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Chapter 9. 백금 열쇠의 주인
황후 이자벨은 당연히 아르타누스 홀의 연회에 참석할 생각이 없었다.
이건 황후궁 내에서 열리는 퀴니벨 후작 부인의 무도회도 마찬가지였다.
딸은 사근사근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어머니께서 직접 나서실 필요도 없어요. 제 선에서 정리하는 게 나으니까요.”
황후 역시 이 의견에 동의했다.
그리고 그저 딸을 지원하는 정도로 그쳤다.
며칠 전 ‘황족의 광증’을 운운하기 전까지 에반젤린은 늘 그녀의 기대를 충족해 주는 착하고 유능한 딸이었다.
그 아이가 확언한 말 중 이루어지지 않은 건 없었다.
오늘까지는.
이 믿음은 단단했고, 계속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연회 중반, ‘그 현상’을 황후가 직접 목격하기 전까지는.
“황후 폐하! 나와 보셔요! 지금 하늘에……!”
“갑자기 무슨 소란이냐?”
태양을 가린 드래곤의 형상.
지상에 드리워진 용의 그림자.
제국민이라면 저 형상을 본 순간, 한 단어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아르타누스!’
저 형상이 진짜 드래곤인지.
정말 드래곤이라 해도 아르타누스가 맞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대다수 제국민에게 그렇게 받아들여지리라는 게 중요했지.
하필이면 힐리아가 아르타누스 홀에서 연회를 개최하는 날, 연회가 한창인 시각에 이 현상이 벌어졌다.
이게 과연 우연일까?
‘하지만 이 현상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어. 그런데 저 계집이 예측해 냈다고?’
황궁에 소속된 대륙 최고의 학자나 궁정 마법사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다.
‘마탑에서조차 아무런 말이 없었어.’
마탑주는 황실에 소속된 궁정 마법사보다 뛰어난 자, 사실상 대륙 제일의 마법사였다.
황후는 그와 약간의 연이 있었다.
‘마탑주가 이번 현상을 예상했다면 나에게 알려 줬을 거야.’
방법은 모르겠지만, 저 현상을 예측하는 데 성공한 유일한 인물이 힐리아인 듯했다.
눈이 있는 자들이라면 다 본 광경이다. 게다가 타이밍이 너무 안 좋다.
이런 소문이 돌 수밖에 없었다.
‘드래곤 아르타누스가 새로운 황태자비를 인정하기 위해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
소문이 없으면, 아르파드가 만들어 내서라도 돌게 할 게 분명하다.
정말 저 현상을 예측했다면 소문을 미리 퍼뜨려 뒀을 수도 있고.
‘이 모든 게 정말 저 계집이 꾸민 일일까?’
아니다. 어쩌면 아르파드일지도 몰랐다.
지금까지 힐리아에 대한 기본적인 여론이 바로 그것이었다.
손에 넣으면 델핀 공작가를 가질 수 있는 트로피.
황족 남자들 사이에서 그저 이용만 당할 뿐인 가련한 여자.
하지만 정말 그게 전부일까?
새삼 황후는 지난번 만찬 때 보았던 힐리아의 눈빛을 떠올렸다.
짙은 보라색으로 총명하게 빛나던 눈동자는 쉽게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황후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너무 얕봤어.’
힐리아의 능력을.
혹은 그녀를 생각하는 아르파드의 마음이든.
…양쪽 다 일지도.
그 때문에 황후는 직접 나선 것이다. 모든 예측과 계획을 전부 폐기하고서.
최대한 빠르게 단장을 마치고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아르타누스 홀의 이변을 알리는 이들이 달려왔다.
“악시온 대공비를 비롯한 서부 귀족들이 아르타누스 홀을 다 채웠다 합니다!”
“퀴니벨 부인의 무도회장이 텅 비었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아르타누스 홀에 왕림하셨다 합니다!”
마지막 소식은 황후가 아르타누스 홀 근처에 왔을 때 도착했다.
황후는 아무도 모르게 입술을 짓씹었다.
그녀는 이미 황제를 떠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찌하실 건가요? 직접 아르타누스 홀을 내리셨는데, 발걸음은 하지 않으실 건지요?”
“본인의 능력을 알아서 증명해야지. 그것까지 내가 떠먹여 줄 순 없지 않겠소?”
누가 들어도 황제는 연회에 참석할 의사가 없다는 대답이었다.
그 결과에 따라 힐리아를 인정할지 말지 결정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현실은 달랐다.
‘날… 속인 건가?’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썼지만, 황후는 지금 굴욕감 속에서 헤엄치는 중이나 다름없었다.
아르타누스 홀에 들어서서 황후는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는 걸 깨달았다.
제발 틀리길 바란 그것이.
아르타누스 홀의 반원형 천장 가운데에는 구멍이 뚫려 있다.
그곳으로는 빗물이 새지 않고, 오로지 햇빛과 달빛만이 스며들었다.
지금은 한낮. 비쳐 드는 햇살을 받아 한 여자가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 옆을 지키고 있는 건 두 남자였다.
힐리아를 끌어안은 아르파드.
그리고 아르파드와 꼭 닮은 남자. 황제, 발터 이스트리드.
그녀의 남편이.
황제는 선황후 록셀린이 죽은 이후 처음 보이는 다정하고 따스한 시선으로 힐리아를 보고 있었다.
더없이 서러운 사실 하나가 뼈저리도록 다가왔다.
‘나에게는 절대로 저런 눈빛, 주지 않았으면서.’
록셀린을 향한 애정과 정열까지는 감히 바라지 못했다.
하지만 다정함과 친애의 눈빛 정도는, 그래도 아내라면 줄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황제는 이날 이때까지 그걸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준 적 없었다.
들어온 지 한 달 좀 넘은 저 계집애에겐 주면서.
꾹, 이자벨은 드레스를 부여잡은 손에서 힘을 빼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긴 손톱이 살갗을 찌르는 걸 막지는 못했다.
* * *
황후는 홀을 가로질러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구름처럼 홀을 가득 채운 인파가, 그녀의 걸음걸음마다 갈라져 길을 만들었다.
황후는 이쪽으로 다가오며 주변에 선 귀족들을 일일이 눈에 담았다.
기억해 두겠다는 듯, 아주 지긋하고 강렬한 눈빛.
서부 귀족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으나, 황후궁에 있다가 아르타누스 홀로 온 박쥐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내 바로 앞까지 다가온 황후는 입매만 웃으며 말했다.
“아주 성대한 연회로구나?”
대놓고 비꼬는 어조.
찢어발기고 싶다는 눈빛은 내 머리 위의 티아라에 고정되어 있었다.
바로 이스트리드 공주의 ‘달과 별의 티아라’.
그녀가 약식으로 치러진 결혼식과 생략된 피로연에서도 한 번도 써 보지 못한 것.
그전에 대공비가 손을 써서 아예 소유조차 하지 못한 물건이다.
나 역시 일부러 이걸 골랐으니까.
여전히 아르파드는 날 꼭 끌어안고 있었지만, 굳이 거기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그의 품 안에 찰싹 달라붙으며, 해맑게 대꾸했다.
지난번 만찬 때 보니까 이러면 황후가 더 싫어할 것 같아서였다.
“감사합니다.”
대답은 했지만, 인사는 하지 않았다.
그러자, 황후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나를 향해 물었다.
“한 가지를 잊은 것 같구나.”
“제가 무엇을 잊었을까요?”
황후는 더없이 고압적인 표정으로 내려다보며 시비를 걸어 왔다.
“지난번에도 지적했건만, 선대 공작이 딸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 모양이야.”
“…!”
나왔다, 가정 교육 공격.
‘역시 그 딸에 그 엄마네.’
당연하지만, 나에게 ‘에반젤린과 비슷하다’ 라는 건 최고의 욕이었다.
나는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그녀가 한 말을 그대로 돌려줬다.
“제 아버지께서는 황후 폐하께서 루스 후작 영애를 교육하신 것처럼 최선을 다했답니다.”
“…!”
나는 웃는 얼굴로 이렇게 맞받아친 셈이다.
‘우리 집 가정 교육은 콩가루인 당신네 모녀보다 나아요.’
살짝이지만 황후의 입매가 굳는 게 보였다.
홀에 들어오면서 주변 분위기를 황후가 읽지 못했을 리 없다.
연회장 안에서 사람들이 모이는 건 곧 권력 구도를 의미하니까.
지금 에반젤린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야말로 벽의 꽃.
늘 사람의 중심에 서 있던 이가 에반젤린이다.
나조차 에반젤린이 저러고 있는 꼴은 처음 본다.
그 어머니인 황후가 저 모습을 보고 어떤 기분일지는 굳이 말이 필요 없겠지.
‘아주… 기분 더럽겠지.’
그 사실이, 나는 너무나도 고소했다.
나와 황후 사이에 당장에라도 ‘파지직!’ 하고 번개가 튈 듯한 긴장감이 치솟았다.
먼저 움직인 건 황후였다.
그녀는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오며 말했다.
“그래도 이제는 남이 아니라 할 수 없으니, 너에게 가르침을 줘야겠구나.”
직접 예의를 가르쳐 주겠다는 선전포고.
하지만 나는 해사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어머,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내궁의 주인이신 황후 폐하께 황태자비로 인정받으니 기분이 새롭네요.”
“…뭐?”