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안 그래도 뮤젠 공작가의 등장으로 가게에서 쫓겨난 손님들이 입구에 남아 있던 차였다.
뮤젠 공작가에 이어 황태자비의 시녀까지 방문했으니 주변인들의 주의가 집중되어 있었다.
다들 애니가 한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반응은 격렬했다.
“잠깐, 그럼 케멀 의상실에서 황태자비 전하의 드레스를 만든 게 아니란 말이야?”
“오히려 비 전하를 망신 주기 위한 드레스였다고? 뻔뻔해라!”
“그럼 지금까지 거짓말하면서 드레스를 팔아 댄 거야?! 말도 안 돼!”
“내가 여기에 드레스를 몇 벌 주문했는데?”
“나도야! 황태자비 전하의 드레스를 보고 반해서 주문한 건데! 취소해야겠어.”
여기저기서 자신도 주문을 취소하겠다는 말들이 빗발쳤다.
멜리사 케멀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애니에게 거의 매달리다시피 했다.
“왜, 왜 이러시는 겁니까? 그동안 비 전하께는……!”
열흘이나 가만히 있었으면서 왜 이제 와 난리냐는 말이다.
애니는 멜리사의 뻔뻔함을 비웃었다.
“비 전하께선 기다리신 거야. 자네가 잘못을 뉘우치기를. 마지막 기회를 주는 게 우리 비 전하이시거든. 필레른 자작 부인에게도 그러셨지.”
“…!”
“하, 하지만 저희는 비 전하께 이미 사죄의 선물을 보냈습니다! 다 받고 이러시면……!”
그러자 애니가 조금 전에 내려놓은 선물들을 가리켰다.
“이 뇌물들 말인가?”
“아!”
너무 놀라 애니가 오자마자 이것들부터 돌려줬다는 걸 잠시 잊었다.
“비 전하께서는 뇌물을 받지 않으시네.”
애니는 강조하듯이 말했다.
“우리 비 전하께서는 잘못을 저지른 자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시는 자비로움을 가졌지만, 동시에 뇌물 같은 것에 절대 흔들리지 않는 청렴한 분이시기도 하거든.”
아마 힐리아가 들었다면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어!’하고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하지만 애니는 떳떳했다.
‘난 그냥 사실대로 말하는 것뿐인걸!’
게다가 사람이 많은 대로변에서 당당하게 말할 기회가 얼마나 있겠나.
여론은 당연히 애니와 힐리아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세상에, 이런 잘못을 저지른 사람도 한번은 기회를 주셨는데……!”
“뇌물을 바치고 용서받았다고 믿은 거야? 진짜 얼굴 두껍네.”
“내 말이. 직접 달려가서 무릎 꿇고 빌어도 모자랐을 텐데.”
사방에서 쏟아지는 경멸과 혐오, 거기에 주문 취소까지 더해지자 멜리사는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이 소문이 번지면 몇 달치 쌓인 의상실 주문이 모조리 취소될 게 분명했다.
‘그랬다간 꼼짝없이 파산이야!’
그녀는 항변하려 했다. 하지만 황태자비의 시녀가 직접 말한 사실을 아니라고 주장할 순 없었다.
그랬다간 황후까지 밀어낸 황태자비와 싸우려는 꼴이 될 테니.
“저희는 루스 영애에게 협박을 받아 어쩔 수 없이 그런 것뿐입니다! 저희도 피해자예요!”
“…….”
“그래도 너무나 죄송스러워 비 전하께 최대한 성의 표시를 한 겁니다!”
“한 번도 비 전하를 찾아오지 않았으면서 죄송하다고? 이런 뇌물만 던져 놓고?”
애니는 보석 상자를 발끝으로 툭 쳤다.
“아니, 하지만……!”
그때 멜리사의 눈에 이상한 것이 보였다.
황태자비궁에 두 번째로 보낸 선물이 뭔가 이상했다.
보석이 휘황한 드레스는 분명히 그녀가 보낸 게 맞았다.
그런데 토르소가 이상했다.
‘분명히 금으로 된 토르소를 보냈는데?’
사실상 드레스보다 그쪽이 진짜 뇌물이었으니까.
“이, 이게 뭐야? 이건 그냥 은을 입힌 나무 토르소잖아!”
멜리사는 애니의 손을 잡고 늘어지며 힐난했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무슨 소리지?”
“분명 난 금으로 된 토르소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건 나무로 된 게 아닙니까?”
이렇게 되면 멜리사는 뇌물로 바친 건 그대로 뺏기고, 사업만 망하게 된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황태자비가 자신의 뇌물을 알맹이만 빼먹었다고 알리기 위해서.
“난 분명히 황태자비께 금 토르소를 보냈어요! 그런데 왜 나무가……!”
애니는 경멸 어린 표정으로 멜리사를 보다가 강하게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손수건을 꺼내 더러운 것이 묻었다는 듯이 잡힌 손을 닦았다.
애니의 손에 들린 손수건은 아주 특이하고 예쁜 청보라색이었다.
하지만 지금 멜리사는 그런 걸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주변에 도움을 청하려 고개를 들었다가 그녀는 굳어 버렸다.
자신을 향한 싸늘한 시선들 때문이었다.
애니가 차갑게 물었다.
“드레스로 비 전하를 속인 것도 모자라, 이번에는 자네의 뇌물을 돌려주지 않았다고 누명을 씌우려고 하는 건가?”
주변의 반응은 싸늘했다.
“말도 안 돼. 비 전하께선 이렇게 공개적으로 돌려보내셨는데…….”
“금 토르소라니 말도 안 돼. 설마 나무 토르소를 보내 놓고 금으로 내놓으라고 하는 거야? 미쳤어.”
“망하게 생겼으니까 이제 막 우기나 봐요.”
“뻔뻔해라.”
망연자실한 멜리사를 놔둔 채, 애니는 몸을 돌렸다.
그때, 그녀를 붙잡는 말이 있었다. 이미 넋이 나간 멜리사는 아니었다.
뮤젠 공작가의 모자였다.
공작 부인은 멜리사를 바닥에 떨어진 쓰레기 취급하며 애니에게 다가갔다.
“자네가 황태자비 전하의 시녀인가?”
애니는 놀랐지만 침착하게 대응했다.
“마차의 문장을 보고 혹시나 했는데, 뮤젠 공작가의 분이십니까?”
“그렇다네. 곧 비 전하께도 알현을 청할 예정이었는데, 그전에 만나게 되니 반갑네.”
아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다가온 공작 부인은 눈에 띄게 호의적이었다.
“그나저나… 본의 아니게 엿들었네만, 지난번 황태자비 전하의 연회 드레스를 만든 게 여기가 아니라고?”
애니는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예, 공작 부인.”
공작 부인은 눈을 빛내며 애니에게 바짝 다가섰다.
그녀의 시선은 애니가 들고 있는 청보라색 손수건에 꽂혀 있었다. 이건 당연히 샤링가 꽃잎으로 염색한 것이었다.
“그러면 혹시 내게 알려 줄 수 있겠나? 그 드레스를 만든 이가 누구인지?”
애니는 새삼스레 공작 부인의 모습을 보았다.
온몸을 다양한 색조의 보라색으로 치장하고 있다시피 한 사람이다. 그 색이 아주 잘 어울리기도 했고.
힐리아의 장담대로였다.
“뮤젠 공작 부인이 올 거야. 그녀는 알아보기 매우 쉬워. 걸어 다니는 보라색을 찾아봐.”
“네?”
“샤링가 꽃잎차로 염색한 손수건을 들고 있으면 먼저 접근할 거야.”
‘정말 비 전하 말씀대로야.’
애니는 새삼 감탄했다.
힐리아는 회귀 전 기억으로 뮤젠 공작 부인이 보라색 마니아로 유명했다는 걸 알고 있으나, 애니는 이를 모르니 당연했다.
“알려 드릴 수야 있긴 하지만…….”
애니는 말끝을 애매하게 흐렸다.
그러자 공작 부인이 더 안달이 나서 달라붙었다.
“제발 나에게 알려 주게. 내 꼭 사례하지.”
그러자 애니는 못 이기는 듯 한 마디를 내놓았다.
“사실 비 전하의 명으로 그 드레스를 만든 의상실에 들르려던 참이었답니다. 함께 가시겠어요?”
“…물론이지!”
그리고 이 대화를 엿들은 이들은 눈을 빛냈다.
케멀 의상실 앞에 구름처럼 몰려 있던 인파는 썰물처럼 쭉 빠졌다.
멜리사 케멀의 옆에 쌓인 건 경멸과 주문 취소뿐이었다.
그녀가 힐리아에게 뇌물로 바친 금 토르소는 사실상 전 재산에 가까웠다.
그게 날아가고 주문 취소가 밀려드는 지금, 남은 건 하나뿐이었다.
파산.
망한 가게 주인의 비명이 외롭게 울렸다.
“아, 안 돼!! 이럴 순 없어!”
* * *
“대, 대장님?”
수도에 있는 검은 용병단의 본부는 오랜만에 주인을 맞이했다.
늘 입고 다니는 검은 망토처럼 주로 밤에 움직이는 용병왕 제랄드가 낮에 모습을 드러냈다.
대장을 반갑게 맞으려던 용병들은 곧 고개를 땅으로 처박아야 했다.
가면으로도 다 안 가려지는 살기와 기세를 풍기는 대장 때문이었다.
다들 의문이 가득했다.
‘뭐지? 우리가 뭐 실수했나?’
‘얼마 전에 보고서가 잘못 갔나? 아닌데? 잘 처리했는데?’
‘누구야? 빨리 알아서 빌어!’
용병왕 제랄드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가져와.”
“네? 뭘요?”
“보석에 대한 정보.”
이게 갑자기 무슨 말인가?
아닌 밤… 아니, 낮에 나타난 드래곤이란 말인가?
“대륙 내 귀한 보석에 대한 정보는 모조리 긁어 와. 당장.”
‘대체 왜?’
모두 이 질문이 목구멍 끝까지 올라왔으나 차마 묻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