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마탑주 가스팔은 안타깝게 용의 일식을 직접 목격하지 못했다.
하지만 마력의 변화를 통해 이를 눈치챈 순간, 몇 년이 걸릴 탐사와 연구 계획을 모두 폐기하고 마탑으로 귀환했다.
이후 바로 황후를 찾아갔다.
용의 일식.
그리고 드래곤의 축복을 받았다는 황태자비.
어느 쪽이든 가스팔로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기 어려웠다.
그는 드래곤에 미친 자였으니까.
자신의 손으로 드래곤이라는 위대하고 아름다운 존재를 직접 재현하는 것.
그것이 가스팔이 일생을 걸고 있는 목표였다.
대륙 전체를 뒤져도 인간 중에는 그보다 드래곤에 대해 잘 아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그런 가스팔조차 지난 한 달 사이에 벌어진 일은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희귀한 일이었다.
이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황궁으로 향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황후도 그 여자가 진짜 드래곤의 축복을 받은 존재인지는 모르는 것 같고.’
황후가 자신만만한 척 내민 거래는 받아들였다.
어차피 그로서는 손해 볼 것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역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드래곤의 축복을 받았다는 그 여자를.
그래서 직접 상아의 침실로 숨어들었다.
들킬 생각은 없었으므로, 그는 조심해서 황태자궁을 탐색했다.
가스팔 정도의 마법사가 비밀리에 드나들지 못할 곳은 없었다. 황궁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궁정 마법사 두린보다 강한 마법사였으므로.
하지만 황궁의 몇 곳만은 그도 함부로 드나들 수 없었다.
‘드래곤의 혈통을 물려받은 황족들의 거처.’
그들은 주변의 마력을 자신의 지배하에 두기 때문에 마법사의 존재를 누구보다 빠르게 인식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그들의 이목을 속이고 끼어들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현재 황족 중 제일 위험한 인물은 황제와 황태자, 단둘뿐이다.
황태자가 머무는 황태자궁은 당연히 함부로 침입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위험에 대한 걱정보다 마법사의 호기심과 탐구심이 이겼다.
‘드래곤의 축복을 받았다니, 설마 직접 보기라도 한 건가?’
호기심이 불쑥불쑥 치솟아 참기 어려웠다.
축복을 받은 게 정말 맞다면 그 여자에게 드래곤이 어떤 증거라도 남겨 놓은 것은 아닐까.
가슴이 두근거렸다.
소년 시절, 아르타누스의 조각을 처음 보고 설레며 마법사의 길에 들어선 그때의 기분이 되살아나는 느낌이다.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 죽을 것 같았다.
조금 고민한 가스팔은 수십 개의 결계를 만들고, 황태자궁 상아의 침실에 침입했다.
황태자에게 들키더라도 목숨은 건져서 도망칠 자신은 있었다.
그 정도 실력이 없으면 마탑주가 될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어둠 속에 숨어서 직접 확인한 황태자비는 평범해 보였다.
한눈에 특별함을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아니었다.
흥이 식었다.
그대로 물러나려던 찰나였다.
갑자기 황태자비가 그의 기척을 눈치챘다.
“누구냐!”
“…호오? 어떻게 내가 여기 있는 걸 알았지? 그래도 뭔가 특별한 게 있긴 한 건가?”
꺼지려던 흥미가 다시 치솟았다.
한번 들킨 이상 굳이 숨어 있을 이유는 없었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여자는 공포로 얼어붙었다.
‘여전히 특별할 게 하나도 없는 여잔데 말이야.’
가스팔은 힐리아에게 그동안 자신이 품어 온 의문을 마구 퍼부었다. 협박을 곁들여서.
공포로 굳어 있는 여자에게서 정보를 짜낼 수 있으면 좋고,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정 귀찮으면 비밀리에 죽여 버리고 황후에게 따로 대가를 달라고 해도 되겠지.’
그런데 여자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공포에서 벗어났다.
이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가스팔은 힐리아에게 들킨 순간, 숨기고 있던 자신의 마력을 전부 드러냈다.
마력을 느끼지 못하는 일반인이라도 이렇게 압도적이고 적대적인 마력 방출 앞에선 본능적인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다.
이 여자가 한 일은 뱀 앞에서 생쥐가 공포를 이겨내고 저항한 것과 비슷했다.
아니, 그보다 더 대단한 일이다.
‘뭐지? 이 여자?’
가스팔이 놀라서 멈칫한 사이였다.
힐리아는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가스팔이 경악할 미끼를 던졌다.
“에반젤린도, 황후도 당신이 원하는 걸 줄 순 없어.”
“생생하게 살아 있는, 드래곤의 혈통을 물려받은 황족의 신체 가지고 싶지 않아?”
마치 마음속을 뒤져 확인한 듯했다.
어떻게?
가스팔을 입을 떼다가 멈칫했다.
멀리서 거대한 마력이 빠르게 다가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강력한 마력에 대한 지배력을 가진 건 황족뿐.
‘황태자가 오고 있군.’
저 여자는 그것도 알고 있는 건지 당당하게 웃으며 요구했다.
“다음엔 제대로 된 대가를 들고 정중하게 방문하도록 해.”
가스팔은 저도 모르게 놀라고 경탄했다.
그야말로 우아하고 위엄이 넘치는, 황태자비다운 태도였기 때문이다.
“꼭 줄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군?”
이어진 대답은 가스팔도 실소할 수밖에 없었다.
“남편을 원하면 그 아내에게 먼저 허락을 받아야지.”
뻔뻔할 정도로 자신감이 넘치는 말이었다.
그는 오늘 이 여자를 처음 만났다. 속내를 알려 준 적이 없었다.
근데 이 여자는 자신이 뭘 원하는지 구체적으로 잘 알고 있었다.
당혹스러움은 곧 의문과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지금까지 그의 흥미를 끈 건 드래곤뿐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 다른 한 존재가 추가되었다.
‘이 여자에게 흥미가 생겼어.’
“좋아. 다음에는 대가를 들고 아주 정중히 찾아오도록 하지. 황태자비 전하.”
가스팔은 어울리지 않게 우아한 태도로 허리를 숙여 예를 올렸다.
이것만은 예상 못 했는지 힐리아가 깜짝 놀라는 게 보였다.
가스팔은 피식 웃으며 만약을 대비해 준비해 두었던 스크롤을 찢었다.
순간 이동 마법이 발동했다.
그는 미소 어린 대답을 남긴 채, 나타났던 때처럼 갑자기 사라졌다.
* * *
쾅!
상아의 침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아니, 산산이 부서졌다.
콰드득!
“힐리아!”
그와 함께 아르파드가 침실 안으로 뛰어들었다.
힐리아는 천천히 뒤돌았다.
방 안에는 흐트러진 마력의 여파가 소용돌이치며 흐르고 있었다.
힐리아의 긴 머리카락과 흰색의 얇은 침의가 정신없이 휘날렸다.
아르파드는 순간적으로 힐리아가 그대로 날아가 버리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다급하고 절박하게 손을 뻗었다.
두 팔로 허리를 단단히 붙잡아, 그녀가 바람에 휩쓸려 사라지지 않았음을 확인한 후에야 아르파드는 겨우 안도할 수 있었다.
그제야 방 안의 상황을 둘러볼 정신이 생겼다.
방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작은 가구와 집기들이 바람에 쓸려 넘어지고 깨져 있었다.
방금 펼쳐진 순간 이동 마법의 여파였다.
다행히 힐리아는 무사했다.
머리카락 한 올 다치지 않았다. 그것이 가장 중요하고, 그거면 충분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음, 그게… 미안해요. 아르파드.”
“뭐가 미안하지?”
이 여자는 왜 이렇게 미안하다는 말을 자주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용서를 구할 순간이 아님에도.
자신이 아팠던 게 미안하다고 하고, 침실에서 습격당해 놓고 사과하고 있었다.
보통은 반대 아닌가?
아르파드는 이어진 아내의 대답에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잊어버렸다.
“내가… 당신을 팔아넘겨 버렸거든요.”
“…그건, 진짜 미안할 일이 맞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