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잠시 너른 홀 안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이 침묵을 가장 먼저 깬 것은 대공비였다.
그녀는 조금 전 황후와 말다툼하다 모욕받은 건 아예 없던 일인 것처럼 굴었다.
환한 얼굴로 내게 와서 축하의 말을 건넸다.
“경하드립니다, 비 전하.”
“고맙습니다, 대공비.”
그녀의 실감 나는 연기도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덕분에 황후를 낚는 데 성공했지.’
당연히 서부 귀족들의 수장인 그녀는 사전에 입궁을 위한 허가 서류 준비와 몸수색을 직접 지휘했다.
그런데도 황후가 난리를 피우며 황태자비 자격을 문제 삼도록 유도한 이유는 간단했다.
‘황후가 그 정도로 날뛰어야 확실한 명분이 될 테니까.’
반역은 강력한 만큼 위험한 명분이다.
실패할 경우 제기한 당사자도 그만큼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황후는 나를 반역으로 몰아가려 했다가 아님이 밝혀졌으니, 그 역풍을 단단히 받을 수밖에 없다.
그녀를 시작으로 서부 귀족들이 뒤따라 나에게 하례 인사를 우르르 올렸다.
사실상 내 승리를 축하하는 행위였다.
“경하드립니다, 비 전하.”
“축하드립니다.”
“부디 딸아이가 전하께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마지막은 솔레누 후작이었다.
내가 내궁 살림을 맡게 되었으니, 손녀를 잘 봐 달라는 모양이다.
‘미안해요, 후작. 이세핀은 이미 할 일이 따로 있는걸요.’
하지만 이걸 말할 수는 없었으므로 그저 애매한 웃음으로 대꾸를 대신할 뿐이었다.
내가 축하받는 걸 황후와 에반젤린은 망연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그들과 나 사이에 축하를 위해 몰려든 서부 귀족들이 끼어들었고.
곧 황후의 말에 흔들렸던 중앙 박쥐들까지 다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내 쪽으로 날아들었다.
“비 전하! 경하드립니다. 저는 밀케나 백작가의…….”
“아르타누스의 축복을 받으신 비 전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부디 인사를 올릴 수 있게 해 주세요!”
몰려드는 인파에 밀려, 황후와 에반젤린의 모습은 내 눈앞에서 지워져 버렸다.
벌써 저들의 완전한 퇴장일 리는 없었다.
‘나도 이 정도로 끝낼 생각은 없어.’
복수는 이제 시작에 불과했으니까.
* * *
오늘 황태자비로 인정받은 힐리아가 황궁의 실세로 떠오른 건 분명했다.
귀족들은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꿨다.
그걸 망연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황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덤덤한 표정의 황제가 서 있었다.
그녀는 손안에 구겨진 서류에 찍힌 인장을 보았다.
금빛 드래곤이 날개를 편 형태가 선명한 황제의 인장.
지금 황제의 손가락에 끼워진 바로 저 인장이다.
제국의 황제 외에는 누구도 쓸 수 없는 마법이 걸린 황실의 보물 중 하나.
황제의 인장이 찍혀 있다는 건 한 가지 의미였다.
황후는 황제에게 다가가 물었다. 아니, 확인했다.
“…알고 계셨군요. 폐하께선 처음부터 다 알고, 도와주신 거군요.”
황제가 이번 일을 사전에 알고 있었고, 승인까지 내려 주었다는 것.
그리고 그걸 황후에게는 숨겼다는 것.
황후는 그 사실을 지적하고 있었다.
‘아니, 그전에 나에게 거짓말을 하고, 이 연회에 참석했을 때부터 이미 그는 나를…….’
황후의 질문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대체 저 계집이 뭐기에, 이렇게까지 하시는 거예요?”
“당신이 어린 며느리를 내쫓겠다며 득달같이 달려들지 않았다면, 이럴 일도 없었소.”
그리고 그는 냉혹하게 몸을 돌리며 명했다.
“돌아가서 따로 명이 있기 전까지 근신하시오.”
“…….”
“끌어내는 것보다는 직접 걸어가는 게 당신의 명예에도 나을 거요.”
황제는 뒤돌아보지 않고 점점 멀어졌다.
이자벨이 홀에 처음 들어섰을 때 봤던 그때의 광경 그대로.
분홍빛 머리카락의 자그마한 계집애 옆으로 가 버렸다.
그리고 이자벨에게도, 그 딸에게도 단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는 다정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약 20여 년 전, 저 남자를 처음 보고 사랑하게 되었을 때.
그를 가지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이자벨은 사랑과 함께 악의도 배웠다.
검고 끈적끈적한 용암 같은 질투심.
바로 저 남자가 알려 준 것이다.
록셀린이 죽은 후. 그리고 자신이 황후 자리에 오른 뒤에는 살짝 잦아들어 있었던 그 악의가 맹렬하게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결국 10여 년 동안 곁을 지켜왔어도 나는 당신의 아내가 아니었다는 거겠지. 단 한순간도.’
이렇게 되리라는 걸 알면서도, 이자벨은 지금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안에 남아 있던 미련은 남김없이 증오와 복수심으로 화했다.
‘반드시, 후회하게 해 주겠어. 당신의 모든 걸 다 빼앗아 줄 거야.’
이자벨은 다 구겨진 서류를 내던지고, 빈손을 바라보았다.
손톱이 살을 찔러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아무것도 쥐지 못한 채, 결국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허무한 손.
그녀 자신의 모습과 같았다.
등 뒤에서 에반젤린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 지금은, 물러나야 해요.”
에반젤린은 조심스레 이자벨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결국 텅 빈손만을 거머쥔 채, 이자벨은 딸에게 이끌려 홀을 나가야 했다.
딸과 수행원들 외에 누구도 관심 가지지 않고, 따르지 않은 초라한 행차였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아직 손이 남아 있었다.
안에 쥔 것 하나 없는 텅 빈손이라도, 적을 할퀼 손톱은 남아 있었다.
저들은 그걸 알아야 할 것이다.
* * *
아르타누스 홀의 연회는 누구도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성공리에 끝났다.
나는 단순히 연회만 성공시켜 황태자비로 인정받는 정도로 일을 끝낸 게 아니었다.
이자벨 황후를 함정에 빠트려 근신하게 만들고, 내궁의 관리 권한까지 손에 넣었다.
‘한번 내 손에 들어온 건, 절대 빼앗기지 않을 거야.’
아마도 대중의 예상과는 정반대의 결과였으리라.
연회가 파한 후 황태자궁은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나와 아르파드가 돌아오자 사방에서 축하의 인사가 쏟아졌다.
“경하드립니다. 전하!”
“세상에, 저도 봤습니다. 아르타누스 님께서 직접 모습을 드러내시어 축복하시다니.”
“온 제국에 비 전하의 소문이 퍼지고 있습니다!”
“너무 감격스럽습니다. 크흡!”
나는 아르파드와 팔짱을 낀 채, 궁인들의 축하와 인사를 받으며 침실로 향했다.
애써 웃어 주고 대답했지만, 뭐라고 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몸이 녹아내릴 것처럼 피곤했기 때문이다.
당연한 일이긴 했다.
나는 회귀 직후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달려왔다.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
그런데 바로 그 연회가 끝난 것이다.
아르타누스 홀을 나와 황태자궁으로 돌아오는 내내, 구름 위를 걷고 있는 것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온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건 아르파드에게 매달렸기 때문이다.
무너질 수 없었기에 겨우 버텨 냈다.
애써 웃으면서 귀족들과 궁인들 앞에서 평온함을 가장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내 한계는 황태자궁 침실 바로 앞까지였다.
침실 문이 보이자, 안도감이 훅 들어오며 지독한 어지럼증이 밀려왔다.
다리가 비틀거리더니,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아!”
내가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아르파드 덕분이다.
단단한 팔이 내 허리를 휘감아 지탱해 준 것이다.
“괜찮나?”
드물게 당황한 듯한 아르파드의 목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멀게 느껴졌다.
눈앞이 흐려서 아르파드의 얄미울 정도로 잘생긴 얼굴이 안 보였다.
색이 진한 붉은 눈만이 선명했다.
마치 세 번째 삶, 마탑에서 마주쳤던 아르파드의 시체로 만들어진 괴물처럼.
그런데 이상했다.
그때는 저 붉은 눈이 너무나도 두려웠는데…….
지금은 오히려 안심되었다.
나는 힘이 없어 이리저리 흔들리는 손을 뻗어 아르파드의 얼굴을 만져 보려 했다.
하지만 자꾸만 헛손질하게 된다.
열에 들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당신 왜…….”
솔직히 나는 무슨 말을 하는 건지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아르파드가 정말 드물게 진심으로 당황한 표정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힐리아?!”
‘왜 그렇게 불안한 표정을 하고 있어요, 안 어울리게?’
내 질문은 결국 입 밖으로 완전히 나오지 못했다.
거기서 의식이 뚝, 하고 끊겼기 때문이다.
“힐리아!!!”
경악한 아르파드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다.
하지만 깊은 어둠에 잠긴 의식은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