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아르파드는 일주일 안에 돌아오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그 일주일째였다.
하지만 밤이 될 때까지 이 인간의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아직 혼자 침대 위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대체 뭔 일 때문에 이렇게 오래 자리를 비우는 거야? 혹시 오늘도 안 오려나?’
일정에 하루 이틀 정도 오차가 생기는 건 흔한 일이다.
단순히 길이 막혔다거나, 무슨 사고가 생겼다거나…….
‘그럴 확률은 매우 낮지만 어디 다쳤다거나?’
가능성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덜걱거렸다.
그러다가 생각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튀었다.
‘혹시 그 ‘애인’을 드디어 만났다거나?’
지난 세 번의 삶에서 아르파드의 비밀 연인에 대한 소문이 없던 적은 없었다.
“황태자가 연인을 잃고 광증에 빠졌다.”
이건 꽤 극적이고 로맨틱한 일이라, 사람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회자되었다.
아버지인 황제도 그렇게 알고 있었고.
하지만 얼마 전 아르파드 본인이 내 앞에서 강력하게 부정했었다.
“나는 애인을 따로 둘 생각이 없어.”
다시 생각해 봐도, 그때 아르파드의 어조는 거짓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굳이 그럴 이유도 없었고.
내가 몇 번이나 애인을 둬도 좋다, 원할 때 이혼해 주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 내 앞에서 굳이 숨길 필요는 없으리라.
아르파드가 돌아왔을 때 혹시 애인을 만나고 온 게 아니냐고 물으면…….
‘틀림없이 화내겠지.’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일 그가 화를 내지 않고 긍정한다면?
그래서 내가 한 약속을 지켜 달라고 요구한다면?
“…….”
나는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고 울화가 치미는 걸 느꼈다.
이 비슷한 감정을 전에도 느껴 본 적이 있었다.
‘에반젤린이 루드비히의 애인이라는 걸 알게 된 직후에 이랬었지.’
루드비히를 사랑하진 않았어도, 남편으로 믿었고, 에반젤린은 친구라고 생각했었다.
두 사람 모두에게 배신당한 기분은 정말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참담했다.
지금이야 분노와 복수심뿐이지만, 한때 진심으로 상처받은 적이 있었다.
‘왜 그때 기억이 떠오르는 걸까.’
그때의 슬픔과 분노까지.
현실로 닥친 게 아니라 상상일 뿐인데.
루드비히와 에반젤린에게 배반당했을 때보다, 더 화나고 슬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기분이 우울해지려 해서 당황스러웠다.
넓은 침대에서 일주일 동안 혼자 잤다고 이렇게 기분이 가라앉다니.
사람의 체온이 주는 안정감이 내 예상보다 몇 배로 컸던 모양이다.
‘아르파드가 애인을 달고 돌아온 것도 아닌데……!’
복수만 생각해도 모자란 이 시기에!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어서 부정적인 생각을 털어 버린 뒤 오늘 내 소득이나 확인하기로 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테이블에 있는 화려한 보석 상자를 들어 올렸다.
뮤젠 공작 부인과 소공작이 나에게 바치고 간 것이다.
내가 공작 부인의 목숨을 구한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
거기에 나에 대한 지지를 확실하게 표하겠다는 의미로 말이다.
상자를 열자, 반짝거리는 자수정 티아라와 목걸이, 귀걸이, 브로치가 있었다.
보라색 마니아 뮤젠 공작 부인은 영롱한 자수정을 선물로 줬다.
부인이 젊은 시절 직접 쓰던 것이라 하더니, 보석의 질과 세공이 훌륭했다.
공식 석상에서 서기 위해 치장할 때 이 한 세트만 있으면 될 정도다.
물론 목숨을 구해 준 것만으로 그들이 나를 지지하겠다 결정한 건 아니었다.
연이어 내가 알려 준 정보가 결정적으로 그들을 움직였다.
“그녀가 치료제를 가지고 거기 있었던 게 과연 우연일까요?”
공작 부인이 루피스 꽃 알레르기 발작을 일으켰을 때, 바로 그 자리에 에반젤린이 약을 가지고 있었다.
소공작은 내 말뜻을 알아듣고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비 전하께서는 계획된 일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나는 당연히 그들이 가질 의문을 역으로 먼저 입에 담았다.
“루스 후작 영애 혼자 거기 있었어도 우연이라고 보긴 힘들었을 거예요. 그런데 나까지 약을 들고 나타났죠. 이게 우연으로 가능한 일일 것 같나요?”
“말씀대로면, 황태자비 전하나 루스 영애 중 한 명이 어머니를 해치려 했다고밖에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나는 웃으며 애니에게 화분을 하나 들고 오도록 했다.
“공작 부인께 드리는 선물이에요.”
그건 붉은 루피스 꽃이 흐드러지게 핀 화분이었다.
그리고 화분이 들어와도 공작 부인과 소공작은 경악하거나 분노하지 않았다.
그저 의아해할 뿐.
‘역시 알레르기 원인이 뭔지 모르는 거네.’
공작저로 돌아간 후 의사를 불렀을 테니, 알레르기 반응이라는 건 알았을 거다.
하지만 원인이 뭔지는 알지 못하고 있었겠지. 알레르기의 원인은 원체 다양하니까.
나는 이 화분을 공작 부인의 앞에 놓도록 하며 설명을 시작했다.
“공작 부인께서 그날 쓰러지셨던 건 이 꽃에 대한 반응 때문이에요. 기억나죠? 루스 영애가 모습을 드러낸 테라스에 이 꽃 덩굴이 있었던 것.”
그러자 공작 부인은 경악해서 일어섰고, 소공작은 모친의 앞을 막아서며 나를 경계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어머니께 또……!”
“걱정 마요. 괜찮죠, 공작 부인?”
“…어? 아, 그렇군요. 가렵지도 않고 숨쉬기 어렵지도 않아요.”
“이 꽃이 어머니께서 쓰러진 원인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지금 공작 부인은 멀쩡하다. 당연히 이상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나는 화분을 톡 치며 말했다.
“마법적인 처리를 한 화분이에요. 꽃가루나 향기 등이 전혀 새지 않게 한 거죠. 직접 만지지만 않으면 괜찮을 거예요.”
“…!”
“내가 지난번에 준 약은 아직 한참 남았을 거고, 이 꽃도 있으니 저택으로 돌아가 안전하게 확인해 볼 수 있겠죠. 이게 공작 부인이 쓰러지게 만든 원인이라는 걸요.”
그러자 안색이 창백해져 있던 공작 부인이 아들보다 먼저 침착함을 되찾았다.
“외람되지만 전하. 그것만으로 그날의 일을 꾸민 게 비 전하가 아니라는 증거는 되지 않습니다.”
“당연하죠. 나는 부인이 똑같은 일을 겪지 말라고 이 정보를 알려 주는 거니까요.”
공작 부인의 표정에 경탄이 어렸다.
그녀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바로 알아차렸다.
“제가 쓰러졌을 때, 루스 영애는 아무 말도 없이 사라졌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비 전하께선 전부 말씀해 주시는군요.”
그녀는 나를 탐색하듯 물었다.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그저 순순한 호의로 알려 준 것일… 리가 없겠죠?”
“…!”
“원인을 알고 위험을 피했으면 하는 마음도 있지만, 공작 부인이 루스 영애에게 속아 뮤젠 가가 넘어가면 많이 곤란하기 때문이에요.”
내게도 이득이라 도와준 거다, 라고 말했음에도 공작 부인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더 짙어졌다.
나는 몇 마디를 더 덧붙였다. 내 발언에 신뢰를 더할 수 있는 약간의 정보.
“진상을 확인하고 싶으시면 루스 영애가 모습을 드러낸 건물의 명의에 대해 알아보면 도움이 될 거예요.”
“…감사합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의문이 가는 부분이 있군요. 저도 몰랐던 제 알레르기를 루스 영애가 어떻게 알았을까요?”
“글쎄요. 저는 그저 루스 영애의 움직임을 감시하다 알게 된 것뿐이니까요.”
이것만은 대답할 수 없다.
에반젤린이 빙의자라 원작을 읽어서 알 거라고는.
아마 공작 부인은 황도와 본가의 공작저 내부 단속을 더 철저히 하겠지.
공작 부인과 소공작은 내가 원한 대로 판단을 내린 듯했다.
‘황후와 에반젤린이 공작 부인의 목숨을 농락해서까지 뮤젠 공작가를 끌어들이려 했다’라고.
그게 사실이기도 했고 말이다.
결국 공작 부인은 시녀장 자리 제안 역시 수락했다.
“황실에 봉사할 수 있다니 영광입니다, 비 전하. 그리고 생명의 은인에게 바치는 선물이니, 부디 받아 주십시오.”
이 자수정 장신구 세트도 바쳤고.
나는 뿌듯한 표정으로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좋아. 아르파드가 오면 자랑할 게 하나 더 늘었네.’
곧 티 파티를 열 예정인데, 그때 이 세트로 치장하고 공작 부인을 시녀장으로 대동할 예정이다.
뮤젠 공작가가 내 손에 들어왔다는 걸 알려 주는 데 그보다 효과적인 방법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거랑 같이 끼고 갈 반지는 뭐로 하지.’
나는 설렁줄을 당겨 애니를 불렀다.
“이 자수정과 어울릴 만한 반지를 전부 가져와 줘.”
“예. 비 전하!”
애니는 싱글벙글 웃으며 반지 상자를 가져왔다.
반짝거리는 보석의 홍수 속에서 나는 자수정과 어울릴 만한 반지를 찾았다.
“같은 자수정 재질도 괜찮을 것 같고, 티아라에 핑크 다이아몬드가 어우러져 있으니 핑크색이나 붉은색도 좋겠네.”
그때 반지들 사이에 낀 익숙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보랏빛 다이아몬드 세 개가 꽃잎처럼 세팅된 금반지.
회귀 때마다 빛이 하나씩 사라지더니 이젠 평범한 보석처럼 빛나는 그 결혼반지였다.
매번 회귀하여 눈을 뜰 때마다 내 손에 끼워져 있던 그것.
애니는 경악해서 내게 사죄했다.
“죄, 죄송합니다. 비 전하! 제가 미리 치웠어야……!”
하긴, 이건 루드비히와의 결혼반지였다. 애니가 질색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아냐. 애니.”
그러고 보니, 이거 원래 황실의 보물 중 하나였지?
나는 그 반지를 들어 올리면서 새삼스레 생각했다.
‘그래, 이것에 대해서도 알아봐야겠어. 그동안 잊고 있었는데…….’
그때였다. 침실 문이 예고도 없이 벌컥 열렸다.
“누구냐?! 아, …저, 전하!”
애니가 경악하여 비난하려다가 문장 끝이 수그러들었다.
갑작스러운 침입자가 일주일 만에 모습을 드러낸 아르파드였기 때문이다.
“힐리아!”
“아, 어서 와요. 아르파드.”
애니는 재빠르게 자리를 피했다.
“…….”
“…….”
짧은 인사 뒤에는 애매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아르파드의 시선이 한 곳에만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들고 있는 루드비히와의 결혼반지였다.
“그걸, 아직 가지고 있었나?”
밤송이를 통째로 입으로 씹는 듯 껄끄러운 어조였다.
덕분에 나는 아르파드가 이 반지가 뭔지 알고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남편 앞에서 전 약혼자와의 결혼반지를 들고 있는 여자가 어떻게 보일지 고민했다.
음, 우리가 진짜 부부가 아니라서 천만다행이다.
그 순간, 아르파드가 손을 뻗어 루드비히와의 결혼반지를 빼앗듯이 가져가 버렸다.
“어?!”
그러더니 다른 손은 내 왼손을 단단히 잡았다.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는 것처럼.
연이어 아르파드의 품속에서 번쩍거리는 것이 튀어나왔다.
그는 아무런 말 없이 내 왼손 약지에 그 요란할 정도로 반짝거리는 걸 끼웠다.
내가 아는 물건이었다.
‘이게 왜 여기서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