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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혼으로 남편부터 바꾸겠습니다-90화 (90/210)

90화

조금 전까지 매우 좋았던 아르파드의 기분은 한 여자의 한마디에 바닥으로 처박혔다.

“나중에 당신 애인이 될 사람이 불쌍해져서요.”

애인이라니.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말 자체가 기분 나쁜 게 아니다.

말을 꺼낸 사람이 문제다.

‘아내가 할 말인 건가?’

물론 정략결혼으로 맺어지는 부부 사이에, 정부를 따로 두는 건 이상하지 않았다.

그의 부모 같은 경우가 도리어 드물었다.

하지만 지금 아르파드에게 따로 여자가 있는 것도 아닌데, 힐리아는 종종 그걸 기정사실처럼 말하곤 했다.

‘그렇게 될 거라고 확신하는 것처럼.’

이를 떠올리자 기분이 더욱 안 좋아졌다.

힐리아는 때때로 미래를 보고 온 것처럼 행동했다.

그를 찾아와 약탈혼을 제안한 순간부터.

며칠 전 용의 일식을 예측하고 모든 계획을 짜 두었던 것처럼.

그렇다면… 자신에게 다른 여자가 생기는 것도 예측한단 말인가?

“나에게 애인이 왜 생겨?”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

힐리아의 대답에 더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그래서였다.

아르파드가 퉁명스럽게 말한 것은.

“나는 애인을 따로 둘 생각이 없어.”

그러자 내내 여유 넘치던 힐리아의 보라색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왜요?”

“이상한 질문이군.”

“아니, 나중에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그래. 미래는 모르지.”

힐리아는 꼭 아는 듯 행동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확언할 수 있는 게 있었다.

“나는 내가 잘 알아. 아내 외에 애인을 따로 둘 생각 없어.”

“…….”

힐리아는 할 말을 잃은 듯 멍하니 입을 벌리고 그를 바라봤다.

그런 그녀에게 아르파드는 못을 박듯이 말했다.

“그러니 그대도 포기해.”

“네? 뭘요?”

“애인을 따로 두는 거.”

“아니, 내가 언제 애인을 따로 두려고 했다고……!”

바락 화를 내려던 힐리아는 곧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잠깐. 당신 아직도 그 오해 포기 안 했어요?”

“무슨 오해?”

“벨테인 경이요!”

그녀의 입에서 애인이라는 단어와 벨테인의 이름이 연결되자, 아르파드의 기분은 이제 땅을 파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기분이 안 좋았다.

아니, 정확히는 당장에라도 저 문밖에서 번을 서고 있을 그자를 끌고 와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기분이 저조했다.

당연히 힐리아로 인해 실천하지 못했다.

힐리아는 이걸 아는지 모르는지 변명을 늘어놓았다.

“몇 번이나 말했잖아요. 벨테인 경은 그저 충실한 기사라고요. 당신도 알면서 그냥 놀리려고 하는 말 아니에요?”

“…….”

맞긴 했다.

처음 한 번은 오해하긴 했지만, 그 오해가 진지하게 이어진 건 아니었다.

그보단 힐리아를 놀리는 것에 가까웠지.

하지만 이 순간만은 달랐다.

아르파드는 정말, 진심으로, 맹렬하게 벨테인이라는 소리만 들어도 속이 부글부글 끓고, 신경이 예민해졌다.

힐리아는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말을 이어갔다.

“나와 벨테인 경은 정말로 아무것도 없어요. 물론 그의 충성심에는 나도 감사하고 있지만 그뿐이에요. 아마 벨테인 경은 다른 가문의 가사였더라도 똑같은 충성을 바쳤을걸요?”

“…….”

아르파드는 입을 다물었다.

그게 힐리아의 말에 동조해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지.

‘나도 아까 그놈의 표정을 못 봤다면 그렇게 생각했겠지.’

기사도의 화신 같은, 꽉 막힌 고집불통이라고.

힐리아에게 그가 보이는 건 기사로서의 충성심뿐일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미 보고 말았다.

“…힐리아의 남편은 나다.”

‘힐리아의 남편’이라는 말에 명백히 동요하는 벨테인 경을.

미약하지만 분함과 질투심까지 스쳐 지나가는 걸 그는 똑똑히 봤다.

‘같은 남자이기에 알아볼 수 있었지.’

그런데 그런 기 싸움을 한 벨테인 경의 이름이 지금 여기서 또 오르내렸다.

단둘이 있는 침실에서.

아르파드는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 * *

“…….”

“…….”

나와 아르파드를 서로를 바라보며 고집을 부렸다.

어색하고 껄끄러운 침묵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한숨을 쉬며 먼저 선공에 나선 건 나였다.

“당신이 왜 자꾸 벨테인 경을 들먹이는 건지 모르겠지만… 정말 아니에요.”

“…알아.”

“알면서 왜 그러는 거예요?”

나는 황당해하며 물었다.

그러자 아르파드가 되묻는다.

“그러는 그대는 왜 내가 당연히 바람피울 걸 전제로 깔고 말하지?”

“…….”

“다른 건 나를 믿나?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워?”

여기서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당신의 미래를 아니까?

그러려면 설명해야 하는 게 너무 많았다.

그 전에 조금 두렵다.

타인에게 내가 회귀했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말하는 게.

나는 이미 누군가에게 말한 적 있었고, 장렬하게 실패했으니까.

“사실 난 미래에서 되돌아왔어요.”

그 사람은…….

나는 너무나도 씁쓸한 기억을 억눌렀다.

역시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아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넘어갈 상황은 아니었다.

적어도 진심의 일부는 보여야 서로 오해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회귀에 대한 정보만 빼고서.

“사실 대비하는 거예요.”

“…무슨 대비를.”

“기대하지 않는 대비죠. 기대하지 않으면 상처받지 않을 테니까.”

말하면서 조금 놀랐다. 아르파드가 곧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될 걸 알고, 나도 모르게 그 상황을 대비한 모양이다.

‘…뭐지? 이건?’

내가 아르파드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가 다른 여자를 좋아하든 말든 상관없는 것 아닌가?

내가 왜 이런 생각을…….

그때, 아르파드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어와 상념이 중간에 끊겼다.

“…나에게 기대하지 않는다는 소린가?”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기대하지 않는 게 나를 위해 낫다는 게 될 터다.

사실대로 대답하자니 마음에 걸렸다.

조금 전에는 진심을 알려 주고 싶다고 생각한 주제에.

너무 복잡했다.

어떻게 대답할지 고민하는데 아르파드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미친 황태자를 온전히 믿긴 힘들겠지. 이해해.”

그렇게 말하는 아르파드는 어제보다 더 상처받은 표정이었다.

그걸 보자,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아니에요.”

“…뭐가?”

“내가 당신을 못 믿어서 그런 건 아니라고요.”

“하지만 방금…….”

“내가 배신을 하도 많이 겪어서, 사람을 잘 못 믿어요. 그리고 미리 최악을 상정하는 버릇도 있고요.”

이건 회귀를 거치면서 생긴 진짜 버릇이다.

“애초에 정말 조금도 믿지 않았다면, 약탈혼 의뢰도 안 했어요.”

“…….”

아르파드의 얼굴에 전에 본 적 없는 표정이 떠올랐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이 상황이 너무나도 부끄럽고 견디기 힘들었다.

회귀 사실을 밝힌 건 아니지만, 타인에게 내 날것 그대로의 속내를 일부라도 드러낸 게 처음이라서?

아마 그게 맞을 거다.

나는 발가벗은 것보다 더 수치스러웠다.

그래서 바로 고개를 돌린 다음, 침대로 뛰어들어 이불 속에 고개를 푹 파묻고 외쳤다.

“오늘은 따로 자요!”

너무 민망했다.

아르파드의 웃음소리가 낭랑하게 방 안을 울렸다.

그리고 곧 부스럭거리는 기척이 옆으로 다가왔다.

“당신 침실로……!”

내가 바락 화를 내며 이불 속에서 고개를 든 차였다.

아르파드의 얼굴이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싫어.”

확!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르파드는 웃음기 없는 진지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나는 다른 침대에서는 잘 생각이 없어.”

나는 꾸물거리며 뒤로 물러나 침대에서 내려가려 했다.

“그럼 내가 딴 방으로……!”

하지만 아르파드에게 잡혀 버렸다.

“우리는 공식적으로 신혼인 잉꼬부부야. 각방을 썼다고 알리는 건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군.”

맞는 말이긴 해서 더욱 얄미웠다.

그래서 나는 오기로 외쳤다.

“난 당신 얼굴 안 보고 잘 거예요!”

* * *

그의 아내는 말대로 했다.

팩하니 뒤로 돌아서 잠들었고, 아르파드는 그녀를 조심스레 등 뒤에서 끌어안았다.

새삼 깨달았는데 그녀와 한 침대를 쓴 이후, 아르파드는 꽤 깊이 잠들게 되었다.

드래곤의 혈통답게 그는 그다지 오랜 수면이 필요 없었다.

하루 한두 시간으로도 충분했고, 긴장할 때에는 며칠 동안 밤을 새워도 너끈했다.

그런데 그녀와 함께 있으면 이상하리만치 잠이 잘 왔다.

깊이 잠들게 된다. 답지 않게.

그러니까… 이 순간처럼.

아르파드는 꿈을 잘 꾸지 않았다.

잠이 없는 만큼 꿈을 꿀 기회가 적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그만큼 후회하거나 되새길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일지도.

그렇기에 아르파드는 꿈에 익숙지 못했다.

특히나, 그것이 악몽이라면 더더욱.

“싫어! 싫어어!”

여자가 울부짖고 있었다. 그가 잘 아는 목소리다.

흐린 시야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더럽혀진 채 대충 잘린 분홍색 머리카락. 희고 약한 피부 곳곳에 남은 상처와 멍들.

그리고 무엇보다 공포에 질려 울고 있는 표정.

“살, 살려 줘… 제발…….”

힐리아였다.

울부짖는 그녀를 쓰러뜨리고 짐승처럼 올라탄 것은 분명히 자신이었다.

검은 돌바닥에 흐트러진 옅은 분홍빛 머리카락이 뇌리에 선명하게 남았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제대로 판단할 수 있는 이성이 없었다.

그저 짐승처럼 본능에만 따를 뿐.

그는 힐리아의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핥기 시작했다.

“―!!!”

눈을 떴을 때, 아르파드는 깨달았다. 자신이 꿈을 꿨다는 것을.

태어나 처음 경험하는 악몽.

이상하리만치 생생했다. 그리고 지독했다.

아르파드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방금 제 남편이 무슨 꿈을 꿨는지 알 리 없는 힐리아는 그의 팔에 안겨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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