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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혼으로 남편부터 바꾸겠습니다-88화 (88/210)

88화

시녀장 에피알 백작 부인은 흔들림 없이 표정을 가다듬더니 바로 대답했다.

“더없이 강녕하십니다. 돌아가서 비 전하께서 황후 폐하를 걱정하고 계신다고 전해 드리겠습니다.”

황후가 시녀장으로 둘 만한 사람이긴 한 모양이다.

나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하도록.”

그러자 몸을 일으킨 시녀장이 바로 발을 빼려 들었다.

“하면 이만 돌아가, 비 전하의 마음을 전하겠습니다.”

어딜 도망가려고.

나는 손을 흔들어, 시녀장의 퇴로를 막았다.

“아니, 아직 용건은 끝나지 않았어. 용건이 다 끝난 뒤에 돌아가 황후 폐하께 내 걱정을 전해 드리도록.”

“…….”

시녀장은 말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그래서 무슨 용무냐고 먼저 묻지 않는다.

이미 예상하기 때문이겠지.

나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어차피 황후의 자존심 긁는 거나 기 싸움은 다음 문제니까.

“백금 열쇠는 그대가 관리하고 있겠지?”

황실 내정의 상징인 백금 열쇠.

그것은 황실 내탕금과 모든 창고에 접근할 수 있는 상징물이었다.

열쇠에는 황후의 상징인 달을 품고 있는 은빛 드래곤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었다.

하지만 창고와 금고의 열쇠를 고귀한 여성이 직접 드는 건 어울리지 않는다.

그 때문에 황후의 제일가는 측근이 늘 그 열쇠를 몸에서 떼어 놓지 않고 관리하는 게 관례였다.

지금 백금 열쇠의 관리인은 황후궁의 시녀장 에피알 백작 부인이다.

그러니 가지고 있지 않아 내놓을 수 없다는 말은 못 한다.

열쇠를 절대 떼어 놓아서는 안 되는 게 시녀장의 책무니까.

잠시 망설이는 듯하던 시녀장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애니에게 말했다.

“그래. 그럼 시녀장에게서 백금 열쇠를 받으렴, 애니.”

“예. 비 전하.”

사전에 말해 둔 대로, 애니는 용감하게 시녀장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두 손을 내밀며 말했다.

“황명이 있었음은 아시지요? 비 전하께 백금 열쇠를 바치십시오.”

그러자 차마 나를 바라보지 못한 시녀장이 애니를 노려보며 미간을 구겼다.

“설마 비 전하, 이 시녀에게 백금 열쇠의 관리권을 맡길 생각이십니까?”

“그걸 왜 그대가 묻지?”

그러자 표독스러운 표정의 시녀장이 나서서 나에게 항의했다.

“비 전하. 백금 열쇠는 황실 내정의 상징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존귀한 권위인지 모르시옵니까?”

나는 말 없이 다리를 반대로 꼬았다.

시녀장의 항의는 막힘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한데 그 백금 열쇠의 관리인 역할을 이렇게 어리고 신분이 부족한 이에게 맡기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저는 절대로 이런 이에겐 백금 열쇠를 내줄 수 없습니다!”

나는 담담하게 물었다.

“그건 황후 폐하의 뜻인가?”

지금 황후가 황제의 뜻을 거역하려고 하느냐고 묻자, 바로 빠져나갔다.

“그럴 리가요. 이건 어디까지나 현 백금 열쇠의 관리인으로서 제 판단입니다.”

“일개 관리인이 멋대로 판단해서 황명에 거역하겠다?”

그러자 시녀장은 피식 웃었다.

“그럴 리 있겠습니까. 황명인데요. 저는 다만 백금 열쇠를 자격에 걸맞은 관리인에게 넘겨주고 싶을 뿐이랍니다.”

그녀는 짐짓 사근사근하게 말했다.

“비 전하께서 마땅한 자격이 있는 관리인을 구하지 못하셨다면 제가 얼마든지 관리인을 대신 맡아 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어차피 곧 황후 폐하께 열쇠를 돌려드리셔야 할 테니까요.”

내가 내세운 시녀가 관례보다 신분도 나이도 부족하다는 걸 빌미 삼는 일은 예상했다.

아마 황후와 사전에 얘기한 게 분명했다.

‘궁인들이나 황실 내 측근이 아직 제대로 채워지지 못한 게 내 약점이긴 하지.’

바로 그걸 찌르고 들어온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직접 받겠다 할 순 없어.’

아마 저쪽이 바라는 내 선택 중 하나가 그걸 테니까.

지금 직접 백금 열쇠를 받아 버리면 내 권위는 추락한다.

황후의 시녀 정도로.

‘역시 만만치 않아, 황후.’

그 짧은 사이에 이걸 계산해서 내 무탈한 권력 접수를 막으려 들다니.

내 시녀 중 가장 신분이 높은 이세핀을 내세워도 비슷한 반응이 돌아올 거다.

‘미혼이라거나, 나이가 어려 맡길 수 없다고 나오겠지.’

황족의 시녀장은 실제로 연배가 꽤 되는 귀부인이 맡는 것이 일반적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아직 나에겐 적절한 시녀장감이 없긴 했다.

지금까지는.

나는 한숨을 길게 쉬었다.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긴 하지.”

황후의 시녀장이 반색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면, 제가 하던 대로 백금 열쇠를 맡아 관리하면…….”

“아니, 그럴 필요 없네.”

나는 손뼉을 쳐서, 옆방에서 대기 중이던 이를 불러들였다.

“내 시녀장을 모셔오게.”

“예, 비 전하.”

애니와 이세핀이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황후의 시녀장은 의아한 표정이었다.

아직 내게 시녀장이 없다는 걸 알고 벌인 일일 테니까.

내가 갑자기 시녀장 운운하자 놀랄 만도 했다.

곁방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서자 그녀는 놀람을 넘어 경악했다.

순간적으로 에피알 백작 부인의 턱관절 건강을 걱정해야 했다.

“아, 아, 악시온 대공비 전하?! 설마……!”

그렇다.

곁방에서 대기하다 애니와 이세핀에게 둘러싸여 들어온 이는, 바로 악시온 대공비 마르티네였다.

그녀는 내 앞으로 다가와 정중하게 무릎을 꿇었다.

“이 마르티네가 비 전하의 부르심을 받고 달려왔나이다.”

“시녀장 역할을 맡아 주어서 정말 고맙네. 임시이긴 하지만, 정말로 받아들여 줄 줄은 몰랐어.”

당연하다.

악시온 대공비는 황족, 게다가 선황후의 모친이었다.

아무리 내가 황태자비라도 본인이 시녀장 역할을 맡는 건 말도 안 된다.

예법상 안 된다는 의미는 아니었지만, 전례가 없다는 것에 가깝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아예 전례가 없는 건 아니지. 역대 황후 중엔 전례가 있어.’

3대 황후가 자신의 여동생이자 같은 황가에 시집온 이를 시녀장에 앉힌 적이 있었다.

임신 중에 황궁 일을 돌보기 어려워 믿을 수 있는 이에게 맡겼던 것이다.

그 전례를 따른다고 하면, 말이 안 되지는 않는다.

나는 그걸 내세웠다.

“3대 전 유레이니아 황후께서 루덴 대공비를 시녀로 삼아 백금 열쇠를 맡기신 적이 있지. 나 역시 그 전례를 따를 생각이야.”

이러면 내 시녀가 자격이 없다는 말로 또 피할 순 없을 터다.

에피알 부인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항의했다.

“하, 하지만… 그건, 황후 폐하께서 시녀장을 선택하실 때의 전례입니다. 황태자비께서 따르시기에는 맞지 않습니다!”

어딜 황후와 맞먹으려 드냐는 말이군.

‘하지만 나는 맞먹을 생각인걸.’

당연히 열쇠도 황후에게 돌려줄 생각이 없었다.

대공비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에피알 부인을 내려다보았다.

“그래. ‘백금 열쇠의 주인’께서 관리인을 지정하신 거였지. 지금과 무엇이 다른가?”

황후든 황태자비든 백금 열쇠의 주인이라는 점은 같다.

나와 대공비는 그걸 주장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대공비 정도의 거물을 내세워 누르지 않는다면, 온갖 핑계를 대서라도 백금 열쇠를 넘기는 걸 미룰 게 뻔했다.

‘이런 일에 시간 낭비할 순 없어.’

그래서 나는 가장 강력한 카드 중 하나를 부른 거다.

악시온 대공비는 내가 바란 대로 행동해 주었다.

황후의 시녀장을 강력하게 압박했다.

“자, 여기에 나이도, 신분도 모자람 없는 비 전하의 시녀장이 왔네. 어서 내주게나.”

“저, 전하! 황족께서 어찌 이렇게 스스로 권위를 떨어뜨리려 하십니까!”

에피알 백작 부인은 거의 최후의 발악 중이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원망도 묻어났다.

‘그래. 악시온 대공비가 황후를 절대 인정하지 않았으니, 저럴 만도 하지.’

그 측근이라면 그동안 황후를 무시하던 대공비가 나에게 납작 엎드리는 게 억울하고 분통도 터질 거다.

“황후 폐하께선 마땅한 제국의 안주인이십니다! 그분께 어찌 이런 모욕을…….”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악시온 대공비가 내 시녀장이 되는 게 어째서 황후 폐하를 모욕하는 일이 되지?”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궁금하군요.”

악시온 대공비는 명백히 황후의 시녀장을 비웃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황후 폐하의 시녀장이 될 일도 없는데 말입니다.”

“말을 함부로 하지 마십시오, 대공비 전하!”

그러자 대공비는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더니 손을 휘둘렀다.

짝―!

에피알 백작 부인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얼굴에 선명한 손자국이 남았다.

치욕과 분노로 얼굴이 붉게 물든 에피알 백작 부인을 차가운 눈으로 노려보던 대공비가 명령했다.

“꿇려라.”

“예, 전하!”

기다렸다는 듯이 주변의 힘센 하녀들이 달려들어 황후의 시녀장을 내 앞에 꿇렸다.

그제야 이 모든 상황이 내가 의도한 것임을 깨닫고 시녀장이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저는 황후 폐하의 대리인입니다. 이렇게 대하시는 건 옳지 않습니다!”

그러자 대공비의 얼음장보다 차가운 목소리가 날카롭게 튀어나왔다.

“황태자비 전하와는 상관없이, 네 개인이 나에게 무례한 것을 응징한 것뿐이야.”

“전하!”

“억울하면 황제 폐하께 가서라도 읍소해 보려무나.”

대공비는 직접 에피알 백작 부인의 허리에 매달린 붉은 허리띠를 풀어냈다.

달을 품은 드래곤의 은빛 자수가 새겨진 길쭉한 함이 장식처럼 매달린 허리띠.

그 함을 열자, 안에는 찬란하게 빛나는 백금 열쇠가 드러났다.

그녀는 그것을 들어 내 앞에 바쳤다.

“비 전하. 백금 열쇠입니다.”

이로써, 황실 내정 관리 권한은 내 손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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