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그러자 뮤젠 공작 부인이 깜짝 놀랐다.
“아! 제가 말실수를 했네요! 제 말은, 비 전하의 눈 색이 너무 예뻐서 홀린 것처럼 보고 있었다는 소리예요!”
아.
맞다. 뮤젠 공작 부인의 보라색 사랑은 유명했다.
그리고 내 눈 색도 보라색이지. 위험한 오해를 할 뻔했네.
나는 안도하며 웃을 수 있었다.
“하지만 부인의 눈 색도 아주 예쁜걸요.”
공작 부인의 머리 색도 보라색… 아, 맞다. 저건 염색이라고 했지.
그러자 공작 부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파란색이 나쁜 건 아니지만, 역시 보라색에는 감히 댈 수 없죠.”
그녀는 아쉬움이 철철 넘치는 시선으로 아들의 눈을 보았다.
“사실 아이를 낳으면 남편의 눈을 닮길 바랐답니다. 남편은 아주 예쁜 보랏빛 눈동자를 가졌거든요.”
설마 남편감을 눈 색 보고 고른 건 아니겠지?
공작 부인은 어쩐지 아련한 눈빛으로 말했다.
나는 저 눈빛이 기억에 남아 있었다.
‘회귀 전에 별로 접점 없는 나를 볼 때마다 공작 부인이 늘 묘한 눈빛을 했는데… 설마 이것 때문이었나?’
나는 그때 공작 부인에게 미운털이 박힌 줄 알았었다.
“그래서 며느리나 손주는 꼭 보라색 눈이었으면 좋겠어요.”
“어머니!”
아론은 어머니의 지나친 색깔에 대한 편애에 얼굴을 붉혔다.
‘음, 어머니의 주접이 좀 부끄러운 모양이네.’
대륙 제일의 기사니, 소드 마스터니 하고 불릴 사람이지만, 아직은 열여덟 살.
청년과 소년의 경계에 있는 나이였다.
그래서 그런지 꽤 귀여워 보였다.
나는 사이좋게 아웅다웅하는 모자를 보며 기분 좋게 웃었다.
“사이가 좋으시군요. 보기 좋아요.”
그러자 더 부끄러운지 아론의 얼굴은 머리 색과 거의 구분이 힘들 정도로 빨개졌다.
여하튼 공작 부인은 여전히 꿈꾸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정확히는 내 눈을 보고 있었다.
“정말 아름다운 눈 색을 가지셨어요. 부럽네요. 젊은 시절에는 눈 색을 바꿀 수 있는 마법이나 시술이 있나 찾아볼 정도였답니다.”
“…….”
음, 공작 부인은 내가 아는 것보다 훨씬 과격한 보라색 마니아였던 모양이다.
어쨌건 목숨을 구한 것 외에도 뮤젠 공작 부인이 나에게 호감을 가질 요소가 하나 더 늘어난 거니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바라는 건 이 정도에서 끝이 아니었다.
나는 본론을 꺼냈다.
“아직 황태자궁의 정리가 다 끝나지 않아 대공비 전하께 시녀장을 부탁드리긴 했지만, 나이 든 분께 너무 무거운 짐이 아닐까 걱정이랍니다.”
시녀장으로서 내 옆을 지키고 있던 대공비는 놀라지 않았다.
이미 사전에 이야기가 다 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애초에 대공비에게 시녀장을 맡기기엔 신분이 너무 높고, 나이도 많았으니까.
‘그래서 부러 임시 시녀장이라 명시한 것이기도 하고.’
사실 악시온 대공비를 시녀장 자리에 앉히겠다고 말했을 때 아르파드는 조금 걱정했었다.
나이 든 외조모가 혹사당할까 걱정한 건 아니었다.
“너무 서부에 치우친 거 아니야?”
내 권위와 힘을 세우는데 서부의 역할은 컸다. 하지만 그만큼 내가 그들에게 빚을 지는 게 된다.
과하면, 결국 서부가 나에게 끼치는 영향력이 내 힘을 누르는 역효과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
아르파드는 그걸 걱정하고 있었다.
나는 이를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임시예요.”
“진짜 시녀장 감은 따로 있다는 건가?”
“맞춰 볼래요?”
“…지나치게 한쪽에 치우치지 않으려면 북부 혹은 남부지. 북부는 지나친 폐쇄성을 지니고 있고, 테슬란 공작가는 지금 안주인 자리와 마땅한 공녀가 없는 걸 생각하면 남부겠군.”
“정답.”
아르파드는 호기심 가득한 미소를 띤 채 나를 보았다.
“이번엔 또 어떤 마법을 써서 사람을 홀릴 건지 궁금하군.”
“난 마법사가 아니라니까요.”
“어쨌건, 이번에도 당신의 능력을 잘 감상해 볼까.”
“기대해도 좋아요.”
하지만 지금 아르파드는 자리를 비웠다.
어째선지 모르겠지만 억울함과 서운함이 울컥 치솟으려 했다.
‘옆에서 지켜보겠다고 해 놓곤 어디로 간 거야, 대체.’
지금은 이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바로 알아듣고, 공작 부인이 물었다.
“설마 제게 시녀장 자리를 제안하시는 겁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공작 부인께서 저를 옆에서 도와주시면서 잘 가르쳐 주셨으면 해요.”
“영광스러운 제안이지만, 너무 갑작스러워서…….”
내 보라색 눈을 소녀처럼 바라봤던 공작 부인이 입매를 굳혔다.
그 자리에 남은 건 남부를 지배하는 대가문의 안주인.
내 시녀장이 된다는 건 뮤젠 공작가 전체가 황후 일파와 척을 진다는 소리다.
그녀 입장에서는 아직 상황 파악도 끝나지 않았는데 벌써 내 편만을 들어줄 이유가 없었다.
‘물론 내가 목숨을 구해 주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겠지.’
거기에 쐐기를 박아 줄 것을 나는 이미 가지고 있었다.
“지난번 공작 부인께서 쓰러지셨을 때, 루스 후작 영애가 있었다는 건 들으셨겠죠.”
“예. 아들에게 들었답니다. 효과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치료제를 가지고 있다고요.”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그녀가 치료제를 가지고 거기 있었던 게 과연 우연일까요?”
“…!”
공작 부인과 아론의 표정이 돌처럼 굳었다.
나는 화사하게 웃었다.
이미 승리는 결정되어 있었으니까.
* * *
아르파드는 율켄에게 전언한 대로 딱 일주일 만에 황태자궁으로 귀환했다.
“전하! 오셨습니까!”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황태자 정도 위치의 사람이 자리를 비우면 난리가 나야 정상이었지만, 아르파드는 광증을 핑계로 자리를 꽤 자주 비웠기 때문에 궁인들은 부재를 메우는 데 익숙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명확했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난 신하들과 측근들이 있어도, 최종 명령권자가 없는 상황은 압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일주일 만에 돌아온 황태자궁은 매우 평화로웠다.
궁인들의 표정에는 안정감이 넘쳤다.
그 전과 지금의 차이는 뭘까?
아르파드는 곧 한 가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힐리아.’
그녀의 존재뿐이다.
든든한 안주인의 존재가 아르파드가 자리를 비운 동안에도 황태자궁을 지탱한 것이다.
아르파드는 초조함이 목 끝까지 차오르는 걸 느꼈다.
이건 굶주림이나 갈증과 닮았지만, 그보다 몇 배로 강렬한 것이었다.
뱃속에서, 아니, 영혼을 갉아먹는 무언가가 그녀를 원하는 갈망이었다.
당장에라도 상아의 침실로 달려가고 싶었다.
지금은 밤. 힐리아는 침실에 있을 시간이니까.
하지만 아르파드는 바로 달려갈 수가 없었다.
‘이 꼴로는… 안 되지.’
일주일간 어지간한 소설 급의 모험을 마치고 돌아온 뒤다.
먼지와 몬스터의 체액 등으로 더러워져 있었다.
우선 씻고, 제대로 의복을 차려입은 후 가야 한다.
아르파드는 품속에 든 것을 매만지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렇게 중요한 걸 주면서 먼지 덩어리인 꼴일 순 없지 않은가.
당직이었는지 소식을 듣고 율켄이 달려왔다.
“너무 늦으셨습니다! 무슨 드래곤이라도 잡아 오신 겁니까?!”
율켄의 원망스러운 말에 아르파드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됐고, 내일 얘기해. 바빠.”
아르파드는 먼지 구덩이인 망토를 율켄에게 던지며 말문을 막았다.
“이게 무슨! 크헥! 머, 먼지가……!”
콜록거리는 율켄을 놔두고 아르파드는 욕실로 달려갔다.
그리고 약 한 시간 뒤.
율켄은 뽀송뽀송하게 씻고 나와 머리도 곱게 빗어 올리고, 최대한 화려하게 차려입는 아르파드를 목격했다.
“이건 색이 안 어울려. 보석은 어디 있지? 얼마 전에 새로 지은 양가죽 부츠는?”
전에 없이 깐깐한 단장 시간이었다.
얼마 전 아르타누스 홀의 연회 때보다 더 까다롭고 화려하게 치장한 채로, 아르파드는 상아의 침실로 향했다.
율켄은 창밖을 봤다.
까맣다. 지금은 분명히 밤이었다.
‘해가 아니라 달이 떠 있는데?’
그는 곧 납득했다.
원래 사랑이라는 건 낮에 달이 뜨게 하고, 밤에 태양을 불러들이는 마법인 법이니까.
* * *
아르파드는 낯선 설렘을 느끼며 상아의 침실 문을 열었다.
“힐리아!”
거기엔 꽤 기분 좋은 미소를 띤 힐리아가 앉아 있었다.
“아, 어서 와요. 아르파드.”
놀랍게도 그녀의 인사가 귀에 너무나도 달콤하게 들렸다.
하지만 힐리아의 손에 들린 '무언가’를 본 순간, 아르파드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저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황제가 결혼 선물로 루드비히에게 준 반지.
즉, 힐리아와 루드비히의 결혼반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