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황후라면, 이 문제를 눈치채고 트집을 잡으려 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내가 확신하는 이유는 이번에도 간단했다.
‘회귀 전, 첫 번째 삶에서 비슷한 일이 있었으니까.’
그때 황태자궁에서 외부로 통하는 입구를 이용하고 마법을 써서 사병을 들인 당사자는 내가 아니라 바로 아르파드였다.
‘그 당시 아르파드는 다수의 암살자가 자신을 노릴 거라는 정보를 입수했었고, 그에 대항하기 위해 비밀리에 병력이 필요했다고 했어.’
그 결과 아르파드는 암살자들로부터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용병단을 황궁 내부로 들인 일이 들키고 만다.
그리고 황후는 이를 반역으로 몰고 갔다.
황제에게 사전에 인가받지 않은 상태에서, 몸수색도 받지 않은 데다 병기를 보유한 병력을 들인 일이다.
황태자가 벌인 일이라도 반역으로 해석될 여지는 충분했다.
하지만 당시 아르파드는 부친인 황제도, 황실 기사단도 믿지 못하는 상태였다.
지금보다 훨씬 더 위치가 불안정했기 때문이다.
‘이미 종종 광증이 발발하고 있기도 했었고.’
그런 무리한 일을 벌인 데에는 아마도 광증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반역으로 몰린 아르파드는 과연 본인다운 결정을 내린다.
‘진짜 반역을 일으켰지.’
작은 규모였으나 내전이 벌어졌고.
놀랍게도 그 상황에서도 아르파드는 승리했다.
아르파드는 부황을 폐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단 하루뿐인 황제였지만.
‘아르파드는 황위를 손에 넣고, 바로 완전히 미쳐 버렸으니까.’
이미 그전에 그는 상당히 미쳐 있었던 게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난 내가 언제 미쳐 버릴지 몰라 늘 두려웠거든. 특히나 어머니가 돌아가신 진홍월이 뜬 때에는 더 그랬지.”
내가 완전히 미쳐 버린 그와 우연히 만났던 건 바로 첫 번째 생의 그 반역 때였다.
아르파드와 나의 진정한 의미에서의 첫 만남이었다.
* * *
나는 아르파드가 반란을 일으킨 그때, 우연히 황궁에 있었다.
루드비히의 아내로서 나날이 시들어 가고 있던 때였다.
아르파드가 이끄는 용병단이 황궁을 휩쓸기 시작했을 때.
루드비히는 나를 미끼 삼아 두고, 먼저 도망쳤다.
“너, 너는 머리 색이 너무 눈에 띄어! 그러니까 내가 붙여 준 기사와 함께 도망치도록 해!”
그의 말대로 내 분홍색 머리카락은 특이한 것이다.
그러니 정상적으로 나를 보호하려는 사람이라면 내 머리카락부터 숨길 거다.
하지만 루드비히는 그러지 않았다.
내 분홍 머리가 잘 드러나도록 망토의 후드까지 찢어 버린 뒤, 자신과 비슷한 체격의 기사를 붙여 반대 방향으로 도망치게 했다.
그 당시 나는 왜 루드비히가 그러는 건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루드비히가 날 미끼로 썼다는 걸 깨달은 건, 아르파드의 피 묻은 칼날을 앞에 둔 뒤였다.
그때 이미 아르파드의 붉은 눈은 광기에 침식되어 있었다.
“쯧. 제 아내를 미끼로 던지고 도망간 거였나. 루드비히. 그 정도로 쓰레기인 놈…이긴 하지.”
“사, 살려, 살려 주세요!”
울면서 벌벌 떠는 나를, 아르파드는 한참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고개를 들었다.
때는 밤, 그것도 진홍월이 뜬 날이었다.
더없이 불길하게 붉게 빛나는 달을 올려다보며, 아르파드는 허탈하다는 듯이 말했다.
“난 내가 언제 미쳐 버릴지 몰라 늘 두려웠거든. 특히나 어머니가 돌아가신 진홍월이 뜬 때에는 더 그랬지.”
나는 공포심마저 잠시 잊은 채, 붉은 달빛 아래에 선 아르파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지독히도 아름답고, 슬프고, 또 지쳐 보였다.
“그런데… 결국 나도 그렇게 될 운명이었던 모양이군… 끝없이 저항했는데…….”
아르파드는 나를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몇 마디를 더 중얼거렸다.
하지만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리고 잠시 고개를 푹 숙였던 아르파드가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깨달았다.
조금 전까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이성이 남은 인간은 거기 없었다.
혈통을 타고 흐르는 광기에 먹혀 버린 짐승이 있었을 뿐.
붉은 안광이 달빛 아래에서 번쩍였다.
도자기처럼 희었던 피부를 뚫고 올라온 금빛 비늘은 피에 젖어 있었고.
칼을 버린 손에서는 칼날 같은 손톱이 튀어나왔다.
그 짐승은 내 피를 원하며 달려들려 했다.
“크아아악―!!!”
내가 그때 목숨을 건진 이유는 간단했다.
폐위되어 갇혀 있던 발터 황제가 도착했기 때문이다.
황족을 죽일 수 있는 건 황족뿐이다.
이건 대부분의 제국민이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었다.
피의 광기에 먹힌 황족은 반인반룡의 괴물이 된다.
세 번째 생에서 마탑의 실험체로서 마주쳤던 그때 본 것과 비슷한 상태가 되는 거다.
단, 그 실험체는 시신을 사령술로 움직인 것이기에 살아 있는 상태가 몇 배로 강하다.
반인반룡이 내뿜는 살기 앞에서 인간은 공포로 굳어 버렸다.
마치 맹수 앞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초식동물처럼.
그때의 나도 그랬다.
“꺄아아악!!!”
반인반룡의 살기 속에서 멀쩡히 움직일 수 있는 건 같은 드래곤의 피를 가진 황족뿐이다.
“아르파드―!!!”
발터 황제는 완전히 미쳐 버린 아들의 목을 직접 베었다.
그리고 두 번째 생에 신전에서 만난 후에야 깨달았는데 그때 황제는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 * *
그때와 달리 황제는 아주 평온한 표정이었다.
아르파드 역시 미치지 않았다.
‘그래. 그런 일은 이제 없을 거야.’
나는 끔찍했던 기억을 떨치려 애쓰며 고개를 돌렸다.
통쾌한 현재에나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사흘 전에 미리 준비 완료한 서류가 황후의 손안에서 구겨졌다.
황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설마, 설마……?”
생략된 황후의 말이 귓가를 울리는 듯했다.
‘함정을 판 거냐?’
나는 기껍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황후가 내 뜻을 알아들었음은 분명했다.
일그러지는 황후의 표정도, 피 냄새를 맡은 피라냐처럼 가까이 왔다가 망한 에반젤린의 표정도 매우 보기 좋았다.
나는 세 번이나 내 인생을 망쳐 놓은 모녀를 보고 흐뭇하게 웃었다. 옆에서는 만담이 벌어지고 있었다.
황후가 다 구겨 놓은 서류의 작성자인 율켄이 안타깝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꽤 크게 들렸다.
“아아, 안 돼. 내 피와 땀, 눈물과 야근의 결과물이 저렇게 구겨지다니…….”
그러자 아르파드가 나름대로 위로의 말을 건넸다.
“어차피 서류는 유효할 텐데 뭐가 그렇게 안타까운 거지?”
“전하께서 직접 쓰시는 거 아니라고 그렇게 편하게 말씀하실 수 있는 겁니다!”
아, 위로가 아니라 약 올리는 건가?
어쨌든 이 둘의 바보 같은 대화에는 장점도 있었다.
피비린내 나는 회귀 전 기억에서 빠져나오는 데에 조금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덕분에 나는 최대한 해맑게 황후와 에반젤린을 향해 웃어 보일 수 있었다.
그리고 황제의 입에서 드디어 내가 원하던 말이 시작되었다.
“확실하지도 않은 문제로 다른 일도 아닌 반역죄를 그리 함부로 입에 담다니, 지나치게 경솔하군. 황후.”
“폐, 폐하! 잠깐……!”
하지만 황제는 황후의 항변을 더 들어주지 않고 선언했다.
“황후가 고귀함과 체통 지위에 걸맞은 의무를 제대로 지키고 있는지 의심스럽군.”
“폐하!”
“한동안 근신하시오.”
그리고 황제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동안 내궁의 관리는 황태자비에게 맡기겠다.”
나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굽혔다. 이번에도 황후가 아니라 황제를 향해서.
“명에 따르겠습니다, 황제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