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이 유적의 정보가 검은 용병단에 들어온 건 약 한 달 전쯤이었다.
그동안 아르파드는 다방면으로 신의 축복을 받은 보석의 행방을 추적하고 있었고, 용병단에게도 명령해 두었다.
하지만 한 달 전에 아르파드(제랄드)는 부관이 환호작약하며 알려 온 정보에 시큰둥했다.
“신물이 봉인된 장소의 정보를 찾았습니다!”
“됐다.”
“…네?”
“이제 필요 없어졌다.”
“아니, 몇 년 동안 이 정보를 찾아내라고 그렇게 닦달하셨잖습니까. 돈이랑 시간이 얼마나 많이 들었는데, 이제 와서…….”
“너를 위해 없어진 필요가 다시 생길 순 없지.”
“그, 그럼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알아서 해라. 적당한 가격을 주고 팔던가.”
그때 부관의 좌절은 엄청났다.
대장의 독재에 익숙해진 단원들이 부관을 동정했을 정도로.
부관은 이 정보를 얻어 낼 때까지의 고생이 아까워 차마 팔지 못했다.
그리고 대장이 이번엔 180도로 바뀌어 귀한 보석에 대한 정보를 내놓으라며 난리를 부리자, 바로 이것부터 가져왔다.
“그때, 그때 대장님이 필요 없어지셨다고 했던 그 정보입니다!!”
부관은 환희를 느꼈다.
아르파드는 빠르게 태세를 바꾸어 그 정보를 받아들었다.
“잘했다.”
이 말을 들은 검은 용병단의 단원들은 전부 자신의 청각을 의심했다.
제랄드가 부하를 칭찬하는 건 처음 들었던 것이다.
그들의 감격이 길게 이어질 여유는 없었다. 제랄드가 난데없이 말했기 때문이다.
“원정이다. 최정예로 일곱만 꾸려라.”
“예? 무슨 원정이요?”
“여기로 간다.”
제랄드가 부관이 내민 신물이 봉인된 유적의 지도를 내려놨을 때 용병들의 안색은 노랗게 변했다.
그 지도에는 예상 위험도 랭크가 적혀 있었다.
-위험도 S++
그리고 지금, 불운한 용병들은 대장에게 끌려 뜬금없는 모험을 치르고 있었다.
사방에서 몬스터의 괴성이 울리고, 온갖 함정이 발동한다.
지금까지 모험가를 수없이 잡아먹고 누구도 안에 들여놓지 않은 진짜 ‘유적’이라는 의미다.
강제로 일주일 안에 유적 공략 계획을 세우고 물자와 장비 공수까지 해야 했던 부관은 눈물을 흘렸다.
‘이게 무슨 난리인 거야, 대체!’
앞장서서 무시무시한 기세로 붉은 검기를 날리는 대장 앞에서 감히 반론을 말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쾅! 쿠콰광!
제랄드가 휘두른 칼날에 가고일들이 박살 났다.
제랄드는 무소의 뿔처럼 앞으로만 달렸다.
그 결과, 일행은 제랄드가 세운 말도 안 되는 일정을 하루 앞당겨 유적 공략을 끝내는 기염을 토했다.
* * *
아르파드가 갑자기 율켄에게 전언을 남기고 사라진 그날 밤.
나는 꽤 오랜만에 침실에 혼자 들게 되었다.
엄청나게 넓고 큰 침대를 처음으로 혼자 차지하는 것이다.
“얏호!”
환호성을 지르며 쿠션감이 끝내주는 침대 위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베개를 끌어안은 채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구르며 자유를 만끽했다.
결혼 이후 잠들 때, 자다가 잠깐 깼을 때, 그리고 일어났을 때, 대부분 아르파드가 눈에 들어왔다.
매번 아르파드는 눈을 뜬 채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아무리 드래곤의 혈통이라 덜 자도 된다지만, 좀 심했지.’
처음에는 날 감시하는 줄 알았을 정도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좀 편하게 자요.”
“편하게 자고 있는데?”
“나 경계하느라 제대로 못 자고 있는 거잖아요? 당신이 완전히 무방비라고 해도, 난 해치지도 못하니까 안심하라고요.”
그러자 아르파드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했다.
“나도 알아. 그대의 그 가는 손목으로는 내가 목을 들이대 줘도 못 죽이겠지. 난 일반인과 달리 칼로 찔러도 잘 안 죽고 말이야.”
“그럼 왜 그러고 있어요?”
“난 원래 잠이 없어. 그리고…….”
아르파드는 미묘하게 말끝을 흐렸다.
그의 표정이 아주 이상해서, 나는 끈질기게 달라붙어서 대답을 얻어 냈다.
“이상해서.”
“네?”
“내 옆자리에 누가 눕는 걸 상상해 본 적도 없었거든. 너무 낯설고 이상하고… 신기해서 보고 있었던 거야.”
놀랍게도 신혼 초반(물론 지금도 신혼이긴 하지만) 나와 아르파드가 느낀 건 비슷했다.
아무리 드래곤의 혈통이니 해도, 결국 사람은 사람이라는 거겠지.
최근에는 아르파드도 좀 익숙해졌는지 자는 모습을 조금씩 보여 줄 때가 있었다.
어쩐지 사나운 맹수를 조금씩 길들이는 기분이라, 조금… 아니, 꽤 만족스러웠다.
아마 그래서일 거다. 그동안 꽤 익숙해져서.
이 큰 침대가 허전하게 느껴지는 건.
‘으음. 이건 생각 못 한 단점이네. 루드비히 때에는 몇 년을 결혼 생활했어도, 이런 건 못 느꼈는데.’
가슴 안쪽에서 나비 몇 마리가 파닥거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질적인 감각이라, 나는 고개를 저으며 베개를 끌어안고 마저 침대를 굴렀다.
그러다가 계산을 잘못해서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아코!”
그제야 깨달았다.
그동안 내가 침대 밖으로 안 떨어진 건, 단단한 벽 같은 아르파드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걸.
나는 잠버릇이 그다지 좋지 않아서 어릴 때부터 침대에서 자주 떨어졌다.
그 때문에 델핀저의 내 침대에는 테두리가 있었는데 이곳에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한 번도 자다가 떨어진 적이 없었지.’
그게 아르파드 덕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
나는 부정할 수 없는 쓸쓸함을 안고 늦게 잠들었다.
아르파드가 부재중인 동안 내내.
* * *
아르파드가 곁에 있든 없든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렀다.
내가 계획한 일들도 빠짐없이 일어났다.
뮤젠 공작 부인을 도와준 지 사흘 뒤.
나는 뮤젠 공작 부인과 소공작의 알현 요청을 받았다.
덕분에 건강한 상태의 뮤젠 공작 부인과 그 아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올린 뮤젠이 황태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아론 뮤젠이 비 전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들은 가진 지위나 권력에 비해 특이할 정도로 정중했다.
게다가 뮤젠 공작 부인은 시녀장으로서 내 옆에 있는 악시온 대공비를 보고 놀란 듯했다.
간단히 고개를 숙여 대공비와 인사를 나눈 공작 부인은 경탄 어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악시온 대공비의 이름값이 있으니 시녀장의 자리에는 이름만 올려놨으리라 예상한 것이리라.
대공비가 직접 내 옆을 지키는 걸 봤으니 상황에 대한 해석을 달리할 수밖에.
그리고 대공비와 상관없이 이들은 나에게 정중한 태도를 보일 이유가 있었다.
“지난번에 비 전하의 도움이 없었다면 어머니께선 큰일을 당하셨을 겁니다. 정식으로 감사 인사를 올립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비 전하.”
이들은 이미 그때 도와준 이가 나라는 걸 알고 왔다.
“별말씀을. 우연히 때가 맞아서 다행이었어요.”
나는 아론 뮤젠에게 한 가지 궁금한 걸 물어보았다.
“혹시 그때 루스 후작 영애에게 내가 누군지 들었나요?”
그러자 아론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루스 영애는 파랗게 질린 채 아무 말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꽤 무례한 태도였죠.”
공작 부인이 옆에서 한숨을 쉬었다.
“루스 영애와 비 전하의 일은 저도 들어서 알고 있어요. 그렇다고는 해도, 숨기려는 것처럼 말을 안 해 주다니… 역시 소문처럼 마음 씀씀이가 나쁜 영애더군요.”
덕분에 이 모자에게 에반젤린의 인상은 안 좋게 박힌 모양이다.
회귀 전과 달리.
‘그때 이 모자는 대표적인 에반젤린의 추종자였는데 말이야.’
그 때문에 뮤젠 공작 부인이 본인 취향인 샤링가 꽃잎으로 염색한 드레스를 끝까지 얻지 못해서 분통을 터뜨렸었다.
리타 모건(이세핀)은 에반젤린과 친한 이들에게는 절대 드레스를 만들어 주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번엔 나 외에 처음으로 이세핀의 드레스를 손에 넣게 되었지.’
그래서 그런지, 혹은 죽을 뻔했다가 살아나서 그런지, 공작 부인은 아주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녀는 별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
그런데 정도가 조금 심했다.
얼마나 심한가 하면, 내가 부담감에 식은땀을 좀 흘릴 정도였다.
그녀는 내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부인?”
“…….”
“왜 그러시죠, 부인?”
몇 번 더 불렀는데도 뮤젠 공작 부인은 홀린 듯한 표정으로 내 눈을 보고 있었다.
아론이 헛기침을 하며 옆구리를 찌르자 그녀는 정신을 차렸다.
“어머, 죄송해요! 제가 그만 넋을 놔 버렸네요.”
“아니에요. 혹시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뮤젠 공작 부인의 하얀 얼굴이 곧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그야말로 꿈꾸는 소녀처럼 나를 보며 말했다.
“비 전하께서 너무 제 취향이셔서요.”
“…네?”
나는 너무 놀라서 마시던 차를 흘릴 뻔했다.
아론마저 모친을 경악한 눈으로 보며 외쳤다.
“어, 어머니?!”
나는 멍하니 대꾸했다.
“어… 저는 이미 결혼했는데요, 부인.”
부인은 결혼은 물론이고, 아들도 옆에 데리고 계시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