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대박이다!’
멜리사 케멀은 기쁨과 긴장감으로 인한 떨림을 애써 누르며 침착하려 애썼다.
다른 이도 아니고, 황가 다음간다고 알려진 세 공작가 중 하나다.
그 공작 부인과 소공작이 황도로 올라와 처음으로 찾은 곳이 그녀의 가게인 것이다.
이건 절대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멜리사 케멀은 의상실을 통째로 비우고 공작 부인과 소공작을 맞았다.
그 때문에 쫓겨난 손님들이 불만을 토했으나, 뮤젠 공작가의 이름 앞에서는 다들 입을 다물었다.
멜리사는 환하게 웃는 표정으로 직접 차를 나르며 물었다.
“이렇게 공작 부인과 소공작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어떤 드레스를 원해 방문하셨는지요?”
옆에서 멜리사의 딸이 재빠르게 카탈로그를 내밀었다.
소공작이 책자를 받아 어머니의 앞에 펼쳐 보여 주었다.
뮤젠 소공작과 손끝이 스치자, 멜리사 케멀의 딸은 뺨이 붉어지는 걸 참지 못했다.
이 자리에 그걸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그녀의 어머니조차도.
소공작의 주의는 오로지 제 모친에게만 닿아 있었다.
“어떠십니까, 어머니?”
“흐음.”
카탈로그를 유심히 보던 공작 부인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드레스 샘플들을 볼 수 있을까? 이 의상실에서 제일 좋은 것들로.”
그러자 멜리사는 화색을 띠며 외쳤다.
“당연하지요!”
직원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인형처럼 작은 토르소에 입혀 둔 드레스 샘플들을 수십 개 늘어놓았다.
그걸 훑어본 공작 부인의 표정은 전혀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녀는 귓가에 달랑거리는 자수정 귀걸이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없네. 여기라고 듣고 온 건데.”
그러자 아들이 공작 부인 대신 직접적으로 물었다.
“황태자비께서 아르타누스 홀의 연회에서 입으셨다는 청보라색 드레스 원단과 디자인 샘플을 보고 싶은데.”
“…네?”
멜리사 케멀의 얼굴이 굳었다.
그녀는 똑같은 질문을 수도 없이 들어왔다.
그때마다 애매하게 말을 돌리곤 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손님은 절대로 놓칠 수 없는 거물이었다.
“그게…….”
대체 뭐라고 대답한단 말인가?
우리는 그 드레스를 만들지 않아서 같은 색의 원단이나 샘플은 없습니다?
그랬다간 지금까지 해 온 거짓말이 들통 날 것이다.
‘어, 어떻게 한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른다.
그때였다.
닫아 둔 가게의 입구 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무슨 일이지?”
마치 멜리사를 구원해 주려는 듯 딱 맞는 타이밍에 온 손님이었다.
“황태자비 전하께서 보내신 시녀님이 오셨다고 합니다!”
“뭐라고?”
멜리사는 구세주를 만난 듯한 얼굴이 되었다.
* * *
아르파드는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얼마나 심각한 고민인가 하면, 30분 넘게 서류 처리가 진행이 안 될 정도였다.
율켄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1분만 더 태업하면 30분 내내 서류 한 장도 안 보신 게 된다.’
가만히 안 있을 생각이었다.
딱 타이밍에 맞춰 있는 힘껏 비꼬아 줄 예정이었다.
율켄이 막 입을 열려던 찰나, 아르파드가 선수를 쳤다.
“펠릭스.”
“…어, 응? 네?!”
율켄은 경악했다.
아르파드가 그의 이름을 부른 건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율켄은 잠시 바깥을 보더니 말했다.
“하늘에 해 대신 달이 떠 있지는 않은데 말입니다. 제 청각이 정상인지 의심되는군요. 방금 저를 펠릭스라고 부르신 게 맞습니까?”
“맞아.”
“정말요? 정말 맞단 말입니까?!”
아마 아르파드가 조금만 틈을 줬다면, 율켄은 광증을 부르짖으며 궁의를 부르려 들었을 거다.
“…내가 아는 친구의 이야기인데 말이지.”
율켄의 표정이 더더욱 해괴해졌다.
“전하께선 친구 없으시지 않습니까?”
아르파드의 붉은 눈이 율켄을 찌를 듯 노려봤다.
하지만 율켄은 떳떳했다.
아르파드에게 친구라니. 그거야말로 낮에 해 대신 달이 뜰 일이니까.
“대충 지인의 일인 거로 하자고.”
“그러지요.”
뭐라고 더 태클을 걸고 싶었지만 참았다.
‘보통 이런 말은 반드시 자기 일에다가 붙이는 서두이긴 하지.’
흥미진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진 말은 율켄의 예상대로였다.
“그, 내 지인이… 얼마 전에 결혼을 했다.”
…라고 한 달 전쯤 결혼한 새신랑이 말하고 있었다.
“좀 갑작스럽게 특이한 방식으로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하더군.”
…라고 약탈혼으로 결혼한 당사자가 말하고 있었다.
율켄은 뜨뜻미지근한 미소를 지었다.
“예, 전하께서 아시는 분이 뭐 어쩌셨습니까?”
“사정이 그렇다 보니, 아내에게 예물이나 청혼 선물 같은 걸 전혀 못 해 줬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고 해. 이런 경우에… 아내는 어떻게 생각할까?”
율켄은 척수 반사적으로 생각보다 대답이 먼저 나갔다.
“누굽니까? 그 염치없는 도둑놈은?”
“…!”
이어진 대화로 그 염치없는 도둑놈이 아내에게서는 예물을 받았다는 것까지 듣자, 율켄은 더더욱 신랄하게 평했다.
“뻔뻔하고 파렴치하고 양심도 없는, 남자 망신은 다 시키는 놈이군요. 키엘른 대공 말고 그런 인간이 또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
“전하의 친구가 아니라 그냥 아는 사이라니 다행입니다. 그런 놈이랑은 절대 가까이하지 마십시오.”
아르파드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 그 정돈가?”
율켄은 용서 없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만일 제 누이가 그런 놈팽이와 혼인했다면…….”
“그렇다면?”
“아마 저만이 아니라 주변의 모든 이가 티 세트를 싸 들고 다니면서 어떻게든 이혼시킬 겁니다!”
율켄의 주먹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아마 그 아내분도 지금쯤 이혼을 고민 중이시지 않을까요?”
“…!”
요즘 들어 율켄은 낯선 광경을 많이 보게 되었는데, 지금은 그중에서도 진귀한 상황이었다.
‘세상에. 황태자 전하의 얼굴이 창백해지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야.’
흥미진진함과 즐거움으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는 율켄을 뒤로하고 아르파드는 말없이 뛰쳐나갔다.
아르파드가 어딜 가는지는 안 봐도 뻔했다.
‘비 전하께 달려가시는 거군.’
율켄은 자신의 주인에게 조금 실망했다.
‘첫눈에 반해서 약탈혼하고 정신없었다곤 해도, 결혼반지 하나 주지 않았다니. 그렇게 안 봤는데… 쯧쯧.’
그보다 이후 전개에 대한 흥미로 율켄은 기대감에 들떴다.
예상과 다르게 결론은 빨리 알 수 없었다.
상아의 침실로 달려간 아르파드는 힐리아가 자리를 비워서 닭 쫓던 개 꼴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 * *
케멀 의상실을 방문한 것은 바로 애니였다.
그녀는 차가운 분노로 가득 찬 채 의상실 앞에 서 있었다.
가게 안보다 앞에 사람이 많은 걸 보고 일부러 이 자리를 정했다. 최대한 많은 이가 목격해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 비 전하께 망신을 주려고 했으면서, 감히 비 전하의 이름을 팔아서 장사해?’
시녀들은 당장에라도 사실을 알려 케멀 의상실을 벌주자고 말했다.
하지만 힐리아는 자신만만하게 웃을 뿐이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야. 조금만 기다려.”
그리고 오늘, 드디어 힐리아의 허락과 명령이 떨어졌다.
애니는 의욕이 머리끝까지 차오른 상태였다.
당연히 벌벌 떨면서 맞을 줄 알았던 멜리샤 케멀의 반응이 이상했다.
“어서 오세요, 시녀님!”
마치 구세주라도 본 듯하지 않은가?
멜리사는 한껏 목소리를 낮추어 말문을 열었다.
“제가 황태자비 전하께 바친 선물들을 생각하셔서…….”
애니는 냉정하게 말을 잘랐다.
“안 그래도 그것들 때문에 왔다.”
“네?”
애니가 고개를 끄덕이자, 궁인들이 우르르 몰려와 물건들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멜리사는 그게 뭔지 알았다.
‘내가 보낸 선물들이잖아!’
보석 상자와 휘황찬란한 드레스가 입혀진 토르소.
힐리아는 그걸 그대로 돌려보낸 것이다. 멜리사의 안색이 파리하게 질렸다.
‘잠깐, 선물을 돌려보냈다는 건……!’
그때였다. 애니가 적의 가득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비 전하께서 자네가 보낸 선물은 받을 수 없다고 돌려보내셨네. 이유는 알겠지.”
“이, 이건… 어디까지나 제 충성을……!”
“그나저나 요즘 헛소문이 돌고 있더군?”
“허, 헛소문이라니요?”
“아르타누스 홀의 연회 날, 비 전하께서 입으신 드레스를 자네가 만들었다는 헛소문 말이야.”
“네, 네?!”
애니는 최대한 많은 사람이 들으라는 듯 외쳤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루스 후작 영애의 것을 따라 만든 자네의 드레스는 비 전하 대신 내가 입었으니까.”
“…!”
경악 어린 깨달음과 멜리사에 대한 경멸이 주변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