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에반젤린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냐, 그럴 리 없어. 내가 여주인공이 될 운명이 아니라면, 빙의한 이유가 없잖아?’
그녀는 애써 자신을 다독이려 했다.
하지만 옆에서 그걸 전혀 도와주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야, 에바? 네 평판이 땅에 떨어졌다고!”
듣기 싫은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건 이미 매장당하다시피 한 남자였다.
“연회 때 날 도와주겠다고 큰소리쳐서 황후궁에서 계속 기다렸는데. 결국 날 먼저 두고 루스 후작저로 도망쳐서 얼마나 난처했는지 알아?”
당연히 지금 에반젤린의 옆에 있는 건 루드비히였다.
얼마 전 거의 폐인 상태로 루스 후작저로 왔던 그는 이제 제법 멀끔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황위는 몰라도 델핀 공작가는 되찾게 해 주겠다며 에반젤린이 잘 구슬린 덕분이었다.
자신감과 활기를 되찾은 건 그러려니 했는데.
힘이 돌아오자 못된 버릇이 어김없이 튀어나왔다.
‘상황이 안 좋아지면 남 탓하면서 찍어 누르려는 버릇은 변하지 않았네. 원래 약자에게 더 가혹하고, 틈만 보이면 짓밟으려 들었었지.’
그 태도를 자신에게 보일 줄은 몰랐다.
지금까지 루드비히는 늘 힐리아에게만 저랬으니까.
이게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내가 그 정도로 몰락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지독한 굴욕감이 온몸의 피를 식게 했다.
에반젤린이 현실을 인식하고 암담해하는 사이.
그녀의 침묵을 루드비히는 다르게 해석했다.
사실이라 변명할 말이 없어 쭈그러들어 있다고 말이다.
덕분에 루드비히의 기세가 더욱 등등해졌다.
“나한테 그렇게 큰소리를 쳤었잖아? 힐리아 따위 별거 아니라고. 나에게 안겨 줄 수 있다고, 응? 어떻게 된 거야, 에바.”
“…….”
“게다가… 멀리서지만 나도 봤다고. 그날의 힐리아.”
에반젤린이 눈을 들어 루드비히를 올려다보았다.
기억을 떠올리며 황궁 방향을 보는 중인 루드비히는 에반젤린의 살기를 느끼지 못했다.
“정말 아름다웠어.”
용의 일식은 제국 수도 주변에서는 거의 다 볼 수 있었다.
당연히 루드비히 역시 놀라서 달려 나왔다가 힐리아를 목격했다.
루드비히는 자신의 처지나, 황후궁에 비밀리에 숨어 있던 목적도 잠시 잊었다.
눈앞에 있는 힐리아의 압도적인 아름다움에 그저 넋을 잃었을 뿐.
밤하늘을 수놓은 은하수가 그녀를 중심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힐리아의 분홍빛 머리 사이에서 달과 별의 티아라가 찬연히 빛났다.
단순히 티아라의 아름다움만 힐리아에게 걸맞은 게 아니었다.
가치와 의미 역시도 그녀와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그래. 황태자비에 힐리아보다 어울리는 여자는 없어 보였어.’
루드비히는 넋을 잃고 그녀를 뚫어져라 보다가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 그녀를 품속으로 안은 아르파드를 보고 이를 갈아야 했다.
‘또, 또 빼앗겼어!’
진심으로 사랑한 적도 없었으면서 루드비히는 힐라아를 놓친 게 끔찍하게 아쉽고 견디기 힘들었다.
특히나 한번 손에 넣었다가 빼앗긴 보석이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지 깨달은 지금은 더욱더.
그는 이제 이전과는 반대로 두 여자를 비교하기 시작했다.
‘다시 보면 내가 왜 에반젤린에게 눈이 멀었던 건지 모르겠어. 외모도 힐리아가 더 예쁜데 말이지.’
뭔가에 씌워졌던 거라고, 루드비히는 생각했다.
루스 후작가와 델핀 공작가의 가치는 비교도 할 수 없다.
에반젤린이 힐리아보다 나은 건 뒷배에 황후를 두고 있다는 것 하나.
‘그 황후가 지금은 권한을 빼앗기고 연금 중이지.’
힐리아를 음해하려다 실패해서 말이다.
새삼스레 루드비히의 가슴 속에 분노가 치솟았다.
그는 에반젤린을 노려보며 생각했다.
‘이 여자만 아니었으면 힐리아는 지금 내 아내였을 거야. 그러면 드래곤의 축복을 받은 여자를 가진 것도 아르파드가 아니라 나였겠지.’
당연히 황태자 자리 역시 그의 손에 떨어졌을 거다.
루드비히는 에반젤린을 경멸 어린 눈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이번에는 말을 삼가거나 조심하지 않았다.
“넌 이제 사교계의 꽃은커녕 웃음거리야. 다들 널 비웃고 있다고. 애초에 네가 날 유혹하지만 않았어도……!”
에반젤린은 참지 않고 맞받아쳤다.
“왜? 그랬으면 지금 힐리아 그 여자가 네 품에 있을 것 같아?”
“당연하잖아! 그 여잔 내 약혼녀였어! 내 여자였다고!”
“그래도 어차피 결혼식 날 황태자에게 빼앗겼겠지.”
“…!”
루드비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일침을 놓은 에반젤린도 그다지 통쾌하거나 기쁘지 않았다.
자기가 한 말에 타격받았기 때문이다.
‘그래. 나나 루드비히가 무슨 짓을 했어도, 아르파드가 힐리아를 약탈혼 하는 건 못 막았을 거야.’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두 사람이 맺어지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잠시 멈칫하던 루드비히는 곧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건 전부 그 기사 놈 탓이야!!”
“기사?”
“그래! 벨 뭐인가 하는 델핀가의 기사 놈! 그놈이 얼마나 건방진 놈이었는데!”
“…벨테인 경?”
“그래, 그놈!”
루드비히의 말을 듣자 에반젤린은 기억났다.
델핀저의 가신과 고용인들 대부분은 그녀가 쥐락펴락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통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바로 벨테인 경이었다.
‘그래. 기억나. 그러고 보니… 그 남자, 아르타누스 홀을 지키고 있었지.’
에반젤린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그 기사, 황궁에 들어가 있던데?”
“그래! 힐리아가 득달같이 달려와 데려갔지.”
에반젤린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직접 와서 데려갔다고?”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루드비히의 화풀이는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그 자식! 눈빛부터가 글러 먹었어! 늘 힐리아를 기분 나쁘게 보고 있었단 말이야!”
에반젤린의 머릿속에 번개가 내려친 듯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다.
‘그래!’
아르타누스 홀의 연회에서 힐리아와 아르파드는 다정하고 애정이 넘치는 부부로 보였다.
에반젤린의 가슴을 새카맣게 태워 버릴 정도로.
‘…하지만, 미래는 누구도 모르는 거지.’
루드비히만을 이용하려던 원래 계획에 에반젤린은 한 가지 수단을 더 추가했다.
* * *
내 명령은 즉각 시행되었다.
황후궁 측의 저항에 부딪힐 수도 있어 이세핀과 애니를 비롯한 시녀들을 보내면서 한 가지 명령을 추가했다.
“황후궁으로 바로 가지 말고, 본궁으로 가 시종장에게 도움을 구해.”
시종장 본인, 혹은 황제의 다른 측근을 데리고 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단순히 나와 황후의 기 싸움이 아니라, 황제까지 낀 싸움이 되는 거다.
이미 황후는 황제에게 한 번 밀려난 상황이다.
또 무리할 순 없을 거다.
그리고 내 예측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황후궁의 시녀장 에피알 백작 부인이 내 앞에 끌려온 것이다.
물론 정말로 묶여서 질질 끌려온 건 아니고, 얌전히 걸어오긴 했지만.
아마 시녀장을 내준 황후 심정이나, 시녀장 본인의 기분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다.
나는 다리를 모로 꼬며 잔뜩 굳은 얼굴의 에피알 백작 부인에게 차가운 태도를 보였다.
시녀장이 응접실로 들어선 직후 내 위치가 얼마나 바뀌었는지 새삼 실감하게 되었다.
나나 궁인들이 뭐라 하지도 않았는데, 시녀장이 알아서 나에게 예를 표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깊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
다른 이도 아니고 황후의 시녀장이다.
내가 연회에서 황후를 꺾지 않았다면 절대 먼저 고개를 숙이진 않았을 거다.
나는 미약한 감동을 숨기면서 평온하게 말문을 열었다.
“내가 그대를 왜 불렀는지 알겠나?”
“…모르겠습니다.”
단답형 어조는 당연히 딱딱했다. 절대 나에게 쉽게 굴복하지 않겠다는 듯.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우선, 황후 폐하께서는 강녕하신지 걱정되어 불렀네.”
“…!”
“황제 폐하의 명이 있어 직접 가 볼 수 없으니 말이야.”
연회에서 그 망신을 당하고, 내궁 관리권까지 빼앗긴 황후가 당연히 심기가 편할 리 없다.
이 상황에 내가 황후의 안부를 묻는 건 한가지로밖에 해석이 안 된다.
‘너희 주인 속이 말이 아니지? 다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