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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혼으로 남편부터 바꾸겠습니다-82화 (82/210)

82화

파편 같은 몇 마디 단어에 불과했다.

꺼져 가는 듯한 목소리였을 뿐이다.

그것에 아르파드는 불에 덴 듯 놀랐다.

심장이 바닥을 구르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더더욱 조심해서 물었다.

“…힐리아?”

싫다니.

그것도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아르파드는 타는 석탄을 입 안에 문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자신이 뭘 어쨌다고 이런 말을 들어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다음 순간, 아르파드는 깨달았다.

희미하게 힐리아의 희고 가는 목에 남은 실금 같은 흉터를 봤기 때문이다.

‘…아, 이건 첫 만남 때 내가 벤 거였지.’

그가 들이댄 칼날에 베인 흉터였다.

그걸 새삼스레 깨닫게 된다.

분홍색 흔적으로 남은 흉터를 덧그리며 아르파드는 생각했다.

‘혹시 그때의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만일 그렇다면, 이렇게 괴로워한다면… 그때의 기억을 악몽으로 여기고 있어서겠지.

보통은 칼날이 들어온 순간을 끔찍하게 여길 테니까.

곧 아르파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 여자는 보통 사람과 달라.’

용혈을 물려받은 자신과 황제 사이에서도 멀쩡하던 여자가 아닌가.

그리 변명하면서도, 아르파드는 그때 행동을 비판적으로 돌아보고 있었다.

‘목에 칼을 댄 건, 심했나?’

이건 아르파드로서는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 감정이 ‘후회’에 가깝다는 걸 잘 몰랐다.

그는 태어나 단 한 번도 후회해 본 적 없는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아르파드는 더없이 조심해서 다시 여자의, 아니, 아내의 이름을 불렀다.

“힐리아?”

“…으응.”

여전히 힐리아는 의식이 없었다.

몸은 뜨거웠고, 땀에 젖어 있었다.

어린 짐승 같은 신음이 얕게 흘렀다.

아르파드는 새삼스레 힐리아의 무게를 떠올렸다.

상아의 침실 앞에서 그녀가 쓰러졌던 순간.

힐리아를 가장 먼저 안아 든 것도, 이 침대로 옮긴 것도 그였다.

‘너무 마르고 가벼웠어.’

그리고 지금은 더 가벼워졌을 거다.

아르파드가 사흘 내내 물이나 약, 그리고 미음을 입에 흘려 넣어 주곤 있었지만 제대로 먹지 못했으니까.

살이 빠졌으면 빠졌지, 붙을 리 없었다.

그렇다고 힘들게 앓는 사람의 무게를 재겠다고 들어 올려 확인해 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니, 엄두가 안 났다.

다시 안아 올리면 그대로 공기 중으로 녹아 사라져 버릴 것 같아서.

아르파드의 조심스러운 손길이 침대 위에 흐트러진 분홍빛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봄날에 물 위에 뿌려진 벚꽃잎 같은 머리칼이었다.

그만큼 여린 색이었다. 바람결에 훅 날아가 버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잘도 이런 몸으로 그 난리를 다 치렀군.’

지난 한 달여간, 힐리아가 겪은 일들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

이룬 일들도.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던 여자였다.

“저를 약탈해 주세요.”

만나자마자 한 소리가 이것이었다.

그것도 아르파드가 최측근에게도 알리지 않았던 비밀 장소로 찾아와서는.

아그리피나의 신물이든, 또 광증을 가라앉혀 줄 수 있든 없든, 평소의 아르파드였다면 그런 말을 들은 순간 바로 베었을 거다.

달콤한 말을 하는 자일수록, 믿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그런데도, 믿을 수 없는 다디단 말을 늘어놓는 여자를 약탈해서 이 침대에 눕혔다.

새삼스레 깨닫게 된다.

이 여자라서 받아들인 거다.

그 순간, 무언가 아르파드의 심장을 콕, 하고 찔렀다.

바늘처럼 작고 하찮은 감각이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감히 범접하지 못한 그의 내밀하고 약한 곳을 찌른 공격이기도 했다.

* * *

“…으.”

몸이 젖은 솜처럼 무거웠다.

“으으.”

누가 이렇게 듣기 싫은 소리를 내나 했는데, 조금 늦게 깨달았다.

내 목소리였다.

쇳소리가 심해 순간적으로 못 알아들었다.

뒤이어 입술, 입안, 혀, 목구멍이 가뭄의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지는 것 같았다.

“…으을.”

분명히 물, 이라고 말했는데, 소리가 너무나도 매가리가 없었다.

이러면 누구도 못 듣고 물을 안 줄 거다.

그리고 나는 비쩍 마른 수수깡이 되어 말라죽겠지.

그 순간, 차갑고 달콤한 물이 입에 닿았다.

나는 정신없이 그걸 받아 마셨다. 두 컵을 통째로 비우고 나서야 깨달았다.

내게 솜씨 좋게 물을 먹여 주고 있는 남자의 존재를.

“…아르파드?”

그는 나를 안고 있었다.

내 뒤통수를 안정적으로 받쳐 올려 본인의 상체에 기대게 하고, 편히 물을 마실 수 있게 했다.

놀랄 정도로 말랑말랑한 아르파드의 목소리가 귓가를 적셨다.

“다 마셨나? 더 줄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반된 두 질문 중 어느 쪽의 대답으로도 해석이 가능한 움직임.

아르파드는 귀신처럼 알아들었다.

다시 물을 반 컵 정도 내 입에 대 주었다.

어린아이처럼 물을 받아 마신 뒤 겨우 한숨을 쉴 수 있었다.

“아, 죽겠다.”

그러자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듯한 아르파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겨우 일어나서 한다는 소리가 죽겠다라니, 너무하지 않아?”

나는 조금 놀랐다.

어째 진심 어린 원망이 느껴져서였다.

그래서였다. 일단 변명부터 한 것은.

“아, 이건 진짜 죽겠다는 건 아니고, 그만큼 힘들다는 감탄사예요.”

나야 반 정도 한국인의 영혼을 가졌지만, 아르파드는 모르는 게 당연했다.

나는 아직 몽롱한 정신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상아의 침실이다.

연회가 끝나고, 침실 앞에서 의식이 끊어진 게 기억났다.

“아까워라.”

“…뭐?”

“침실 안으로 들어와서 쓰러졌으면 유종의 미를 거두는 건데.”

어쩐지 평소보다 좀 낮고 또 기이하게 울리는 듯한 목소리로 아르파드가 물었다.

“안에 들어와서 쓰러지는 게 나았다고?”

“네. 그렇잖아요.”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가 쓰러진 걸 본 사람이 별로 없다곤 하지만, 완벽을 기하고 싶었다.

지금은 황후나 에반젤린의 첩자에게 들킬 염려는 적었다.

하지만 황태자궁의 궁인 중엔 본 사람이 있을 수밖에 없다.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애니나 벨테인 경에게는 내 약한 면을 보여도 되지만, 황태자궁의 궁인들은 다 믿을 수 없었다.

나는 굳이 이 생각을 말로 표현하진 않았다.

“…….”

어쩐지 이상하고 불길한 침묵이 꼬리를 끈다.

나는 의아해하며 눈을 굴렸다.

고개를 돌릴 힘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아르파드는 나와 바짝 붙어 있어 바로 표정을 볼 수 있었다.

“…….”

그 표정을 확인하고 나는 조금 기가 죽었다.

‘뭐야? 왜 이렇게… 기분이 안 좋아 보이지?’

그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죄지은 사람처럼 그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내가 얼마나 잤어요?”

그러자 아르파드는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오늘이 연회 끝나고 닷새째 아침이야.”

“…네?”

너무 이상한 말을 들었다. 말도 안 되는데?

“내가 잘못 들은 거 같은데요?”

아르파드는 확인 사살을 날려 주었다.

“그대는 닷새 동안 앓았어. 잔 게 아니라.”

머릿속에서 벼락이 내리쳤다.

나는 몸에 힘을 주어 벌떡 일어났다.

“아, 어떡해! 이 중요한 시기에!”

아르파드는 어쩐지 조금 당황한 듯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힐리아? 지금 제대로 이해한 거 맞나? 그대가 닷새를 앓았다니까.”

나는 고개를 휙 돌려, 아르파드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진심으로 말했다.

“미안해요!”

동시에 아르파드가 멍청한 표정을 짓는 걸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왜 이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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