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나는 아르파드에게 가스팔의 침입에 대해 숨기지 않고 말했다.
어차피 침입자가 있다는 건 아르파드도 눈치채고 달려왔으니까.
다만 회귀 전 인연으로 내가 가스팔에 대해 안다는 건 말하지 않았다.
그냥 드래곤에 미친 마법사인 게 분명해 보여서, 내 안전을 위해 당신을 팔아넘겼다고 말했다.
그러자 아르파드의 얼굴이 팍 찡그려졌다.
“정말 나를 외간 남자에게 넘겨줄 건가?”
이 남자는 매번 말을 아주 이상하게 하는 능력이 있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리고 당신이 호락호락하게 넘겨질 사람이에요?”
“아니긴… 하지.”
“상황을 모면하려고 그런 거예요. 상아의 침실에 숨어든 걸 보면 강력한 마법사인 건 분명하니까.”
나는 다시 한번 사과했다.
“미안해요. 급해서 그런 거긴 한데, 당신에게 허락도 안 받고 팔아넘겨 버려서…….”
아르파드에게서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아니, 상관없어.”
“네?”
“그 정도는 몇 번 팔아넘겨도 돼. 내가 알아서 탈출해서 돌아올 테니까.”
개장수에 팔았더니 바다를 건너 돌아왔다는 강아지도 아니고.
아니, 그게 아니라 계속 버려도 돌아오는 괴담 속의 인형 같은 느낌인가.
어이가 없는 말이지만, 솔직히 의외였다.
상황을 모면하려고 그런 거긴 하지만, 자기를 팔아넘겼다는 데에는 화를 낼 줄 알았다.
몇 번이든 팔아넘기라고 해 주다니.
‘조금, 감동적은… 역시 아냐.’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나는 아르파드와 달리 제정신이었다.
“안 팔아넘겨요.”
사람을 팔아넘기면 쓰나.
게다가 나는 인신매매범이 되고 싶지 않다고.
아르파드의 미간 주름이 확 펴졌다.
“그리고 내가 이러면 당신이라도 팔아넘기지 말라고 해야죠. 몇 번이든 팔아넘기라는 말은 하면 안 돼요.”
우스갯소리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듣고 있는 내 마음이 불편했다.
‘꼭 자기 자신에게 별다른 미련이 없다는 걸로 들리잖아.’
가슴이 답답해지는 생각이었다.
아르파드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곧 수긍했다.
“알았어. 노력하도록 하지.”
굳이 노력까지 필요한 건가?
내가 더 깊이 생각할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가스팔이 순간 이동 마법을 펼치고, 아르파드가 문을 박살 내고 달려든 여파가 뒤늦게 왔다.
소란을 듣고 달려온 기사들과 궁인들이 난리였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입니까?”
“설마 침입자가?!”
“비 전하! 무사하십니까?”
“누가 문을 이렇게……!”
아르파드와 나는 말 없이 시선을 맞췄다. 순식간에 합의가 끝났다.
‘문은 침입자 짓인 걸로 해요.’
‘그러지.’
결국 이날 우리는 황태자궁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상아의 침실 외의 다른 곳에서 자야 했다.
이 소동 덕분에 나는 아르파드에게 보일 꼴 못 보일 꼴 다 보였다는 수치심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 사실이 떠오른 건 한참 뒤의 일이었다.
* * *
연회 이후 힐리아는 명실상부한 수도 사교계의 일인자가 되었다.
황후는 칩거 중이고, 백금 열쇠마저 힐리아의 손에 넘어갔다.
당연히 실세가 바뀌었다고 대중이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연회 당시의 일이 워낙에 신비하고 전설적인 일이다 보니, 전부 그에 대해 떠들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때 있었던 아주 사소한 일도 알고 싶어 했다.
기적을 직접 목격한 이들은 자신이 본 걸 뽐내며 줄줄이 설명했다.
“그러니까, 나는 순간적으로 황태자비 전하께서 은하수를 몸에 두르신 줄 알았다니까요?”
“어머, 어머. 정말요?”
“그렇다니까요. 정말 신비로운 청보라색 드레스였어요. 일리아덴산 진주를 뿌려서 어두워지니 반짝거리는 게 너무 예뻤죠.”
운 좋게 연회 때 일을 목격한 한 귀부인이 자신이 본 광경을 묘사하면 참석하지 못한 이들이 몰려와 귀를 기울였다.
이런 광경은 아르타누스 홀의 연회 이후 숱하게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다.
힐리아의 인기와 인지도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광경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적으로 수도 사교계에서 공통의 화제가 된 게 있었다.
“그런데, 황태자비 전하의 그 드레스 말이에요. 대체 누가 만든 걸까요?”
“그러게요. 그러고 보니 전혀 알려지지 않았네요.”
“보통 이런 상황이 되면 자기들이 알아서 먼저 자랑하지 않나요?”
“그 오묘한 청보라색이 정말 너무 예뻤는데 말이에요.”
힐리아가 아르타누스 홀의 연회 때 입은 드레스에 대한 관심이 폭발하자, 언젠가부터 은밀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제가 들었는데요. 케멀 의상실에서 만든 거라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거기는 에반젤린, 아니, 루스 영애와 친한 곳이잖아요.”
“그래서 굳이 말 안 하고 조용히 있다나 봐요. 황후 폐하와 루스 영애 눈치가 아예 안 보일 순 없으니까요.”
소문에 빠른 이들 몇이 이 정보를 곳곳으로 물어 날랐다.
그 결과 케멀 의상실은 영문 모를 호황을 맞이했다.
케멀 의상실의 주인이자 수석 디자이너인 멜리사 케멀은 연회 이후 최대한 몸을 사리고 있었다.
황실의 실권을 장악한 황태자비가 자신들이 하려던 짓을 눈치 못 챘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을 대비해 ‘성의 표시’를 미리 보내 두었다.
그런데 자신의 의상실이 화제의 중심에 있는 황태자비의 그 드레스를 만든 곳이라고 소문이 났다.
소문이 막 돌기 시작할 때 케멀 의상실은 당황했다.
‘아니, 우리가 만든 건 황태자비의 드레스가 아니라 시녀가 입은 녹색 드레스인데?’
그것도 에반제린의 의뢰를 받아 힐리아에게 망신을 주기 위해 일부러 못 만들었던 것 말이다.
멜리사 케멀의 머리가 핑핑 돌아갔다.
상인으로서의 본능이 꿈틀거렸다.
‘이건, 대박의 기운이다!’
그녀는 애매하게 말을 흐렸다.
“아아, 저희가 황태자궁에 불려가서 가봉해 드린 건 사실이긴 한데…….”
연회 당일에 황태자비가 입은 드레스는 다른 것이라는 사실은 당연히 말하지 않았다.
그러자 조금씩 돌던 소문이 폭발했다.
그 화제의 드레스가 케멀 의상실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소문이 돌자, 손님들이 구름처럼 의상실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역시 그랬군요! 정말 너무 아름다운 색이었어요. 혹시 똑같은 천은 없나요? 나도 그 색으로 드레스를 짓고 싶은데.”
“…그 천은 매우 구하기 힘들어서 말이죠.”
애매하게 시작한 거짓말은 뒤로 갈수록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멜리사 케멀은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이제 와서 거짓말이었다고 하기엔 일이 너무 커져 버렸다.
“나도, 나도 황태자비 전하께서 입으신 드레스를 만들어 줘요!”
“꼭 똑같은 천으로!”
“황태자비 전하의 드레스와 똑같이 만들어 드릴 수는 없지만, 여기 이쪽은 어떠신가요? 사실 이 디자인이 연회용 드레스 최종 후보 중 하나였답니다.”
인파가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케멀 의상실의 매상은 하루가 다르게 치솟았다.
처음에 멜리사 케멀은 황태자비의 눈치를 보며 살살 영업했다.
하지만 연회 이후 닷새가 지나도록 황태자비 쪽에서 어떠한 부정적인 의사 표현이 없었다.
그러자 멜리사 케멀은 자기 합리화를 하기에 이르렀다.
‘어차피 그 일은 우리가 주도한 것도 아니었어. 황태자비께서도 이런 사소한 일은 전혀 신경 안 쓰시는 게 틀림없어!’
그게 아니라면 닷새나 아무런 소식이 없을 리가.
‘성의 표시도 마음에 드셨던 모양이야.’
연회 다음 날 한번, 소문에 대해 알게 된 뒤 보낸 두 번째 선물이 마음에 든 게 틀림없었다.
이제 자신들은 용서받고, 또 허락받았다.
케멀 의상실은 쾌재를 부르며 대대적인 영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자, 이 천은 황태자비 전하께서 촉감과 색을 칭찬하셨던 거랍니다!”
“어머! 그럼 난 이걸로 할래요!”
“내가 먼저예요! 내 것부터 해 줘요!”
짤랑짤랑, 돈 들어오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했다.
* * *
나는 휘황찬란한 드레스가 입혀진 토르소를 보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래서 이게 어디서 보내온 거라고?”
“케멀 의상실입니다.”
“아, 거기에서?”
“예, 연회 다음 날 한 번, 또 며칠 뒤에 한 번 더 보내왔습니다.”
토르소 옆에 있는 호화로운 상자가 먼저 보낸 것이라 했다.
열어 보자 안에는 사파이어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어찌할까요?”
토르소에 장식된 드레스는 천보다 보석이 더 많아 보일 정도였다.
번쩍거리긴 하는데, 예쁘다기보단 요란해 보였다.
특이한 건 토르소의 재질이었다. 나는 토르소에서 드레스를 벗기도록 명령했다.
그러자 은색으로 반짝거리는 무거운 금속제 토르소가 드러났다.
가까이 다가가 표면을 긁자, 겉에 입혀진 은박이 벗겨지며 금색이 드러났다.
이 토르소 전체가 금으로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꽤 거한 뇌물이라 이거네.’
자기들이 에반젤린에게 붙어서 저지른 짓을 봐 달라는 것이다.
‘내 연회 드레스를 자기들이 만들었다고 하면서 꿀 빨고 있다고 했지?’
내가 기절해 있던 닷새 동안 말이다.
나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었다.
‘돈은 마다할 필요가 없지.’
받은 돈이 아무리 많아도 내가 저들을 봐줄 이유는 되지 않았다.
돈도 내 거. 복수도 내 거.
좋아. 아주 좋다.
그럼 이제 어떻게 손 봐준다?
케멀 의상실이 나대 준 덕분에 좋은 구도가 만들어졌다.
‘황태자비 전속 디자이너의 데뷔에 말이지.’
이건 소소한 재미 겸 사교계 전체에 보내는 내 좋은 메시지가 되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