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반역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황제는 황당하다는 듯 반응했고 다른 이들도 비슷했다.
심기가 상한 황후가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고 있다고 해석한 것이다.
하지만 황후는 나름대로 논리를 준비해서 들어온 상태였다.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대공비를 위시한 서부 귀족들을 손가락질하며 말문을 열었다.
“저기 있는 자 중, 오늘 황궁 출입을 허락받은 이들이나, 황실 기사들에게 몸수색을 받은 이들이 있습니까?”
“…….”
“…….”
무거운 침묵이 홀을 짓눌렀다.
이건 황후의 지적이 틀리지 않았다.
당연히 황궁에는 보안 절차가 있었다.
황족과 직접 대면하는 경우에는 더 철저한 절차가 필요했다.
입궁에 대한 허가 및 사전에 몸수색을 마치는 건 기본이었다.
그리고 분명히 황법상, 이 절차 없이 황궁 안에 사람을 들이는 것은 반역에 준하여 처벌하게 되어 있었다.
제국 초에 몇 번의 파란을 거치며 만들어진 법이었고, 지금까지도 유효한 내용이다.
힐리아가 나선 건 그때였다.
“그렇게 무섭게 말씀하지 말아 주세요, 황후 폐하. 저들은 제 초대를 받아 연회에 참석하려 했을 뿐이랍니다.”
여전히 웃고는 있었으나, 표정에 긴장이 엿보였다.
황후는 어린 계집애를 비웃었다.
‘어린 것이 에반젤린을 이겨 먹겠다고 물불 안 가리다가, 실수한 게지.’
그런 주제에 황제와 황태자에게 둘러싸여 우쭐하고 있다니.
너무나도 꼴사나워 봐줄 수가 없었다.
황후의 주장이 설득력 있다고 생각하자, 주변에 술렁거림이 퍼지기 시작했다.
“화, 확실히 황후께서 틀린 말씀을 하신 건 아니네요.”
“맞아요. 황실의 안위를 위험하게 할 수 있는 일은 확실하게 시비를 가려야죠.”
“황태자비께서는 침착하고 사려 깊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일은 좀 생각이 짧으셨던 게 아닐까요.”
명백히 힐리아를 향한 불온한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힐리아가 궁지에 몰리는 구도가 되자, 조용하던 악시온 대공비가 나섰다.
그녀는 황후에 맞서 힐리아의 편을 들었다.
본인 일행을 두둔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 말대로라면, 비밀리에 이곳으로 들어온 나를 비롯한 서부 귀족들이 곧 반역도라는 말씀입니까?”
황후는 천천히 대공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간 일부러 황궁에 입궁하는 것을 피하던 그대들이 이렇게 도둑처럼 숨어들었는데, 역심을 품지 않았다고 어찌 장담할까? 악시온 대공비?”
“…!”
본인을 콕 집은 하대에 대공비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반면 이자벨 황후의 눈빛에는 명백한 희열이 번진다.
악시온 대공비는 이자벨 황후가 모시던 옛 주인이다.
그것도 이자벨이 황후 자리에 오르는 걸 반대하며 자신을 따르는 귀족들을 끌고 대항한 장본인.
그런 이에게 말을 낮출 수 있다는, 이 관계의 역전이 황후에게는 꽤 만족스러웠다.
짜릿할 정도다.
지난번 악시온 대공비가 황후에게 저항하며 궁을 나갔을 때는 직접적인 대면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끝까지 저 여자의 입에서 황후 폐하라는 말은 못 들었지. 존대 역시도.’
지금은 달랐다.
악시온 대공비는 어쩔 수 없이 이자벨에게 존대를 하고 있었다.
어쨌든 현재 이자벨의 지위는 황후였으므로.
‘그것 하나만은 저 아이에게 감사해야 할지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대공비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서부 귀족들의 충심을 정말 의심하시는 거라면, 이렇게 연회를 망치기 위해 음해하는 게 아니라, 저희 모두를 반역자로서 체포하시는 게 먼저 아닙니까?”
황후는 대공비를 비웃더니 대꾸했다.
“그리하지 않는 것이 내 자비이니 감사하도록. 나이도 있고 명예를 알아야 할 자들이 어린아이의 권력 놀음에 붙어서 이런 추태를 보이다니.”
황후는 혀를 찼다.
대공비의 주름진 얼굴이 모욕감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이……!”
황후는 대공비를 무시했다.
그러자 에반젤린이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말을 거들었다.
“맞아요. 황후께서 올바른 지적을 하셨어요. 과연 황후 폐하다우세요!”
그만큼 본인에게 유리한 상황이라 판단한 듯했다.
맹수가 잡은 사냥감을 나눠 뜯어먹으려는 하이에나처럼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듯이 번뜩이는 눈빛이 섬뜩했다.
그리고 에반젤린은 당당한 어조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자신의 자리를 인정받겠다는 개인적인 욕망으로 이런 짓을 벌인 사람에게, 과연 황태자비의 자격이 있을까요?”
궁지에 몰린 힐리아 대신 화를 내준 건 악시온 대공비였다.
“말을 조심해라, 루스 후작 영애!”
하지만 에반젤린은 완전히 평소의 여유를 되찾은 상태였다.
살포시 웃으며 비꼬는 말투가 듣는 이의 심기를 긁었다.
“그야 대공비께서는 공모자이니 그렇게 말씀하시겠죠. 함께 벌을 받기는 싫으실 테니까요.”
“그만하거라, 에바.”
“하지만……!”
황후는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섰다.
“그래도 에반젤린이 틀린 말을 한 건 아닙니다. 황제 폐하를 해할 역심이 없었다 하더라도 이건 명백한 문제입니다.”
그녀는 홀 안을 가득 채운 다른 귀족들을 하나하나 노려보며 말을 잇는다.
“저는 오히려 이 자리의 누구도 이를 지적하지 않았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군요.”
황후의 시선을 받은 중앙 귀족들은 민망함과 난처함에 어깨를 움츠렸다.
“저, 저희의 소견이 좁아…….”
“어찌 감히 황후 폐하의 넓은 식견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급하게 변명을 주워섬기는 이들도 있었다.
“이런 중요한 절차를 무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물며 이를 주도한 이가 황태자비라니요. 자격이 있다고 볼 수 없습니다.”
더욱더 자신만만해진 황후는 황제에게 간곡하게 청했다.
“내궁의 주인인 황후로서, 황제 폐하께 현명한 결단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이에 대한 대답 여하에 따라 모든 게 달라질 것이다.
모두가 황제의 입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황제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황후가 틀렸소.”
“…네?”
진심으로 당혹스러워하는 물음.
황후는 황제가 자신의 요청을 일언지하에 부정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듯했다.
잠시 놀라서 고개를 갸웃갸웃하던 그녀는 곧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아무리 며느리를 귀엽게 여겨 편들어 주시려 해도 저지른 잘못이 사라지진 않습니다.”
에반젤린을 닮은 황후의 눈빛은 명백한 적의와 질투심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자 황제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건 내가 며느리를 귀여워하거나 편을 들어주려 하는 말이 아니오. 이번 일은 절차를 모두 지켰으니.”
“…예?”
조금 전까지 기세등등한 만큼, 황후의 표정은 거의 넋이 나간 듯했다.
황제는 서기관을 시켜 서류를 가져오게 했다.
“확인하시오. 오늘 연회에 참석한 서부 귀족들의 명단을 적어 사전에 나에게 허락을 받은 서류요.”
황후의 두 눈이 홉떠졌다.
그녀는 서기관에게서 서류를 빼앗듯 받아들고 읽어 내렸다.
황제의 말대로였다.
악시온 대공비부터 이 자리에 있는 서부 귀족들의 이름이 모두 적혀 있었다.
그리고 서류 하단에는 이들의 입궁을 허락하는 황제의 명령과 인장까지 찍혀 있었다.
서류에 적힌 날짜는 사흘 전.
“그, 그러면… 입궁을 위한 몸수색은……!”
이에 대신 답한 것은 아르파드였다.
“황태자궁에 소속된 황실 기사들이 모두 마쳤습니다. 절차상의 문제는 전혀 없습니다.”
황후는 창백해진 얼굴을 들었다.
벽처럼 굳게 선 황제와 황태자의 옆에서 자그마한 머리통이 불쑥 튀어나왔다.
분홍빛 머리카락이 사랑스럽게 흔들렸다.
시선이 마주쳤다.
황후는 보고 말았다.
자신을 비웃는 힐리아의 모습을.
* * *
당연히 이건 전적으로 내가 유도한 일이었다.
‘이만한 규모의 인원이 쥐도 새도 모르게 황궁에 들어오면, 당연히 문제 삼을 수 있지.’
아니, 문제 삼지 않는 게 도리어 이상했다.
그리고 그 부분이 바로, 내가 황후를 끌어들일 수 있는 미끼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