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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혼으로 남편부터 바꾸겠습니다-96화 (96/210)

96화

연회로부터 약 일주일 뒤.

나와 아르파드는 가시방석 위에 앉아 있었다.

아니다. 흘긋 보니 이 상황에서도 아르파드는 아주 평온한 표정이다. 가시방석인 건 나뿐인 듯했다.

악시온 대공비가 서서 직접 차를 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옆에서 시녀들이 난처해하며 나섰다.

“대공비 전하. 이건 제가…….”

“맞아요. 고모할머니. 제게 맡겨 주세요.”

“아니다. 명색이 시녀장이니 내가 해야지.”

노인이 직접 들기엔 찻주전자가 너무 무거워 보였다.

하지만 대공비는 꼬장꼬장한 태도로 직접 차를 우려 나와 아르파드에게 직접 따라 주고 있었다.

“…….”

“…….”

조부모뻘인 사람에게 시중을 받고 있으려니 불편했다.

‘내 안의 유교 걸이… 벌떡벌떡 일어서려고 한다!’

나는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대공비의 손에서 다구를 뺏고 싶은 걸 참았다.

어쩌면 나나 아르파드, 그리고 측근들만 있는 자리였으면 그렇게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세상에, 대공비 전하께서 직접 차를 우려 주시다니…….”

“그냥 명분만 채우기 위한 게 아니라, 정말로 황태자비 전하를 보필하고 계시네요.”

알현에 참여한 귀부인들의 얼굴에 경탄이 스쳐 지나갔다.

그들은 이미 내가 알현 자리에 아르파드와 함께 나타난 것만으로도 놀란 듯했다.

‘황태자가 끔찍이도 아낀다더니 정말이네!’

이런 반응들.

거기에 내 임시 시녀장인 대공비의 깍듯한 시중이 더해지자, 내 위상은 그야말로 하늘을 뚫을 지경이 되어 버렸다.

금족령 이후 텅 비다시피한 황후궁과는 여러모로 대비되는 상황이었다.

내 첫 알현에 초대받는 영광(본인들이 그렇게 말했다)의 주인공들은 한술 더 떠 무려 대공비가 직접 우린 차를 받게 되었다.

물론 대공비가 직접 차를 따르고 찻잔을 가져다준 건 아니다.

그렇게 해 준 건 나와 아르파드뿐.

대공비가 우린 차를 시녀들이 알현자들에게 날라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다들 황공해하는 분위기였다.

다들 입에 침이 마르도록 나에 대한 칭찬과 아부를 반복했다.

“이렇게 직접 비 전하를 뵙게 되다니. 무한한 영광입니다.”

“게다가 황태자 전하와 대공비 전하까지 함께 뵙다니. 저는 정말로 운이 좋군요.”

“이게 전부 황태자 전하께서 비 전하를 끔찍이 아끼셔서겠죠.”

“그뿐이겠어요? 황제 폐하께서 ‘아바마마’라 부르라 하셨다면서요?”

“맞아요. 저도 직접 들었답니다.”

다들 파리가 저리 가라 할 기세로 두 손을 비벼 대고 있었다.

“비 전하께서 내정을 살피게 되셨으니, 황궁이 더욱 화사하게 빛나겠네요.”

“그렇죠. 사실 지금까지 수도 사교계가 좀 위축되어 있었잖아요?”

지금까지 그 위축된 곳의 여왕으로 군림한 황후와 에반젤린에게 아부하던 이들의 안면 몰수는 대단했다.

뻔뻔하다 싶긴 했지만, 나로서는 나쁠 것이 없었다.

지금의 알현은 내가 본격적으로 사교계를 장악하기 위한 신호탄이었기 때문이다.

* * *

다행히 첫 알현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 직후 자신의 업무를 보기 위해 황태자궁으로 향하던 아르파드는 의외의 얼굴을 만났다.

바로 외조모였다.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황태자 전하.”

“…그러지요.”

조금 전 알현 때 얼굴을 마주했는데 왜 따로 말을 거는 건지 아리송했지만, 아르파드는 사람들을 물리고 정원 구석에서 외조모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생각해 보면 그가 외조모와 단둘이 대화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도 별로 들르지 않으셨으니까.’

어린아이였을 때도 외조모에게 귀여움을 받은 기억이 없다.

그 때문에 조손 간의 대화는 더없이 딱딱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말씀을 드릴 수 있는 건 저뿐이라 전하를 따라 나왔습니다.”

“말을 길게 끄실 필요는 없습니다.”

바쁘니까 빨리빨리 가자는 말.

악시온 대공비는 차가운 표정으로 외손자를 바라보았다.

힐리아가 보았다면 표정이 꼭 닮았다고 손뼉을 칠 듯한 상황이었다. 두 사람은 의식하지 못했지만.

“비 전하께서 선황후 폐하의 보물들을 대부분 물려받으신 것 같더군요.”

아르파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설마, 그걸 걸고 넘어지려는 건가?

“시어머니의 보석을 며느리가 물려받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니까요.”

절로 목소리에 가시가 섰다.

악시온 대공비는 그걸 비난하려는 게 아니었다.

“잘하셨습니다. 제 주인에게 잘 넘어갔지요.”

“…?”

악시온 대공비가 뭐라 하지 않는 건 다행이지만, 이런 걸 굳이 따로 불러내서 말할 일인가 싶었다.

이어진 말에 아르파드는 뒤통수를 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하지만 새로운 보석이나 장신구가 거의 보이지 않더군요.”

“…!”

아르파드는 아차 했다.

물론 힐리아는 이미 황태자궁의 예산권을 틀어쥐고 있었다. 백금 열쇠까지 손에 넣었으니, 돈이 부족할 일은 없었다.

필요한 액세서리와 드레스는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직접 선물한 게 없어!’

번개와 같은 충격적인 깨달음이었다.

‘잠깐, 그러고 보니… 내가, 예물을… 줬던가?’

당연히 없었다.

아니, 오히려 보석을 받은 건 아르파드였다.

아그리피나의 눈물.

사실은 의뢰의 선금이었지만, 아르파드의 머릿속에서 이미 예물로 탈바꿈되어 있었다.

약탈혼으로 인해 결혼식도 제대로 치르지 않았다.

제대로 치렀다고 할 만한 건, 아르타누스 홀에서의 피로연뿐.

결국 그는 청혼, 결혼, 피로연까지 아내에게 뭔가 제대로 준 게 없었다.

아르파드의 표정이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 * *

케멀 의상실은 오늘도 사람으로 터져 나갈 듯했다.

멜리사 케멀은 흐뭇한 표정으로 손님으로 바글거리는 가게 안과 바삐 움직이는 직원들을 보았다.

‘벌써 연회가 끝나고 열흘째야. 그동안 황태자비가 아무 말 없었으니, 봐주고 넘어가겠다는 거겠지.’

자신들을 족칠 거였다면 진작 하지 않았겠는가.

‘하긴, 우리는 그냥 힘이 없어서 시킨 대로 한 것뿐인걸.’

그러니 황태자비가 미워하고 적대할 대상은 에반젤린뿐이다.

멜리사가 안도하는 옆에서 그녀의 딸이 소곤거렸다.

“역시 뇌물을 단단히 바친 효과가 있나 봐요.”

멜리사는 표정을 굳히고 딸의 입을 단속했다.

“그런 말은 절대 하지 마렴. 새어 나가 황태자비의 귀에 들어갔다간 우린 진짜 밉보일 수 있어.”

모녀는 몇 가지 상의를 더한 뒤 손님맞이를 시작했다.

그때였다. 안 그래도 사람으로 바글거리던 케멀 의상실 앞이 유달리 소란스러워졌다. 무슨 일인지 멜리사 케멀이 직접 나갔다가 경악했다.

여섯 마리의 백마가 이끄는 금빛 마차가 케멀 의상실 앞에 멈춰 있었다.

거기에 새겨진 문장을 본 멜리사의 눈은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창에 꿰인 푸른 바다뱀이 그려진 문장.

그녀가 알 정도로 대귀족가의 문장이었기 때문이다.

‘뮤젠 공작가!’

제국 내에 공작위를 받은 가문은 단 셋.

각 공작가의 공통점은 제국에 복속되기 전 한 국가를 통치하던 가문이라는 것이다.

본래 넷이었지만 서부의 공작가는 대가 끊겼고, 그 방계인 솔레누 후작가가 대리하고 있으나 위상은 공작가에 미치지 못했다.

남은 건 셋이다. 그중 하나가 동부에 뿌리를 둔 델핀 공작가.

그리고 북부의 테슬란과 남부의 뮤젠.

델핀 가는 선대 공작 때부터 황실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게다가 후계자인 힐리아가 황실에 시집오며, 사실상 황가에 편입된 상태였다.

북부와 남부, 두 가문은 끝까지 독립성을 유지했다.

그 때문에 파격적인 자치권과 개별적인 병력에 대한 지휘권도 갖추고 있었다.

반쯤 자치권을 가지고 있어 이 두 가문의 일원들은 특수한 경우에만 황도로 올라왔다.

가문의 대가 바뀌거나, 황제가 바뀔 때, 혹은 혼인이 결정될 때 등등.

“잠깐, 저 문장… 남부 뮤젠 공작가의 것 아니에요?”

“마, 맞아요!”

“뮤젠 공작가가 올라왔다는 소식은 들은 적이 없는데?”

“어머 어머!”

사방에 경악과 경탄이 들리는 와중에 한 헌앙한 청년이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불타는 듯 붉은 머리카락과 대조적인 짙푸른 눈동자가 인상적인 청년이다.

그는 마차 안으로 손을 내밀었다.

“자, 어머니.”

“그래, 아론.”

짙은 보랏빛 머리카락이 특이한 귀부인이었다. 눈 색은 옆에 선 청년과 같은 푸른빛이라, 두 사람이 혈연인 걸 알아보기 쉬웠다.

그녀가 입은 드레스는 파도처럼 레이스가 많이 장식된 보라색이었다.

이들의 정체는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잠깐, 들어 본 적 있어. 남부 최강의 기사라는 아론 뮤젠 소공작!”

“아, 그 14세에 토너먼트에서 우승하셨다는?”

“그럼 저 귀부인은… 뮤젠 공작 부인이신 건가?”

화려한 모자가 엄청난 화제와 함께 케멀 의상실로 들어가는 것을 멀리서 지켜보는 눈이 있었다.

근처 2층 테라스를 빌려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여자의 녹색 눈이 승리감으로 반짝거렸다.

‘그래, 왔구나!’

에반젤린은 뮤젠 공작가 모자의 등장을 알고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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