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다른 이들이 들으면 놀랄 테지만, 아르파드 이스트리드는 본인의 인생에 큰 불만이 없었다.
어릴 때 모친을 잃고, 부친에게 경계 받고, 계모는 호시탐탐 그를 죽일 기회만 노리는 인생.
거기에 언제 미쳐 죽을지 모른다는 게 더해지면 누구든 측은함이 생길 것이다.
비극으로 점철되었다고 봐도 좋은 인생이었으니까.
그래서인지 그의 상처를 보듬어 주겠다며 접근하는 여자들이 꽤 있었다.
“저만은 전하의 상처를 알아요. 제게는 털어놓으셔도 돼요.”
“…전부 감싸 안아 드릴 테니까.”
“제 앞에서는 약해지셔도 괜찮아요. 오라버니.”
본인이 알면 수치스러워하고 분노할 테지만, 별다른 인상을 남기지 못한 여자 중에는 에반젤린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과 달리 아르파드는 딱히 상처투성이인 인간이 아니었다.
장애물이 많은 삶이긴 하지만, 그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쥐고 태어난 것이 많았다. 그러니 딱히 불만은 없었다.
신경 쓰이는 건 동정심이었다. 동정심은 두려움보다 몇 배로 끔찍한 감정이었다.
그래서 힐리아가 흥미로웠고, 관심이 갔다.
“용병왕 제랄드의 정체가 황태자 아르파드 전하라는 걸 모두가 알게 될 거예요.”
아르파드의 정체를 알면서 접근한 이 중에 이런 여자는 처음이었다.
짐짓 자애롭고 다정한 이처럼 그의 상처를 보듬어 주겠다고 하지 않은 여자는.
‘오히려 협박했지.’
약탈혼 하지 않으면, 그의 비밀을 발설할 거라고 말이다.
그녀는 그를 동정하지 않았다.
그때는 미처 몰랐지만, 그는 이 사실에 꽤 만족하고 있었다.
정말로 특이한 여자였다.
이 여자와 함께하면서 태어나 처음 경험하는 감정을 여럿 겪었다.
그럼에도 아르파드는 이 순간까지 제 감정에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하는지 몰랐다.
힐리아를 약탈할 때도.
키스하고 혼인 성사를 할 때도.
말도 안 되는 연극을 함께하고, 한 침대에서 잠들었다가 일어날 때도.
그녀의 옆에 선 기사를 보고 가슴이 들끓을 때도.
외조모에게 예물에 관해 지적받고, 충동적으로 뛰쳐나왔을 때조차.
사실 이건 불필요한 일이었다.
따로 마련해 준 결혼반지나 예물은 없었지만, 그들이 혼인 성사를 올린 별궁에 궁인들이 준비해 둔 보석류가 있었다.
그중 적당한 반지를 골라 힐리아의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지금은 그걸 ‘결혼반지’라고 말하기 싫었다.
이게 어떤 의미인지 아르파드는 눈치채지 못했다.
자신을 이렇게 움직인 동력이 무엇인지.
부하들을 닦달해서 일주일 만에 유적을 공략하고, 한숨도 쉬지 않고 달려오는 미친 짓을 저지르고, 그녀에게로 돌아온 이 순간까지도 말이다.
자신은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남자가 틀림없다.
힐리아의 손에 ‘저 반지’가 들려 있는 걸 보고 겨우 깨달았다.
소중한 계절이, 처음 피어난 봄이 침범당했다는 것을.
그는 명백히 ‘질투’하고 있었다.
질투라는 건 결국 한 감정이 기반에 존재하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 * *
그전에는 분홍색이나 보라색에 그다지 눈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힐리아를 만난 후 유달리 분홍색을 볼 때면 그녀의 머리칼을 만지고 싶어졌고.
보라색을 볼 때면 그녀의 눈꺼풀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이 모든 깨달음이 영혼에 인두로 지진 듯 박혔다.
힐리아의 손에 루드비히 놈이 줬을 결혼반지가 들려 있는 걸 본 순간.
저도 모르게 얼음을 씹듯 물었다.
“그걸, 아직 가지고 있었나?”
“아!”
힐리아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손이 먼저 움직였다.
힐리아의 손에서 루드비히 놈의 반지(그는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를 빼앗았다.
그러고는 힐리아의 왼손 약지에 자신이 구해 온 것을 끼워 주었다.
처음부터 이 가늘고 매끄러운 손가락에 끼워지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처럼 반지는 부드럽게 힐리아의 손과 맞물렸다.
비로소 아르파드는 미소 지었다.
있어야 할 것이 제자리를 찾은 듯한 만족감이었다.
그는 비로소 인정했다.
‘질투’에 이어 그 기저에 깔린 감정을.
태어나 처음 경험하는 거라 자각이 늦었다.
늘 네 계절을 감흥 없이 보내온 아르파드에게 이제 봄은 유일하게 특별한 계절이 될 것이다.
이 봄에 처음 만난 여인이 있기 때문에.
봄에 피는 꽃이 떠오르게 하는 여자가 지금 눈앞에 있으니까.
뒤늦게 깨달은 그의 감정이 그녀의 손에서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아르파드는 마침내 자신의 사랑을 인정하고, 그 앞에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제 사랑의 손등에 키스했다.
* * *
아르파드는 갑자기 힐리아의 손에 반지를 끼우더니, 손등에 키스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웃었는데…….
힐리아는 아르파드를 보고 경악했다.
‘뭐야? 왜 저렇게 웃어?’
처음 보는 웃음이었기 때문이다.
힐리아가 아는 아르파드의 웃음은 크게 두 종류였다.
1) 비웃음
2) 어떻게 죽일지 고민할 때의 웃음
물론 가끔 소년처럼 웃는다는 감상을 느낄 때는 있었다.
하지만 ‘이런 표정’은 처음이다.
외면을 단단하게 감싸고 있던 갑옷이 무너져 내리고, 안에 숨어 있던 진짜 아르파드라는 인간이 드러난 듯한 미소.
한참 동안 아르파드의 미소에 정신을 빼앗겼다.
반지를 뺏긴 것도, 손에 끼워진 화려한 연보라색 반지도 잠시 까먹었다.
정신을 차린 건 아르파드의 안 어울리는 나긋나긋한 질문을 듣고서였다.
“내가 없는 동안 별일 없었나?”
“어, 네?”
힐리아는 아르파드에게 홀려 있다가 겨우 정신 줄을 잡았다.
그리고 아르파드가 없는 동안 수없이 생각해 둔 말을 다급하게 쏟아 냈다.
“아! 거, 걱정 말아요. 완벽하게 처리해 뒀으니까. 당신의 부재는 밖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어요!”
“그걸 묻는 게 아니야.”
“네?”
“당신에게 아무 일 없었는지 묻고 있는 거지.”
“…네?”
“식사는 잘했는지, 잠은 잘 잤는지.”
“…네?”
힐리아의 멍한 ‘네?’ 삼 연타에 아르파드는 작은 속삭임으로 답했다.
“내가 없는 동안 당신의 상황이 궁금했어. 계속. 걱정되고.”
결국 힐리아는 진심으로 물었다.
“당신 뭐 잘못 먹었어요?”
이번엔 아르파드가 ‘뭐?’라고 대답할 뻔했다.
잠시 혼란해하던 아르파드는 곧 떠올릴 수 있었다.
평소 자신의 말투를.
그리고 이에 대한 율켄의 비판도.
“저도 그다지 좋은 성격은 아니지만, 전하의 말씀을 듣고 있다 보면 제가 충분히 다정한 인간이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조심해야겠습니다. 전하를 기준으로 삼았다간, 애인에게 수십 번 차이고 노총각으로 늙어 죽을 겁니다.”
그리고 힐리아가 일에 관해 말하면 이전에는 이렇게 말했을 거다.
“그 정도 해 주지 않으면 곤란하지.”
새삼 과거의 업보가 덮쳐 오는 느낌에 아르파드는 이마를 짚었다.
그러자 힐리아는 벌떡 일어나서 얼굴을 들이댔다.
“왜 그래요? 진짜 어디 안 좋기라도 해요?”
명백한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
이 간단한 말 몇 마디에 바닥으로 추락하던 아르파드의 기분이 건져 올려진다.
아르파드는 웃음이 나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그 정도로 자신의 변화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힐리아가 저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니. 아무 이상 없어.”
“하긴. 쉽게 아플 사람이 아니지.”
힐리아는 아르파드의 차림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말했다.
“그런데 어딜 다녀왔기에 이렇게 화려하게 치장했어요? 혹시 애인이라도 만나고 온 거예요?”
“…….”
아르파드는 조금, 아니, 매우 서러워졌다.
방금 그녀를 사랑한다는 걸 깨달았는데, 당사자에게 바람피우고 왔냐는 질문을 듣는 건 좀 심하지 않나?
게다가 질투하거나 견제하는 말투도 아니다.
그 사실이 매우 심기에 거슬렸다.
‘여기서 또 비꼬거나 화를 내서는 안 된다. 아르파드 이스트리드.’
아르파드는 학습 능력이 뛰어난 편이었다.
힐리아에게 신뢰를 주어야 한다. 그게 최우선이었다.
아르파드는 조금 전보다 더욱 상냥해 보이도록 미소를 그려 냈다.
그리고 내뱉을 말을 신중히 골랐다. 최대한 부드럽고 다정한 것으로.
시비 걸거나 비꼬는 말투는 안 된다.
“아니. 애인이라니. 몇 번이나 말했지만, 나에겐 애인이 없어. 아내뿐이지.”
“…?”
힐리아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녀는 아르파드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면서 관찰하다가 물었다.
“아르파드가 맞긴 한데?”
“이렇게 예술적으로 생긴 남자가 또 있을 리는 없지. 그대의 남편 아르파드가 맞아.”
“…이 뻔뻔한 자화자찬을 보면 진짜 아르파드가 맞는데…….”
힐리아는 진심으로 혼란스러워 보였다.
“불안하게 왜 이래요?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을 날이 가까워진 거라던데. 무섭잖아요.”
아르파드는 잠시 헷갈렸다.
자신에 대한 힐리아의 신뢰가 바닥이라는 걸 슬퍼해야 할지.
아니면 힐리아가 자신이 죽을까 봐 걱정하는 것에 기뻐해야 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