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
매우 꺼림칙한 감정이었다.
막 그녀의 피를 핥으려던 찰나에 눈을 떠 꿈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에서 아르파드는 이런 생각까지 했다.
‘아쉬웠어.’
제대로 맛보지 못한 것이.
‘…정말로 이상하고 끔찍한 생각이다.’
아르파드는 잠시 자신의 광증이 그런 방향으로 발현된 게 아닌가 의심했다.
이런 걱정도 들었다.
‘이 생각을 알면, 안 그래도 의심 많은 힐리아는 달아나려 들지도 모르겠군.’
안 그래도 예민하고 감이 좋은 여자다.
어쩌면 자신의 반응만 보고 눈치챌지도 몰랐다.
이 불안감 때문에 아르파드는 평소라면 상아의 침실에 들었을 시간까지 집무실에 남아 있었다.
그 순간, 아르파드의 예리한 감각 한쪽 구석을 찌르는 이질감이 있었다.
“!”
침입자.
그것도 힐리아가 있을 상아의 침실 방향이다.
경악한 아르파드는 거칠게 문을 열고 전력으로 달렸다.
‘힐리아!!!’
* * *
‘…늦네.’
나는 곧 고개를 저어 이 생각을 부정했다.
‘아니, 이러면 꼭 내가 아르파드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잖아!’
나는 그냥 내 방에 앉아 있는 것뿐이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창피해하고 있는 거지.’
애니나 율켄에게는 내가 왜 이렇게 부끄러워하는지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아르파드가 날 구석구석 돌봐줬다는 걸 자연스럽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야, 우리 둘은 공식적으로 부부니까.
매일같이 한 침대를 쓰고 있으니까.
내가 이렇게 내외하는 걸 알면 의아하게 여길 거다.
나는 달아오른 얼굴을 손등으로 식히며 중얼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살살 일할걸.”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르파드가 와서 빨개진 내 얼굴을 보면 뭐라고 생각할까?
눈치 빠른 인간이니 다 들킬지도 몰랐다.
벽의 장식장 안에 넣어 두었던 유리새 한 마리 꺼냈다.
지난번 연회 때 바람 부는 특수 효과용으로 써먹었던 그 장난감이다.
시동어를 말하자 작은 날개가 파닥거리면서 딱 기분 좋은 바람이 내 얼굴을 간질였다.
‘그래.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구는 거야. 그 인간도 못 본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잖아?’
그렇게 겨우 마음을 다잡던 찰나였다.
유리새 장난감에 약간의 이상이 생겼다.
파직!
아주 작은 빛 알갱이가 튕기며, 장난감이 버벅거렸다. 바람이 끊겼다가 다시 불기를 몇 번 반복했다.
“!”
작은 일이지만, 나는 놀라서 긴장했다.
‘이건 다른 강력한 마력이나 마도구가 근처에 있을 때 벌어지는 현상이야!’
드문 오류지만 회귀 전 워낙 다양한 일을 겪은 덕분에 알 수 있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며 긴장한 목소리로 외쳤다.
“누구냐!”
“…호오? 내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았지? 그래도 뭔가 특별한 게 있긴 한 건가?”
등 뒤에서 온몸의 솜털이 쭈뼛 서는 듯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아르파드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아는 목소리였다.
이 순간, 여기서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이기도 했다.
나는 경악해서 뒤돌았다.
그곳에는 어둠 속에서 녹아 나온 듯한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검은 후드를 푹 눌러쓰고 있어 드러난 것이라곤 코 아래 입과 턱뿐이다.
나는 후드 속에 감춰진 저 남자의 진짜 얼굴을 알았다.
손으로 입을 가려 비명처럼 그의 이름을 내뱉는 걸 겨우 막을 수 있었다.
‘마탑주 가스팔!’
공포가 뱀처럼 내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제발, 제발 그만! 너무 아파요!”
내 절망과 고통은 그에게 호기심과 즐거움이 될 뿐이었다.
마탑주 가스팔과의 기억은 세 번째 삶에서도 거의 끝에 있었던 일이다.
나에겐 멀게 느껴지지 않아 뱀 앞에 선 생쥐처럼 몸이 굳었다.
가스팔은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다가왔다.
복잡한 붉은 문양이 빼곡히 새겨진 손가락을 뻗어 내 턱을 만지려 들었다.
“네가 그 유명한 드래곤의 축복을 받은 황태자비인가…….”
“…….”
그는 고개를 이리저리 갸웃거렸다.
“일반인과 마력의 크기도, 형질도 그다지 큰 차이는 없어 보이는데 말이지.”
칼날 같은 남자의 손톱 끝이 내 턱에 닿았다.
“정말 뭔가 특별한 게 있다면 해부해 보면 알 수 있을까…….”
이게 농담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알았다.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 궁금했거든. 들킬 예정은 없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좀 확인해 보면 되겠군.”
소름이 쫙 끼쳤다.
“용의 신부. 너에게 그것보다 어울리는 별명은 없어.”
내가 어떤 존재인지 깨닫게 해 준 남자.
동시에 세 번의 회귀 중에도 손꼽히게 끔찍한 경험을 내게 준 원수.
에반젤린과 루드비히를 제외하고 내가 가장 증오하는 이를 꼽는다면, 가스팔이다.
이 남자는 내 몸을 학대하며 괴롭힌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었다.
그런 남자 앞에서 바짝 얼어붙어 있을 수는 없었다.
‘정신 차려, 힐리아!’
입 안에서 피 맛이 돌았다.
넋을 놓고 있어선 안 된다.
찌릿한 아픔으로 다행히 이성이 천천히 돌아왔다.
그 순간 턱에 닿을락 말락 하고 있던 가스팔의 손을 탁 소리가 나도록 쳐 냈다.
“!”
가스팔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분명 조금 전까지는 나를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바뀌었군? 마치 사람이 바뀌기라도 한 것처럼? 특이해.”
본능적인 공포를 나는 억지로 씹어 삼켰다.
떨림을 누르고, 분노를 일으켰다.
힘을 가득 준 목소리가 침실에 퍼졌다.
“예의를 지켜라, 마법사.”
“내가 마법사라는 건 어떻게 확신하지?”
“벽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묘기를 마법사 말고 누가 할 수 있을까?”
가스팔의 정체도 알고 있지만, 티를 내진 않기로 했다.
후드 아래 드러난 가스팔의 입매가 날카롭게 호선을 그렸다.
기분 나쁜 웃음이 귓가를 찔렀다.
“배짱 좋군. 보통 귀족 여자들은 내 앞에 서기만 해도 공포로 얼어붙어 버리거든.”
그야 그렇겠지. 너 같은 변태 사이코 앞에서 안 무서워할 여자가 있겠냐.
“나는 보통의 귀족 영애가 아니니까.”
“그래, 그러시겠지. 대단하신 드래곤의 축복을 받은 황태자비시니까…….”
그는 뱀처럼 나를 향해 고개를 쭉 내밀었다.
“그래서, 진짜인가? 사실이야?”
“…….”
“정말 드래곤을 직접 만났나? 선택받았어? 응? 어땠지? 어떤 모습이었나? 변신한 모습이었나? 아니면 드래곤의 본체? 본체라면 크기는? 비늘과 발톱은? 어떤 식으로 의사를 전달했지? 말해 줘. 어서. 어서!”
우르르 쏟아 내는 질문에는 광기가 선명하게 응어리져 있었다.
“어서 말해! 네 몸을 산산 조각내서 소문이 진짜인지 확인할 수도 있으니!”
그의 퍼런 서슬에 후드가 뒤집어졌다.
내내 가려져 있던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의 얼굴은 놀랍게도 제법 수려했다. 긴 은발은 잘 정리되어 묶여 있었고, 연두색 눈동자는 봄의 새싹을 연상시켰다.
단, 왼쪽 눈을 중심으로 새겨진 붉은 문신은 그의 광기를 상징하듯 기괴하게 비틀린 모양새였다.
나는 입술을 짓씹으며 웃었다.
없는 여유를 닥닥 긁어내서 대꾸했다.
“내가 왜?”
“…?”
그러자 가스팔이 기괴하게 고개를 꺾었다.
“내 말, 못 알아들었나?”
“아니, 아주 잘 알아들었어.”
나는 잠시 잊고 있었다. 내 처지를.
지금 나는 칼끝에 선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태였는데.
불안하고 위태로운 처지였다.
누군가에게 맨몸 좀 보였다는 이유로 부끄럽다는 한가하고 사치스러운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나는 가스팔이 절대 무시할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에반젤린도, 황후도 당신이 원하는 걸 줄 순 없어.”
“…?”
가스팔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지워졌다.
“왜 황후나 에반젤린 이름이 나오지?”
나는 그의 반문을 무시하고 말했다.
“루드비히 따위의 옅은 피를 가진 황족으로는 만족 못 하잖아, 당신. 안 그래?”
뛰어난 마법사인 가스팔은 드래곤에 집착했다.
그 때문에 그를 움직일 수 있는 건 드래곤과 관련된 정보 혹은 실험체를 내줄 때만이었다.
“…정말로 내가 뭘 원하는지 알고 있군?”
“조금 전에 드래곤 드래곤 하고 떠들어 댔는데 모르면 바보지.”
사실은 전생에 몇 달간 실험당하고 시달리면서 뼈저리게 알게 된 거지만, 당연히 말할 생각은 없다.
그리고 그가 가장 원할 미끼를 흔들었다.
“생생하게 살아 있는, 드래곤의 혈통을 물려받은 황족의 신체를 가지고 싶지 않아?”
“…!”
가스팔의 얼굴에서 여유와 광기 넘치던 미소가 지워졌다.
회귀 전, 나는 몇 번이나 들었다.
아르파드의 시체로 만들어진 불완전한 괴물을 앞에 둔 채, 그가 중얼거리던 말을.
“아아. 이건 거의 반인반룡에 가까운 순도가 높은 혈통이야.”
“살아 있을 때의 싱싱한 육체를 내 손에 넣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으면 내 손으로 저 아름답고 완벽한 종족을 재현해 낼 수 있었을 텐데…….”
지금 그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그래, 내가 속을 읽은 것처럼 콕 집어서 말해서 놀랐겠지.
나는 여유 넘치고 재수 없는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어갔다.
“다음엔 제대로 된 대가를 들고 정중하게 방문하도록 해.”
잠시 멈칫했던 가스팔의 얼굴에 곧 경탄 어린 미소가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