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
여전히 정신을 제대로 차리기 힘들었다.
너무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 이해가 조금 힘들었다.
‘아르파드가 날 걱정했다고?’
여전히 믿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내가 그걸 알아주지 않았다고 상처받은 것 같은데…….’
이게 말이 되는 건가?
사람이 너무 놀라면 머리가 제대로 안 돌아가는 모양이다.
아니면 5일이나 뻗어 있느라 뭘 제대로 먹지 못해서 잘 안 돌아가는 걸지도.
그때였다.
은제 스푼이 내 앞에 들이밀어졌다.
“아.”
희고 길쭉하니 남성적이면서도 예쁜, 하지만 상처가 많은 손에 묽은 수프를 뜬 스푼이 들려 있었다.
그러니까 아르파드가 수프 접시를 가져와 내게 먹여 주고 있는 거다.
물론, 아르파드가 나에게 음식을 먹여 준 건 처음이 아니었다.
‘황제랑 황후 앞에서 닭살 짓 하느라 서로 음식을 먹여 줬지.’
그리고… 스푼 하나로 디저트를 같이 나눠 먹기도 했다.
나중에 깨닫고 기함했지만.
나도 손이 있으니 내 손으로 먹겠다, 고 하고 싶은데.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이 인간 얼마나 단단하게 말아 놓은 거야! 왜 이렇게 안 풀려!’
다시 낑낑대 봐도 소용없었다.
몸에는 힘이 없고, 어떻게 말아 놓은 건지 이불은 지나치게 튼튼했으며.
그리고 배는 텅 비어서 꼬르륵거리고 있었다.
‘게다가 수프 냄새는 왜 이렇게 좋은데!’
꼬르륵.
다시 한번 텅 빈 배가 나에게 화를 냈고.
결국 나는 욕망에 질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아르파드의 손은 미세한 흔들림도 없이 굳건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결국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아.”
그러자 내가 깨어난 이후 아르파드가 처음으로 웃었다.
자주 보던 꿍꿍이 넘치는 미소라던가, 살벌한 웃음과 아주 달랐다.
소년처럼 보이는 순수한 미소.
“착하군.”
그 미소에 얼렁뚱땅 밀려서, 나는 수프를 다 비울 때까지 아르파드가 주는 대로 받아먹었다.
* * *
아르파드가 날 이불 도롱이에서 해방해 준 건 꼬박 하루가 지나서였다.
사실 나는 탈출 시도를 계속했다.
하지만 모두 처참하게 실패했다.
“저기, 황태자 전하? 아르파드 씨? 이제 좀 풀어 주시죠?”
“나 해야 할 일 많아요. 이렇게 시간 낭비하고 있을 수 없다고요!”
그는 나에게 수프와 약을 먹이고, 얼굴을 닦아 준 다음.
부드러운 침대보와 이불로 갈아 준 이후 거기에 다시 말아서 눕히고 재웠다.
“지금은 생각하지 말고 자.”
“아니, 당신도 알잖아요!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 순간인데. 내가 뭐 하나 실수하면 황후가 다시 내궁 관리권 빼앗아 갈지도 모른다고요!”
“그럴 일 없어.”
“그걸 어떻게 확신해요?”
“내가 못 하게 할 테니까. 내 능력 못 믿나?”
“…….”
“그러니까 그대는 회복하는 데에만 전념해.”
그렇게 말하고는 아르파드는 나를 눕힌 채, 이불 위를 토닥거리기 시작했다.
“고민이나 걱정하지 말고, 자. 나에게 맡기고.”
저항하려고 했다. 의지는 분명히 그랬다.
하지만 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눈꺼풀이 너무 무거웠다.
“지금 자면… 안 되는데…….”
“된다니까. 날 믿고 자.”
쉬이, 하는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닷새 동안 열에 시달렸다는 몸은 더는 저항하지 못하고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지난 닷새간과는 달리, 아주 달콤한 잠이었다.
* * *
아르파드는 율켄이 가져온 서류들을 힐리아의 침대 맡에서 처리했다.
물론 힐리아가 그 모르게 꾸민 일들까지는 어쩔 수 없었지만.
적어도 황도 사교계의 동향 확인과 이에 대한 대응 등은 충분히 가능했다.
침실 앞까지 서류를 가져온 율켄은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비 전하께서는 어떠신 겁니까? 괜찮으신 겁니까?”
아르파드는 10년 동안 율켄을 지켜봐 왔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황태자인 자신의 안위를 걱정해 저렇게 불안해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기대하지도 않았다. 실망하지도 않았고.
그저 혀를 찬 뒤, 쾅! 하고 문을 닫았을 뿐이다.
닫힌 문 뒤에서 율켄이 비명을 질렀다.
“우리 비 전하 잘 보살피셔야 합니다! 황태자 전하 한 명의 일손으로는 부족하지 않습니까! 제대로 간호하셔야 한단 말입니다!”
희귀한 일이라는 것만은 도저히 부정할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이상한 여자였다.
‘겨우 한 달 황태자궁에 있었을 뿐인데, 궁의 모두를 홀려 버렸군.’
진짜 무슨 마법이라도 쓰는 건지 모르겠다.
아르파드는 한숨을 흘리며, 깊이 잠든 힐리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서류 정리를 계속했다.
그래도 열이 펄펄 끓던 때보다는 많이 편한 얼굴로 잠들어 있어서 다행이다.
지난 닷새간 온몸에 열이 끓고, 내내 악몽에 시달렸으니까.
아르파드는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깊이 잠든 힐리아의 뺨을 매만졌다.
미열이 남아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열은 없었다.
하지만.
겨우 평온한 얼굴로 잠들었던 힐리아의 눈가에 눈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한번 맺힌 이슬이 주변의 습기를 먹어 더욱 굵고 투명해지는 것처럼 힐리아의 뺨은 곧 깊이 젖어 들었다.
타인의 눈물은 물론, 피도 많이 보아 온 아르파드였다.
하지만 남의 눈물을 보고 안타깝다는 감상을 느끼긴 처음이었다.
‘어쩐지 처음 느껴 보는 감상과 감정들이 너무 많군.’
그 모든 것이 전부 이 여자를 통해서라는 게 이상하고, 낯설었다.
가장 기이한 건 이 이질감이 기분 나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거였다.
길게 한숨을 쉬며 힐리아의 뺨을 적신 눈물을 훔쳤다.
눈물방울이 손끝에 투명한 보석처럼 맺혔다.
잠시 그걸 바라보던 아르파드는 충동적으로 눈물을 핥았다.
혀끝에 닿는 투명한 액체가 달콤하지 않아서 이상했다.
타인의 눈물이 달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인데.
‘이 여자는 눈물도 피도 전부 달콤할 것 같아.’
피부는 마시멜로 같았고, 머리카락은 분홍빛 솜사탕 같았다.
그리고 눈동자는 제비꽃 사탕을 닮았다.
그 어딜 핥더라도 혀끝에서 달콤하게 녹아내릴 것처럼 생긴 여자였다.
하지만 그녀의 눈물에서는 슬픔을 닮은 짠맛이 났다.
이유 모를 안타까움과 걱정, 그리고… 갈증을 느끼던 중이었다.
힐리아의 분홍빛 입술이 열리고,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벨테인 경…….”
“…….”
아르파드는 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 * *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나는 몸이 아주 가뿐한 걸 느꼈다.
“으그윽―!”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자, 반가운 목소리로 애니가 나를 맞아 주었다.
“일어나셨군요, 비 전하! 몸은 괜찮으신가요?”
“으응. 훨씬 나아. 좀… 기운이 없긴 한데.”
비몽사몽인 내 눈에 머리맡에 있는 서류 더미가 보였다.
가장 위에 놓인 종이부터 읽어 보니 연회 이후 수도 사교계의 동향에 대해 정리한 서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깔끔한 상황 분석은 물론, 그에 대한 대응책도 완벽했다.
자세한 지시 사항을 적은 글씨체와 서명은 내가 아는 것이었다.
‘아르파드가 해 놨어?’
너무 완벽해서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꼭 내가 하려던 대로 해 놨네.’
다행이었다. 어제 일어나자마자 걱정한 것과 달리, 내 부재가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일이 잘되어 있었다.
새삼 대단해하고 있는데, 옆에서 애니가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제발 일어나자마자 일하진 마세요. 또 쓰러지실까 걱정이에요.”
나는 서류를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알았어. 미안.”
“아니에요. 하지만 앞으로 절대 또 그렇게 무리하시면 안 돼요.”
애니가 걱정하게 만든 게 미안해서 저절로 사과가 나왔다.
그제야 내가 어제 아르파드에게 한 말이 떠올랐다.
“그대는 나도 붉은 피가 흐르는 사람이라는 걸 잊어버린 모양이야.”
좀 늦었지만, 이런 생각이 들었다.
“…….”
혹시 내가 걱정시켜서 미안하다고 했으면, 아르파드는 화를 안 내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렇게 상처받은 표정은 안 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애니가 가져다준 어제보다 진해진 수프와 약을 먹으며 물었다.
“아르파드는?”
그러자 의외의 대답이 들려왔다.
“벨테인 경을 부르셔서 대화 중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