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황후가 나에게 뭘 요구한 건지는 당연히 잘 알았다.
‘먼저 고개를 숙이라는 거지.’
물론 황실 예법상으로는 그게 맞았다.
실제로 나는 그걸 내세워 악시온 대공비를 굴복시키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나는 황후 앞에서 고개를 숙일 수도, 무릎을 꿇을 수도 없어.’
누누이 말했지만, 오늘은 아주 중요한 날이다.
약탈혼이라는 약점을 가지고 황태자비가 된 게 나다.
그 때문에 아르파드와의 결혼식 이후 한 달이 넘도록 황태자비로 제대로 인정을 못 받고 있었다.
용의 일식부터 지금까지의 일로 겨우 황태자비로 인정받았다.
‘내가 다른 사람 앞에 고개 숙이는 모습은 있어선 안 돼. 설사 그게 황후라 하더라도.’
아까 황제의 등장과 함께 내가 예를 표한 것과는 상황이 달랐다.
그건 내가 황제의 권위를 빌려 입는 것이었지만.
지금 황후에게 고개를 숙이면 반대의 효과가 날 테니.
어떻게든 에반젤린이 오늘 나에게 흠집을 내려 한 것과 일맥상통하는 일이었다.
‘역시 모녀라니까.’
그래서 나는 황후의 ‘무릎 꿇어’ 라는 말을 못 알아들은 척 무시한 거다.
생글생글 웃으며 계속 황후의 속을 긁었다.
“이미 황제 폐하께서 저를 인정해 주셨으니, 제가 황태자비임은 이제 분명하지만… 그래도 내궁의 주인께서 인정하고 축하해 주시는 건 또 기분이 다르니까요.”
황후는 가까스로 표정을 유지했다.
하지만 그녀 뒤편으로 저 멀리 보이는 에반젤린의 표정은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마치 황후의 속마음을 에반젤린이 비춰 주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금 전 내가 한 말은 황후에게 꽤 굴욕적일 수밖에 없으니까.
‘난 황제 폐하의 인정 외엔 필요도 쓸모도 없다. 하지만 당신의 인정과 축하는 기분 좋으니까 받아 줄게.’
이렇게 말한 셈이니까.
그러자 황후는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노골적인 분노가 묻어났다.
“…너에겐 정말로 많은 가르침이 필요하겠구나. 제국 내 모든 귀족 여성은 황후를 만나면 먼저 인사를 올려야 하는 법이란다.”
황후는 턱을 휙 치켜들더니 나에게 명령했다.
“어서 해 보렴.”
이를 부득부득 갈고 쫓아온 게 선명하게 느껴졌다.
나는 여전히 방글방글 웃으며 답했다.
“오늘 연회에는 참석하시겠다는 말씀이 없으셔서 그리 알고 있었는데, 이리 달려와 저의 인사를 받고 싶으시다니. 저를 만나 인사받기를 너무나도 고대하셨나 봐요. 정말 기쁩니다.”
나는 대놓고 비꼬았다.
‘연회 훼방만 잔뜩 놓았으면서 득달같이 달려와서, 인사는 받겠다고? 너무 뻔뻔하지 않아?’
진짜 둔한 사람이 아닌 한 대부분 내가 한 말을 알아들었다.
통렬하게 비꼬는 내내 내 얼굴은 계속 다정하고 행복한 새 신부의 표정 그대로였다.
황후는 분노와 수치심으로 얼굴을 살짝 붉혔지만,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그래. 아주, 아주 고대하고 있었단다.”
어떻게든 내게 인사를 받아 내겠다는 집념이 추할 정도였다.
그때였다.
때를 기다렸다는 듯 끼어든 목소리가 있었던 것은.
“그만하시오.”
황후와 황태자비의 대화, 그것도 험악한 기 싸움 와중에 끼어들 수 있는 이는 적다.
그중에서도 황후에게 저렇게 말할 수 있는 이는 한 명뿐이다.
“…폐하?”
황제가 나와 황후 사이에 끼어들었던 것이다.
그것도 황후를 마주 보고, 등 뒤에 나와 아르파드를 두는 구도로.
‘누가 봐도 황후와 대치하며 나를 보호하는 모양새네.’
아주 좋았다.
그리고 내가 예상한 대로의 구도였다.
전에 황제에게 아르타누스 홀에서 연회를 열게 해 달라 청했을 때.
이 일 역시 예상하고 부탁해 두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폐하.”
“바라는 게 아주 많군.”
“저는 욕심이 많으니까요. 그래서 제 남편은 어떻게든 지킬 생각이랍니다.”
“…그래서 무얼 원하는 게냐?”
“제가 연회를 성공적으로 치르고, 증명까지 끝낸다면… 그때 한번은 제 편을 들어주세요.”
“네 편을 들라고? 누가 너와 싸우기라도 한다는 소리냐?”
“예, 그러니 상대가 누구라 하더라도, 제 편을 들어주셔야 해요.”
황제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너는 알 수 없는 말만을 하는구나.”
“그때가 되면 제가 왜, 누구를 두고 한 말인지 이해하실 수 있을 거예요.”
나는 확신에 가득 찬 얼굴로 말을 마쳤다.
“그래야… 폐하께선 아드님을 구하실 수 있을 테니까요.”
황제는 거기에 대해서까지 확답을 주진 않았다.
하지만 그때 내가 한 말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또한, 내가 그동안 해낸 일들이 황제의 마음을 움직인 것도 분명해 보였다.
‘그러니 딱 적절한 때에 끼어들어 준 거겠지.’
평소의 황제라면 지금 나와 황후 사이의 분쟁에는 끼어들지 않았을 거다.
그러니 황후 역시 저렇게 억울하고 배신감 가득한 표정으로 황제를 보는 거겠지.
황제는 이자벨을 사랑해서 황후로 올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를 황후로 선택한 이상, 그에 상응하는 대우와 권력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나 사교계와 내궁의 일은 전적으로 맡기고 있었다.
‘황후는 황후니까.’
그 때문에 대공비와 황후의 다툼 때도 직접 끼어들지 않았던 거다.
황제의 성향을 생각하면 이번 일은 분명히 이례적이었다.
황후가 분노와 억울함, 배신감 가득한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폐하!”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는 거다.
하지만 황제는 굳건했다.
“오늘처럼 좋은 날에, 어린아이를 겁박하다니. 그다지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구려.”
황후의 입가가 푸들푸들 떨렸다.
그녀는 겨우 목소리를 가다듬어서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아마 조금만 감정 조절을 못 했다면 비명을 질렀을지도 모르겠다.
“…황후로서, 윗사람으로서, 부족한 점을 가르치려 한 것뿐입니다. 이건 마땅히 황후의 의무이자 권리가 아닙니까?”
그러자 황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 원칙과 예의를 따진다면, 황후부터 잊은 것이 하나 있소.”
“예?”
황제의 목소리는 더없이 차가웠다. 나와 황후 사이에 끼어들 때보다 더 차가워져 있었다.
“이 자리에서, 누구보다 먼저 예를 받아야 할 이가 누구요?”
“…!”
지위와 권위를 내세우려 한다면, 황제가 최우선이다.
아르타누스가 나타나지 않는 한, 이건 변함없는 원칙이다.
“그리고 나와 함께 입장한 것이 아닌 이상, 황후는 먼저 나에게 예를 표해야 맞소. 하지만 나는 그걸 굳이 지적하지도, 요구하지도 않았소.”
“…폐하!”
황후는 억울하다는 듯이 외쳤으나, 이건 맞는 말이었다.
부부 사이라지만 황제와 황후 사이에도 서열 차이가 있었으니.
물론, 이건 부부로서의 관계보다 군주와 신하의 관계를 더 강조할 경우의 예법이다.
그러니까 황제가 이걸 내세워 황후를 누르려 한다는 건 곧 양측의 갈등이 강할 때라는 의미다.
그러니 지금 황제는 경고한 것이다.
‘나와 척을 질 셈이 아니라면 그만하시오.’
누가 보아도 황제가 황후 앞에서 내 편을 들어준 상황이었다.
아르파드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진짜 세뇌 마법이라도 쓰는 건가?”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그리고 아르파드에게만 진실을 속삭여 주었다.
“다 폐하께서 하나뿐인 아들을 아끼셔서 그런 거죠.”
아르파드의 매끈한 미간이 팍 구겨졌다.
“…그대는 농담에 재능이 별로 없어. 아나?”
“농담 아닌데.”
하지만 아르파드는 전혀 믿어 주는 기색이 아니었다.
어쨌건 이 상황만으로도 이미 주변에 다 알려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황제가 황후가 아니라, 나에게 힘을 실어 주려 한다는 걸.
그때였다.
잔뜩 상처받은 듯한 황후가 사나운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아니, 싸운 건 황제인데, 왜 화는 나한테 낸데?
그리고 외쳤다.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온 건 저 아이가 대담하게도 저지른 끔찍한 범죄를 고발하기 위해서입니다, 폐하!”
“끔찍한 범죄? 그건 무슨 소리지?”
황후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대답했다. 이어질 단어의 파괴력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반역입니다.”
본인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실수가 될 마지막 키워드.
‘반역’을, 황후가 직접 입에 담았다.
나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이럴 줄 알았지.’
당연히 지금 상황은 예상하고 대비를 모두 마쳐 둔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