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힐리아가 정신을 차리지 못한 닷새 동안 황궁과 수도 사교계의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었다.
에반젤린과 빌헬름이 사전에 짜고 연회 당일에 수도 내의 크고 작은 살롱에 소식지 <에스피톨라>를 돌린 상태였음에도 그랬다.
당연히 거기에는 날조된 기사 두 개가 실려 있었다.
힐리아가 에반젤린의 드레스를 따라 입었다가 망신당했다는 것.
그리고 연회를 위해 힐리아가 사들인 엄청난 식자재와 사치품들이 그대로 버려졌다는 것.
두 기사에는 심혈을 기울여 그려진 풍자 삽화가 포함되어 있었다.
최대한 힐리아를 희화하고 비판하면서, 에반젤린을 떠받드는 내용.
올해 들어 에스피톨라가 발간한 소식지 중 가장 화려한 그림과 글이었다.
하지만 에반젤린과 빌헬름의 예상과 달리 <에스피톨라>의 기사는 큰 화제가 되지 못했다.
힐리아가 사전에 준비해 둔 대응책들이 차근차근 실행된 덕분이었다.
연회 시작과 동시에 수도 곳곳에서는 황태자궁의 이름으로 빈민가와 평민들에게 고기와 술, 흰 빵이 나누어졌다.
이걸 나눠 주는 이들은 열심히 홍보하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래?”
“비 전하가 황태자 전하와의 결혼식 피로연을 진행하면서 은혜를 내리셨답니다.”
“우, 우리도 받아도 되나요?”
“당연하죠. 황태자비께서 누구든 상관없이 골고루 나눠 주라 명하셨어요.”
“이렇게 감사할 때가……!”
빈민가의 아이들마저 황태자궁에서 나눠 준 달콤한 과자를 먹고 있었다.
그걸 옆에서 보고 있는데 <에스피톨라>가 날조한 사실이 먹힐 리 없었다.
에반젤린이 사전에 준비한 바람잡이들이 애를 썼지만 소용없었다
“그 말 들었어? 황태자비가 죽어 가는 거지에게 케이크를 먹으라고 했다던…….”
“에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저기 보여? 거지가 먹고 있는 흰 빵. 황태자궁에서 나눠 준 거라고.”
“맞아요. 말도 안 돼요! 우리 황태자비 전하 욕하지 마세요!”
사탕을 빨던 아이들까지 바람잡이를 욕했다.
아이들은 오랜만에 맛보는 단맛에 완전히 황태자비의 편이 되어 있었다.
이 소식은 수도를 중심으로 빠르게 제국 전체로 퍼졌다.
거기에 날개를 단 것은 당연히 연회 당일 목격한 현상이었다.
용의 일식.
그 장엄하고 신성한 기적을 본 이들은 자연스럽게 드래곤에 대한 경외감을 새 황태자비와 연관시켰다.
“우리 비 전하는 드래곤의 선택을 받으신 분이야!”
“맞아! 위대한 아르타누스께서 제국에 내리신 축복이라고!”
“와아아!”
아르타누스의 이름을 업고 힐리아의 권위는 끝을 모르고 치솟았다.
게다가 연회에서 황후와 에반젤린이 황태자비에게 누명을 씌우려다 실패했다.
황제가 분노하여 황후를 연금하고, 내궁에 대한 관리 권한을 황태자비에게 내리자 멋모르는 이들도 권력의 이동을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이런 움직임에 가장 민감한 이들은 역시 궁정 귀족들이었다.
힐리아가 황태자궁에 들어온 이후 필레른 부인을 제외하면 어떤 알현 요청이나 초대가 없었다.
사실 이례적인 일이다.
갓 혼인하여 황태자궁에 들어온 비는 온갖 알현 요청에 시달려야 정상이니까.
힐리아가 진짜 황태자비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연회 전 이야기지.’
연회 전후로 힐리아의 위상은 180도 달라져 있었다.
* * *
나는 시녀들이 트롤리 위에 산처럼 쌓아서 가져온 편지 봉투들을 보며 아연하게 물었다.
“이게… 전부 다 알현 요청서라고?”
“예, 전하.”
편지의 산은 거의 천장에 닿을 정도로 높았다.
저걸 쓰러뜨리지 않고 여기까지 가져온 것만으로도 서커스 같았다.
그런데 애니의 대답이 더 놀라웠다.
“비 전하께서 굳이 확인하실 필요 없는 것들은 전부 걸러 낸 상태입니다.”
“그런데도 이래?”
그야말로 대단한 태세 전환이었다.
아르타누스 홀의 연회 때 귀족들의 박쥐 짓을 보며 예상했지만, 그 이상이었다.
눈 밑에 그늘이 진 이세핀이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
“닷새간 쌓인 선물이 방 세 개를 채울 지경이랍니다. 전하께서 어찌할지 결정해 주실 때까지 그냥 놔둘 수밖에 없었지요.”
그래서 그런지, 시녀와 하녀들은 피로해 보였다.
하지만 다들 어깨가 으쓱거리고, 눈빛은 반짝반짝했다.
아랫사람들은 주인이 얼마나 인정받느냐에 따라 처지가 달라진다.
그동안 내가 푸대접받는 걸 보고 자기들도 얼마나 억울해하고 화를 냈겠는가.
내 처지가 달라진 걸 가장 먼저 느끼고 뿌듯해할 법했다.
내 기분도 당연히 싫진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썩 좋지도 않았다.
높이 쌓여 흔들거리는 알현 요청서와 방 세 개가 터지고 있다는 선물 공세 따윈 알 바 아니었으니까.
‘어차피 저들은 전부 쭉정이들이야.’
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알랑거리려는 자들은 남의 권위와 힘에 기대야 하는 하찮은 이들이다.
내게 필요한 건 그런 자들이 아니다.
‘그보다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이 있어.’
나는 시녀들에게 물었다.
“황후궁의 시녀장은 어디 있지?”
그러자 시녀들의 표정이 굳었다.
“황후궁에서 황후 폐하와 함께 두문불출 중입니다.”
나는 차갑게 중얼거렸다.
“연회 때 이미 황제 폐하께서 명령하셨거늘. 그간 단 한 번도 황태자궁에 먼저 오지 않았나?”
“예.”
애니의 눈빛이 이글거렸다.
내가 황후의 시녀장을 찾는 이유는 간단했다.
‘내정에 대한 권한을 상징하는 백금 열쇠를 관리하는 사람이 시녀장이니까.’
내가 황후를 대신해 황궁의 내정을 맡았다.
그렇다면 당연히 백금 열쇠 역시 넘어와야 했다.
황후나 그 시녀장이 알아서 내정의 상징을 맡기러 올 리 없다.
“닷새나 기다려 줬는데, 안 되겠군.”
사실은 기다려 준 게 아니라, 내가 기절해 있었던 거지만.
그냥 그런 거로 하자.
모두가 내가 시녀장을 기다려 준 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대외적으로 내가 닷새간 두문불출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내가 밀월을 즐기길 바라서 그대를 안 놔준 거야. 알겠나?”
“뭐라고요? 미쳤어요?!”
그때 나는 목으로 넘기던 약을 뱉을 뻔했다.
아르파드는 아주 태연했다.
“막 피로연을 치르고 인정받은 황태자비의 건강에 문제가 있다고 알려지는 것보다는, 내가 그대에게 미쳐 있다는 소문이 나는 게 낫지 않나?”
“아니, 그거야… 그렇긴 하지만……!”
내 사회적 체면은 어떻게 되는 걸까.
하지만 곧 기억났다.
필레른 부인을 내쫓을 때라던가, 시도 때도 없이 아르파드와의 금슬을 자랑한 내 과거가.
덕분에 의심하거나 위화감을 느끼는 이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걸 다행이라고 기뻐해야 하는 건지, 슬퍼해야 하는 건지…….’
그래, 지금은 민망해하거나 헷갈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행동할 때지.
닷새 동안 명분은 갖추어졌다.
황제의 명령이 있었는데 백금 열쇠를 먼저 넘겨주지 않는 건 황명에 대한 항명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나는 시녀들에게 명령했다.
“가서, 황후궁의 시녀장을 끌고 오도록.”
시녀들이 입을 모아 힘차게 대답했다.
“예, 비 전하!”
* * *
아르타누스 홀의 연회로부터 닷새째.
그동안 에반제린은 루스 후작저에서 두문불출했다.
이미 그녀가 어떤 꼴을 당했는지는 사방에 다 소문이 나 있었다.
그때 이후로 에반젤린은 거의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젠장! 다들 날 비웃을 거야!’
사교계의 꽃으로 군림한 기간이 긴 만큼, 에반젤린은 몰락을 견딜 수 없었다.
밖에 나가는 것이 두려웠다.
‘어째서? 어째서지? 내가 진짜 여주인공이 되어야 하는데?’
처음으로 이런 의문이 들었다.
‘사실 나는… 이 세상의 여주인공이 아닌 걸까?’
끔찍할 정도로 무서운 의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