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무력하게 백금 열쇠를 빼앗긴 에피알 백작 부인은 이제 볼일이 다 끝났다는 듯한 축객령만 들었다.
“이제 황후궁으로 돌아가 보도록.”
어린 황태자비는 대공비가 바친 백금 열쇠를 보며, 그녀에겐 시선도 주지 않았다.
결국 시녀장은 마음과 뺨의 상처만 안고 황후궁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리고 파리하게 질린 얼굴의 주인 앞에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황후 폐하. 제가 미력하여…….”
“되었다. 이미 황명이 내렸을 때, 네가 어찌할 수 있는 수준은 이미 지난 것이니.”
황후는 시녀장의 붉어진 뺨을 보며 물었다.
“황태자비가 네게 손을 댔느냐?”
“아닙니다. 악시온 대공비였습니다.”
“그 여자가……!”
이자벨 황후는 이를 갈았다.
자신이 황후임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던 게 그 노인이다.
그런데 그 노인이 어린 것의 시녀장을 자처했다고?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나에게 모욕을 주려고 작정한 거야.’
악시온 대공비가 신분을 내세워 무례했다는 이유로 황후의 시녀장 뺨을 때린 것도 그랬다.
평소라면 이를 빌미로 싸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큰 타격을 입고 연금까지 당한 상황이다.
‘자중해야 하는 때야.’
최대한 조용히 숨죽이고 있어야 했다.
“이만 물러가라. 피곤하다.”
“흑, 예… 폐하.”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멍청히 기다리기만 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맹렬하게 머리를 굴렸다.
연회장에서 힐리아와 아르파드를 향한 황제의 눈빛 안에서는 희망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 불씨를 누가 되살려 놨는지는 뻔했다.
‘그 계집이겠지.’
황제가 알려진 것과 달리 아들을 걱정하고 사랑하고 있음을 아는 이는 별로 없다.
황후 이자벨은 바로 그 적은 이 중 하나였다.
그 점을 이용해 황후 자리를 손에 넣기도 했으니까.
“제겐 자격이 없습니다. 황제 폐하.”
“그대는 황후의 목숨을 구한 바 있지. 그리고 끝까지 그녀에게 충성했고. 록셀린이 믿고 의지한 만큼 나도 그대를 믿는다.”
“…….”
“나는 아르파드 외에 다른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다. 그 아이는 유일한 후계자가 될 거다.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이는 황제가 죽은 아내 외에 어떤 여자에게서도 더는 자식을 볼 생각이 없다는 의미일 터였다.
“그러니 다음 황후는 황손을 낳을 여자가 아니라, 아르파드를 보호하고 돌보아 줄 사람이 필요하다.”
“…명을 받자 옵니다.”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황제가 자신에게 손톱만큼의 마음도 없었다는 걸.
그가 나를 선택한 건 과거 록셀린 황후를 구한 공에 대한 보답.
충성심에 대한 믿음이었다.
아르파드의 광증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루드비히를 황족으로 인정한 황제는 이제 달라졌다.
아르파드를 적대하는 자신을 더는 묵인하지 않았고, 움직였다.
힐라아 그 계집애로 인해 아들에게 희망을 가진 게 분명했다.
하지만 황제가 아직 미처 모르는 게 있었다.
‘아르파드의 폭주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믿고 있겠지. 그게 당신의 실수야.’
이자벨은 가슴 속 악의의 칼날을 갈며 중얼거렸다.
“이번에도… 당신은 선택을 잘못한 거야… 발터.”
그때, 어둠 속에서 비꼬는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 봐도 참 추하단 말이야. 비틀린 애정이라는 건.”
“…!”
황후는 경악했다.
하지만 그걸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침착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잘 아는 얼굴이 있었다.
“오랜만이군. …가스팔.”
그러자 후드를 깊게 눌러쓴 남자가 빙긋이 웃었다.
* * *
나는 허리띠 장식의 함 속에 담긴 백금 열쇠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악시온 대공비에게 말해 하룻밤만 내가 지니기로 한 열쇠가 한없이 예쁘고 뿌듯했다.
그러자 막 침실에 들어선 아르파드가 물었다.
“그렇게 좋은가?”
“당연하죠! 이건 최고의 전리품 중 하나라고요!”
시녀들 앞에서야 안 그런 척했지만, 설레고 기쁜 걸 감추기 힘들었다.
회귀 전 이 백금 열쇠는 늘 황후의 손에서 에반젤린에게 전해졌으니까.
그걸 내가 빼앗아 온 것이다.
아르파드가 손을 뻗어 백금 열쇠를 들어 올렸다.
달랑달랑.
“뭐, 상징성을 생각하면 이해 못 할 바도 아니긴 하지만…….”
나는 아르파드의 손에서 열쇠를 빼낸 다음 상자에 다시 고이 모셔 놨다.
“내가 만진다고 닳나?”
“닳아요.”
이건 내 보물이라고!
내가 히죽거리며 웃자, 아르파드의 표정이 또 살짝 뾰로통해졌다.
뾰로통…….
‘내가 떠올렸지만, 진짜 아르파드랑 안 어울리는 표현인데.’
그런데 저 외에 가져다 붙일 만한 마땅한 표현이 없는 게 사실이다.
그는 또 뭐가 불만인지 내 어깨를 잡고 투덜거렸다.
“슬프군,”
“또 뭐가요?”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어이없는 소리를 했다.
“그대가 가진 최고의 전리품 자리를 빼앗기다니, 서운해.”
“…네?”
이건 또 무슨 창의적인 헛소리지?
하지만 어이없는 건 나뿐이고, 아르파드는 진심이었다.
“백금 열쇠 따위보다 황태자이자 용병왕인 내가 지위 면에서도 권력 면에서도, 또 무력 면에서도 더 쓸모 있는 전리품이야.”
“…본인을 그렇게 격하시키고 싶어요?”
“어째서 격하지? 난 그저 사실을 말하는 것뿐인데.”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하려다가 새삼 깨달았다.
‘음, 잠깐? 말이 안 되진… 않네?’
전리품이라는 건 결국 누군가와 싸워서 쟁취한 걸 말하는 거 아닌가.
그렇게 본다면 아르파드는 내 첫 전리품인 셈이었다.
누구와 싸웠냐고?
‘그야 에반젤린이라고 볼 수도 있고, 황후라고 볼 수도 있겠지.’
혹은… 아르파드 자신이라던가.
어쨌건 나쁜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기로 했다.
“좋아요. 인정해 줄게요. 황태자비 최고 전리품은 황태자여야 하니까.”
그러자 아르파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이렇게 반응할 줄 몰랐다는 듯한 반응이다.
“왜 놀라요? 혹시 내가 진짜 전리품이라고 하니까 기분 나빠요? 취소해 줘요?”
아르파드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니. 좀 의외라서.”
“뭐가 의외인데요?”
“난 그대가 또 몸을 사릴 거라 생각했거든.”
내가 몸을 사린다고?
“어찌 감히 황태자 전하를 전리품 취급하냐고 비꼬면서 물러날 줄 알았지.”
“안 그래서 아쉬워요?”
그러자 아르파드는 고개를 젓더니 소년처럼 환하게 웃었다.
“아니, 기분 좋아.”
“…….”
어째서? 왜 기분이 좋아?
자신을 물건 취급한 건데?
나는 아르파드를 의심 가득한 눈으로 보았다.
‘설마 그쪽(?) 취미인 건 아니겠지?’
진짜라면 누군진 모르겠지만, 아르파드의 애인이 될 여자가 좀 불쌍해진다.
아르파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런 표정을 하지?”
요즘 들어 이 인간 행동이 좀 이상했다.
내 눈이 미쳐서 그렇게 보이는 건지도 모르겠는데…….
‘묘하게… 애교가 늘었다?’
아까의 뾰로통함에 이어, 아르파드에게 매우 안 어울리는 표현이 또 붙었다.
애교라니.
게다가 이런 느낌이 든 건 처음도 아니라서 더 경악스럽다.
나는 내게 놀라며 솔직하게 대답해 주었다.
“나중에 당신 애인이 될 사람이 불쌍해져서요.”
“…뭐?”
조금 전까지 ‘뾰로통’이니, ‘애교’니 하는 표현을 떠올린 건 역시 내가 미쳤던 게 틀림없다.
지금의 아르파드는 더없이 험악한 표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애인이 왜 생겨?”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
내가 잘 아는 황태자이자, 용병왕 제랄드다운 표정.
지하 묘지에서 만나자마자 내 목덜미에 칼을 들이댄 남자가 보일 법한 표정이다.
나도 모르게 목덜미를 매만졌다.
그러자 아르파드의 어깨가 눈에 띄게 떨렸다.
‘뭐지? 왜 저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