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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혼으로 남편부터 바꾸겠습니다-83화 (83/210)

83화

아르파드는 살짝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그리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다시 물었다.

“뭐라고, 했지?”

나는 다시 한번 사과를 반복했다.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미안해요. 닷새나 뻗을 줄은 몰랐어요. 그래도 걱정하지 말아요. 일은 차질 없이 진행할 거니까.”

이 정도면 아르파드도 만족할 거라 생각했다.

아무리 피도 눈물도 없는 미친 황태자라지만, 그래도 협력자인 나를 좀 걱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으니.

닷새나 앓았다고 하고.

이 정도는 넘어가 주지 않을까 했다.

그런데 아르파드의 다시 이어진 질문은 예상외의 것이었다.

“내가 우리 일에 차질이 생길 걸 걱정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에요?”

우리는 약탈혼 계약으로 묶인 관계다.

당연히 그도 나도 서로에게 이익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나를 그렇게 생각해서, 앓다가 깨어나자마자 그 말부터 하는 거고.”

어쩐지… 기묘한 위화감과 불안감이 살살 올라왔다.

뭐랄까.

위험한 빨간 버튼을 밟아 버린 느낌?

‘근데 내가 한 말 어디가 문제인 거지?’

계약 관계인 동업자에게 내 개인 사정으로 일정에 차질이 생겨서 미안하다고 사과했고.

더는 문제가 없게 하겠다고 안심시키기까지 하지 않았나?

‘뭘 더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내가 눈 못 뜬 닷새 동안 심각한 일이라도 벌어졌나?

하지만 그런 일이 있었으면 설명부터 해야 하지 않나?

조금 화가 나고 억울해지려 했다.

아르파드는 어쩐지 너무나도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혼자 망연하게 중얼거렸다.

“그래서 악몽을 꾸면서… 나를…….”

“무슨 소리예요? 당신, 악몽 꿨어요?”

그러자 아르파드의 표정이 더 기묘해졌다.

나는 조심스레 그를 불렀다.

“아르파드?”

어쩐지 좀 넋을 놓고 있는 것처럼 보이던 남자가 이상할 정도로 화들짝 놀란다.

그리고 여전히 의아할 정도로 물렁물렁한 목소리로 즉각 대답했다.

“그래, 힐리아.”

이상하고 수상쩍은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내가 일을 잘 처리하는 걸 보면 이 인간도 심술부리지 않겠지.’

나는 낑낑거리며 몸을 일으키려 애썼다.

아르파드는 센스 있게 내 어깨를 잡아 부축해 주었다.

“왜 그러지?”

“이익! 몸에, 힘이… 안 들어가!”

“이미 말하지 않았나. 당신은 닷새 동안 의식이 없었다고. 열도 높았어.”

나는 조금 의아해했다.

‘왜 이렇게 고분고분하고 착하게 말하지? 평소라면 한 다섯 번쯤 비비 꼬인 말을 했을 텐데.’

내가 기절한 동안 벌어진 손해를 줄줄 늘어놓는다거나.

그걸 막아 주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생색내거나.

일단 지금 상황을 파악하는 게 먼저였다.

“내가 기절한 동안 황궁 내부, 수도 사교계와 평민들 여론, 그리고 서부 쪽 상황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설명해 줄래요?”

그러자 매우 이상했던 아르파드의 표정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마침내 내가 잘 아는 아르파드의 어조가 들려왔다.

“지금 내가 한 말 제대로 이해한 건가?”

“…네. 그러니까 바로 상황 파악을 하고 밀린 일을 처리해야…….”

아르파드는 버럭 화를 내며, 나를 침대 위로 눌렀다.

“환자면 좀 환자답게 굴 수 없나!!”

“!”

매가리 하나도 없는 내 몸은 푹신푹신한 침대에 다시 폭 감싸였다.

그리고 내 몸 위로 아르파드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 * *

답지 않게 감정적으로 나간 후에야 아르파드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나야말로 지금 환자에게 무슨 짓인 건가.’

그리고 새삼스레 놀랐다.

후회라니. 아르파드 이스트리드에게 이것처럼 안 어울리는 짓도 없는데.

최근 들어 이 낯선 감정을 너무 자주 느끼고 있었다.

매번 그 원인은 같았다.

지금 아르파드의 아래 누워 있는 여자.

흰 침대보 위로 흐트러진 분홍빛 머리카락이 꼭 바닥을 덮은 벚꽃잎 같았다.

상상임에도 향기가 코끝을 스치는 듯했다.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상념이었다.

“…….”

“…….”

힐리아는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어색한 침묵이 둘 사이에서 오고 가다가, 마침내 힐리아가 입술을 벌리며 끝났다.

“…무거워요.”

“아.”

그제야 아르파드는 자신이 힐리아를 침대에 누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조금 전 본인이 화를 내며 선언한 환자를 말이다.

그는 어색해하며 힐리아를 놔주고 옆으로 옮겨 앉았다.

여전히 같은 침대 위였으나, 조금 전처럼 팔다리가 서로 얽히고설킬 정도로 가깝지는 않았다.

그제야 아르파드는 힐리아의 침의가 말려 올라가 가는 다리가 드러난 걸 깨달았다.

생각이 구체화하기도 전에 손이 먼저 움직였다.

치마를 끌어 내려주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아니, 이걸로는 부족하게 느껴졌다.

‘너무 무방비해!’

안 그래도 환자인데 말이다.

그래서 그는 힐리아를 이불로 돌돌 말아 놓았다.

“?”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고, 이리저리 흔들리느라 어지러워서 힐리아는 뒤늦게 항의했다.

“가, 갑자기 뭐예요?”

‘왜 사람을 김밥으로 만들어?!’

어째선지 모르겠지만, 아르파드는 힐리아를 이불 김밥으로 말아 놓고 만족스러워 보였다.

“말했잖아. 열이 높았다고.”

“그럼 이렇게 둘둘 싸 놓으면 안 되죠! 풀어 줘요!”

“지금은 열이 내렸고, 몸이 약해져 있으니 꽁꽁 감싸는 게 맞아.”

힐리아는 이불로 감싸인 도롱이에서 벗어나기 위해 꿈틀거렸다.

하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오래 앓느라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풀어 달라고요!”

“안 돼.”

아르파드는 단호했다.

그러자 힐리아는 결국 참지 못하고 화를 냈다.

“아니, 아까부터 왜 이래요?! 대체 뭐가 화가 나서 심술인 건데요?”

아르파드는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

어떤 감정도 섞이지 않은 담백한 어조였다.

“그대는 날 그렇게 생각하나?”

“네? 뭘요?”

“아픈 사람을 앞에 두고 화가 나서 심술부리는 인간.”

“어, 그렇긴… 하죠?”

솔직히 입이 비뚤어져도 아니라고는 절대 못 하겠다.

힐리아에게 아르파드는 황태자였고.

늘 자신을 시험하는 고용주이자, 건방진 고용인이기도 했다.

동시에… 언제 미쳐서 자신을 죽일지 모르는 경계의 대상이기도 했다.

개인적인 감정이나 호의, 걱정보다 당연히 우리 사이에는 ‘일’에 대한 것이 먼저였다.

아르파드도 그럴 것이고.

그걸 바랄 거라 믿었다.

그런데 반응이 뭔가 이상했다.

힐리아는 마침내 아르파드의 표정에서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한 감정을 제대로 읽어 낼 수 있었다.

그건, 걱정이었다.

‘어?’

아르파드라는 인간과 너무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라,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게 좀 늦었다.

그사이, 아르파드가 표현하는 감정은 한발 더 나아가고 있었다.

* * *

어쩐지 축 처진 듯한 목소리가 고요히 흘렀다.

“그대는 나도 붉은 피가 흐르는 사람이라는 걸 잊어버린 모양이야.”

깜빡.

고운 눈매가 처량하게 휘어져 있는 게 너무 이상했다.

내가 아는 아르파드는 절대 저런 눈빛과 표정을 할 리가 없는데.

세 번의 회귀 중 언제 어디서도 저런 모습은 못 봤다.

“…네?”

“그냥 그대를 걱정해 쉬게 하고 싶어서 그랬다는 생각은 안 하나?”

어?

어어?

잠깐, 이 남자, 지금 진짜 상처받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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