, 귀부인들의 호들갑에 대응했다. 아주 익숙한 태도였다.
“얼마 전에 돌아왔습니다. 황제 폐하를 뵙고 돌아가는 길에 정원을 구경하다 길을 잃었는데, 우연히 여기까지 닿게 되었군요.”
그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이 자리의 주인인 힐리아에게 사죄했다.
“갑작스럽게 끼어들어 놀라셨겠군요. 죄송합니다. 황태자비 전하.”
다들 흥미 어린 눈으로 힐리아와 대주교를 번갈아 가며 보았다.
“한데, 방금 신물이라고 하셨지요?”
“그게 정말인가요? 비오 대주교님?”
“황태자비 전하께서 신물을 가지신 건가요?”
그는 신성력에 각성한 사제였으므로, 신물을 바로 알아봐도 이상하지 않았다.
힐리아는 아무렇지 않은 듯, 침착하게 인사를 받았다.
“처음 뵙는군요. 비오 대주교. 천신의 정의가 함께하시길.”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비 전하. 천신의 빛살이 전하의 어깨에 내리시길.”
처음 만나는 듯 굴었지만, 힐리아는 이 남자에 관해 알고 있었다.
전 대륙 모든 신전을 통틀어 최연소 나이에 대주교의 자리에 오른 자이며, 장차 모든 신전의 기록을 갈아치우며 최고의 자리에 오를 남자.
‘에반젤린의 강력한 협력자 중 하나이기도 하고…….’
동시에 힐리아가 첫 회귀 후 결혼을 피해 신전으로 도망쳤을 때 도와준 이였다.
힐리아는 그를 진심으로 믿고 의지했으나, 처참하게 배신당했다.
비오 대주교는 힐리아를 더러운 명분으로 신성 재판에 회부했고, 이것은 힐리아가 두 번째 생에서 모든 걸 빼앗긴 채 지방 작은 수도원에 갇히는 원인이 되었다.
“이 죄 많은 여인은 신전에 의탁한다는 명목으로 수많은 사내를 끌어들였고, 저마저 유혹하려 들었습니다.”
그때의 지독한 배신감과 상처가 새삼스레 치솟으려 했다.
많은 경험으로 티를 내지 않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술렁거리는 마음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그때였다.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고, 예상하지도 않은 이가 나타나 힐리아의 불안을 깡그리 날려 버린 것은.
“명색이 대주교라는 자가 황궁에서 길을 잃다니. 주신전은 사제 교육을 제대로 하지 않는 모양이군.”
“황태자 전하!”
“저, 전하!”
모두가 놀라 일어선 사이, 아르파드는 성큼성큼 걸어와 힐리아의 옆에 섰다.
그리고 아내에게 자연스럽게 인사하는 듯 뺨에 키스하는 척하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힐리아의 귀에만 들리도록.
“그냥 고갯짓으로만 대답해도 돼. 내 도움이 필요해, 힐리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