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아르파드가 벨테인 경을 따로 불렀다고?
내가 좀 의아해하자, 애니가 안심시키려는 듯이 말했다.
“비 전하의 경호 문제에 대해 논의할 게 있다고 부르셨대요.”
평소라면 걱정부터 했을 거다.
이 인간이 또 뭐가 수틀려서 벨테인 경을 괴롭히려는 게 아닌가 하고 말이다.
하지만 어제 아르파드의 상처받은 표정이 생각나 의심하기가 미안했다.
조금 불안하긴 하지만…….
‘주변 보는 눈이 있기도 하고, 아르파드가 설마 벨테인 경을 잡아먹기야 하겠어.’
나는 그렇게 마음 편하게 생각하려 애쓰며, 수프와 약을 모조리 해치웠다.
* * *
결론부터 말하자면, 힐리아가 아르파드의 인성을 믿어 보기로 한 건 배신당했다.
집무실로 온 벨테인 경을 칼날 같은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으니까.
불려 온 이후 내내 이 상황이다.
“…….”
벨테인 경은 세 번째로 다시 질문했다.
“어쩐 일로 저를 찾으셨습니까, 황태자 전하.”
“…….”
하지만 여전히 아르파드의 붉은 눈은 이글거리며 벨테인 경을 노려보기만 할 뿐이다.
일반인이라면 두려움에 덜덜 떨며 바닥에 엎어졌을 기세지만.
벨테인 경은 델핀 공작가 내에서 가장 강한 기사였다.
황태자궁에 소속된 황실 기사단의 기사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실력이다.
긴장되고 불편하긴 하지만, 아르파드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만으로 공포심을 느낄 수준은 절대 아니었다.
그 때문에 벨테인 경은 용기를 갖고 마지막 통보에 가까운 말을 했다.
“저에게 따로 명하시거나 하문할 일이 없으시면 이만 돌아가 봐도 되겠습니까.”
벨테인 경을 부른 이후 아르파드의 입에서 처음으로 말이 나왔다.
“힐리아의 옆을 지켜야 하니까?”
“…?”
내용은 특별할 것 없었으나, 말투가 아주 이상했다.
단어 하나하나에 분노와 살의, 그리고 질투심이 서리서리 맺혀 있는 것 같았다.
벨테인 경은 흠칫 놀랐다.
‘질투심? 그럴 리가.’
그는 아르파드와 힐리아를 금실 좋은 부부로 알고 있었다.
굳이 한낱 기사인 자신에게 질투할 이유는 없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벨테인 경은 가슴께를 미세한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약한 통증을 느꼈다.
동시에 떠올랐다.
힐리아가 아르파드에게 약탈혼 당할 때 내지른 비명과.
그 뒤에 황태자궁에서 민망할 정도로 아르파드에 대한 애정을 감추지 않던 힐리아를 봤을 때의 감정을.
분명 그때 그는 안심해야 했다.
주인이 불행하지 않고 행복하다니 기뻐해야 맞지 않는가.
그런데, 그럼에도… 꽃처럼 웃는 힐리아를 바라보며 벨테인 경은 부정할 수 없는 씁쓸함을 곱씹어야 했다.
이게 정확히 어떤 감정인지, 원칙주의자인 남자는 알지 못했다.
이 딱딱한 남자는 힐리아의 애정을 독차지한 아르파드가 일개 기사인 자를 질투할 리 없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하지만 실상이 어떤가 하면…….
아르파드는 태어나 처음 경험하는 맹렬한 질투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어젯밤 잠든 힐리아가 눈물을 흘리며 벨테인 경의 이름을 입에 담았을 때.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 버렸다.
“벨테인 경…….”
그 한마디 잠꼬대로 끝났더라도 속이 뒤틀렸을 거다.
그런데 그 한마디로 끝이 아니었다.
“…죽으면 안 돼요, 벨테인 경… 내가 지켜 줘야… 어떡해…….”
힐리아는 매우 서럽게 울었다.
그 눈물을 닦아 주면서 아르파드는 머릿속이 얼얼할 정도의 충동에 밤새 시달려야 했다.
‘죽일까?’
그리고 갈등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었다.
‘역시 죽일까? 실수나 사고를 가장하는 방법은 많아.’
하지만 아르파드는 차마 그 강렬한 욕구를 실행하지 못했다.
내내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가 벨테인 경을 불러와 앞에 두고도, 죽이거나 화내지 못했다.
목구멍까지 끓어올라 있는 이 질문을 입 밖에 내지도 못했다.
‘힐리아와 정확히 무슨 관계지?’
이전까지 힐리아에게 벨테인 경을 ‘애인’이라 칭한 건 반은 농담이었다.
처음에는 오해했었지만, 힐리아가 강렬하게 부정할 때 그게 사실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나중에 힐리아에 대한 뒷조사를 했을 때도, 벨테인 경과의 염문이 없었다는 걸 몰래 확인하고 안도하기도 했다.
‘약혼자 일편단심이었군.’
물론 이 사실도 불쾌하긴 했다.
과거에 어쨌든 지금 힐리아는 루드비히를 질색했다.
더러운 벌레나 시궁쥐보다 더 싫어한다는 게 맞았다.
하지만 벨테인 경은 다르다.
황궁으로 들어오기 전에 안전을 확인하려 했고.
오자마자 그부터 구하러 달려갔다. (이때 애니의 안부도 함께 확인했다는 건 이미 아르파드의 머릿속에 없었다.)
게다가 이놈은 그녀에게 기사의 맹세까지 바쳤다.
하나하나가 전부 거슬리고 속이 뒤틀렸다.
아르파드는 지금 자신의 상태가 너무 이상했다.
‘내가 왜 이러지?’
이렇게 망설이는 건 어울리지 않았다.
벨테인 경을 불러왔으면 대답을 들은 다음…….
베어 버리면 그만이다.
그게 자신다웠다.
하지만.
‘…못하겠다.’
당연히 벨테인 경에게 정이 생겼다거나, 죽이기 아깝다는 생각 같은 건 전혀 없었다.
걱정되는 건 하나였다.
‘이놈을 죽이면, 틀림없이 울겠지.’
병이나 사고로 죽어도 슬퍼하며 울 게 분명했다.
그 모습을 볼 자신이 없었다.
어제 잠결에 펑펑 우는 걸 보고도 불안해서 미칠 지경이었는데…….
이제 겨우 조금은 부드러운 미소를 보여 주고, 다정한 눈빛을 하게 되었다.
자신이 그런 짓을 하면 봄날에 녹은 샘물 같던 눈빛은 한겨울의 빙하처럼 얼어 버릴 거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힐리아의 잠꼬대에서 벨테인 경의 이름이 나온 걸 무시할 수도 없었다.
시도 때도 없이 생각날 게 분명했으니까.
물어서 확인하지 못하겠는 건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 몰라서였다.
만에 하나라도 연인이나 정부라는 대답이 돌아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아르파드의 머릿속은 생애 처음으로 경험하는 감정이 미친 듯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결국 본인답지 못한 결론을 낸 아르파드는 딱 한 마디를 내던졌다.
“…힐리아의 남편은 나다.”
“…?”
벨테인 경은 의아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 지요.”
당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대답하면서도 벨테인 경은 ‘힐리아의 남편’이라는 단어가 왜 이렇게 귀에 박히듯 들리는 건지 알지 못했다.
자신이 왜 우울해지는 기분인 건지도.
반면에 아르파드는 조금 표정이 풀렸다.
“알았으니 이만 돌아가 보도록.”
“…? 명에 따르겠습니다.”
아르파드가 벨테인 경을 불러들인 지 1시간 30분 만의 일이었다.
그리고 황태자의 비서관이라는 이유로, 1시간 30분 내내 두 남자의 어색하고 껄끄러운 대치를 지켜봐야 했던 율켄은 더없이 고욕이었다.
침묵과 침묵이 창과 방패처럼 오가는 와중에, 홀로 외치고 싶은 걸 참아야 했다.
‘말로 하라고! 왜 말을 못 해! 너는 내 아내를 연모하고 있느냐, 그렇게 물으면 되잖아! 그러면 저쪽은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하면 될걸!’
제3자 눈에는 아주 잘 보였지만, 자신의 감정에 서투르다는 점만 비슷한 두 남자는 몰랐다.
그래서 율켄의 속만 홀로 터져 가는 중이었다.
아르파드가 처음으로 한 말이라는 게 ‘힐리아의 남편은 나다’였다.
답답해서 찬물을 마시고 있던 율켄은 뿜을 뻔했다.
저 한마디 하고, 미미하지만 분명하게 뿌듯해하는 아르파드가 어이없었다.
시무룩해진 벨테인 경은 더더욱 어이가 없었다.
벨테인 경과 함께 물러난 뒤.
율켄은 대기실로 나가 소파를 팡팡 치며 소리 없이 미친 듯이 웃었다.
“푸흐흡! 크흡!”
어쩌면 좋은가. 우리 죄 많으신 비 전하.
아까 속 터져 죽겠다고 한 생각을 바로 부정했다.
‘꿀잼!’
고생하는 비서관을 위해 이토록 흥미진진한 구도를 만들어 주시다니. 역시 황태자비께선 최고였다.
물론, 100만 카스텔은 뼈아프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